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방정환

위키원
이동: 둘러보기, 검색
방정환

방정환(方定煥)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이다.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이다.

개요[편집]

  • 방정환은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 등의 창간을 비롯 잡지를 편집·발간했다. 창작뿐 아니라 번역 ·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 호는 소파(小波)이며 서울 출생이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17세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했다가 곧 사직하였다. 이후 천도교청년회, 개벽사, 천도교소년회 등과 관련을 맺었다. 1917년 손병희의 딸 손용희와 결혼하여 손병희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면서 어린이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이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했다. 1920년 일본 도쿄의 도요[東洋]대학에서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했다. 1921년 서울로 돌아와 천도교소년회를 만들고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다. 또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켰으며, 어린이 동화집도 냈다.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1923)를 창간하고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여 그 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했다. 또한 《신청년(新靑年)》 《신여성(新女性)》 《학생(學生)》 등의 잡지를 편집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동화구연대회, 소년문제 강연회, 아동예술 강습회, 소년지도자대회 등을 주재하여 계몽운동과 아동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창작동화뿐만 아니라 많은 번역 ·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 저서로는 《사랑의 선물》과 사후에 발간된 《소파전집(小波全集)》(박문출판사, 1940), 《소파동화독본》(조선아동문학협회,1947), 《방정환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2), 《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62), 《동생을 찾으러》(글벗집, 1962), 《소파아동문학전집》(문천사, 1974) 등이 있다. 한편 1957년 새싹회에서는 '소파상(小波賞)'을 제정하여 해마다 수여하고 있다.[1]
  • 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1931년 7월 23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이고, 『어린이날』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한성부 서부 적선방 아주현계 출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소파(小波)이다. 일본 아동문학가인 이와야 사자나미(巌谷小波)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으나, 수운 최제우의 저서인 《동경대전》의 "용담수류사해원 구악춘회일세화(용담의 물이 흘러 온 세상 바다를 이루는 근원이 되고 구미산에 봄이 다시 돌아오니 온 세상이 꽃이구나)"라는 절구에서 가져온 것으로 용담의 작은 물결이 되어 온 세상에 퍼지고 이 땅 위에 지상천국인 봄동산을 이룩하자는 천도교 사상을 담은 것으로 천도교 신자 소춘(小春) 김기전과 함께 '소춘' '소파'라는 호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 이외에도 잔물, 잔물결, 물망초, 몽견초, 몽중인, 삼산인, 북극성, 쌍S,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雲庭), 파영(波影), 깔깔박사, SP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소수의 필자들이 잡지의 지면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1931년 7월 23일(목요일), 오랜 질병과 과로로 인한 신장염으로 사망했다.[2]
  • 방정환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 인권운동가, 아동교육학자, 아동보육, 복지학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독립유공자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아동 및 청소년의 인권을 연구 · 진흥한 선구자격 인물인 동시에, 한국 아동교육학 및 아동문학의 상징이 되는 작가들 중 한 명으로, 《개벽》에 번역 동시인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면서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조어하였으며, 그가 어린이의 인격 및 행복 추구를 위해 1922년부터 기념하기 시작한 어린이날이 오늘날에도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 공휴일로 남아 있다. 1917년,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3녀 손용화와 중매결혼했으며, 1918년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5년간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다. 장인 손병희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법과(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거쳐 현재의 고려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했다. 또한 넉넉한 장인 덕에 집안 형편도 차츰 나아졌다. 1930년대 중앙유치원 사범과(現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유아교육과)에서 아동문학을 가르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본디 허약한 체질이면서 너무 열성적으로 활동한 탓에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는데, 평소 폭식, 골초 등 나쁜 생활 습관이 있었던 것까지 더해 특히 1931년부터 지병인 고혈압과 신장염이 악화되었고, 결정적으로 동아일보의 <신동아> 창간으로 인해 <개벽>의 판매 조직이 와해되고 많은 빚을 지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겹친 데다 자신의 건강을 챙기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해 바쁘게 활동하다 보니 자리에 눕게 되었다. 결국 1931년 7월 9일에 사무실에서 코피를 쏟으면서 쓰러졌고, 입원한지 2주가 된 7월 23일, 향년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고혈압과 신장염으로 별세했다.[3]
  • 방정환은 일제강점기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아동문학가이다. 호는 소파(小波).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방경수(方慶洙)이다. 1909년 매동보통학교에 입학, 이듬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였다.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4년 가정 사정으로 중퇴하였다. 1917년 손병희(孫秉熙)의 딸 손용화(孫溶嬅)와 결혼하였다. 그 해에 청년운동단체인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이듬해인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였다. 1921년 김기전(金起田) · 이정호(李定鎬) 등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월간으로서 일본 동경에서 편집하고 서울 개벽사(開闢社)에서 발행을 대행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였다. 1925년에는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童話口演大會)를 개최하였다. 1928년에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생전에 발간한 책은 『사랑의 선물』이 있고, 그밖에 사후에 발간된 『소파전집』(박문출판사, 1940) · 『소파동화독본』(조선아동문화협회, 1947) · 『방정환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2) · 『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62) · 『동생을 찾으러』(글벗집, 1962) · 『소파아동문학전집』(문천사, 1974) 등 8종이 있다. 1957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소파상(小波賞)'이 제정되고, 1971년 40주기를 맞아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으나, 1987년 5월 3일 서울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으로 이전되었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4]

방정환의 사후[편집]

  • 방정환이 사망한 후 유해는 홍제동의 납골당에 안장되었으나 1936년 7월 23일, 그의 기일에 망우 역사 문화공원으로 이장되었다. 1957년 방정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1958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이 추서되었으며 이후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3월 1일 건국포장이,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1971년에는 색동회가 주관하고 또 전국 어린이들의 성금을 기금으로 하여 2년간 제작한 동상이 남산 어린이회관 옆에 세워졌다. 1983년 어린이날,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는 방정환의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세워졌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 1998년에는 한국방정환재단이 설립되었고 한국방정환재단은 소파 방정환 정신의 구현을 위해 올바른 어린이 문화지평을 넓히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방정환의 정신과 가치를 연구하고(방정환연구총서), 사료를 수집 정리하는 사료편찬사업(정본 방정환전집), 그리고 한국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조사연구와 함께 다양한 작은물결 프로젝트(책 지원사업인 작은물결문고, 미디어 격차해소 지원사업인 작은물결미디어꿈나무, 작은물결 장학금, 작은물결책나눔터, 작은물결 어린이 인문도서출판사업 등)를 통해 창의적인 어린이 청소년 공익활동 전개하고 있다. 이는 오로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고 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유훈을 계승하는 것이다. 2017년에는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는 방정환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방정환의 업적[편집]

  •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요, 사회운동가였다. '소년입지회(少年立志會)'의 조직과 3 · 1독립운동 참가, '천도교소년회' 결성 및 육성이나,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늙은이' ·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킨 일 및 아동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 조직, '어린이의 날' 제정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 번안 및 개작작가 · 동화작가 · 동화구연가 · 아동잡지 편집인으로서의 업적이다. 『사랑의 선물』(개벽사, 1922)을 비롯한 본격적인 개작 번안, 창작동화를 남기며 최초의 대표적인 구연동화가로 활약하고 『어린이』지를 통하여 윤석중(尹石重) · 이원수(李元壽) · 서덕촌 등 아동문학가의 발굴, 육성에 힘썼다.
  • 아동들을 소박하고 천진난만하며 순진무구하게 보고 감상적 · 관념적 · 권선징악적인 작품을 통해서 그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린이의 현실적 · 경제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종래의 전통적인 부당한 대우를 시정하여 감성 해방(동심 회복)을 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는 금세기 한국의 지사(志士)요, 선구적 언론인이요, 교육자요, 문학가로 불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방정환문학상[편집]

  • 방정환문학상(方定煥文學賞)은 아동문학가인 소파(小波) 방정환(1899∼1931)을 기리기 위해 아동문학평론사에서 1991년에 제정한 문학상. 평생을 통하여 아동문학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에 힘쓴 방정환의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서울국제아동문학관 부설 아동문학평론사에서 제정한 아동문학상으로 동시·동화·평론 등의 부문으로 나누어 수상자를 선정한다. 동화 부문에서는 이영호·조장희·윤수천·정진채·조대현 등이, 동시 부문에서는 문삼석·제해만·최춘해·손광세·엄기원·김종상 등이, 평론 부문에서는 김만석·김용희·김경중 등이 수상하였다. 2000년의 제10회에는 동화 부문에 손춘익의 《땅에 그리는 무지개》, 평론 부문에 정선혜의 평론집 《한국 아동문학을 위한 탐색》, 연구 부문에 김자연의 연구서 《한국 동화문학연구》가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소파상[편집]

  • 소파상(小波賞)은 1956년 창립된 새싹회(대표자 윤석중)가 1957년부터 매년 소파 방정환(方定煥)을 기리어 마련한 상이다. 제1회 수상자는 1924년 한국 최초의 동요 《반달》을 작사·작곡한 윤극영(尹克榮)이었다. 소파는 한국 소년운동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3·1운동의 지도자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의 사위답게 《독립신문》을 찍어 돌리다 잡혀간 애국청년이기도 하였는데, 소파상은 어린이 사랑과 나라 사랑을 겸비한 숨은 일꾼을 찾아내어 소파의 모습이 새겨진 상패를 수여하였다. 1988년 제32회 소파상은 수원 난파소년소녀 합창단이 수상하였으며, 이를 끝으로 폐지되었다.

어린이날[편집]

  • 대한민국의 어린이날은 어른으로부터 '아이들, 애, 애들, 계집애' 등으로 불리던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하면서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 사상을 앙양하기 위해 정한 날이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고자 진주를 시작으로 각 지역에 소년회가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1921년에는 방정환, 김기전 등에 의해 천도교소년회가 조직되었고, 천도교소년회가 1922년 5월 1일 창립 1주년을 기념하여 경성 시내에서 '어린이의 날' 가두 선전을 한 것이 어린이날의 역사적 기원이다. 1923년 4월 17일에는 천도교소년회 주도로 조선소년군, 불교소년회 등 각 소년운동 단체들이 참여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결성되었으며, 이 조선소년운동협회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공식 채택하여 매년 행사를 열기로 하였다.
  • 1923년 5월 1일은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주최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개최하기 시작한 제1회 어린이날이다. 한국의 어린이 인권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년운동의 기초 조항'이 발표된 것도 이때다. 이날 방정환을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도 소년운동 활성화를 돕기 위하여 동경에서 색동회를 창립하였다. 5월 1일은 노동절하고 겹쳐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감시와 탄압을 많이 받았다. 1927년에는 5월 첫째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게 되고, 이듬해인 1928년부터 5월 첫째 일요일에 행사를 진행했다. 일제의 탄압이 있던 시기인 1938년부터 중단되었다가, 1945년 광복 이후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살리기 위해 1946년 5월 5일에 다시 부활되었다.[2] 1961년에 제정·공포된 '아동복지법'에서는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이후 1973년에는 기념일로 지정하였다가 1975년부터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방정환(方定煥,1899.11.9.~1931.7.23)〉, 《두산백과》
  2. 방정환〉, 《위키백과》
  3. 방정환〉, 《나무위키》
  4. 방정환 (方定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방정환 문서는 역사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