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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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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양기탁(梁起鐸)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언론인이다.

개요[편집]

양기탁은 언론인·독립운동가이다. 1904년 영국인 E.T.베델과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를 발간하였고 같은 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21년 미국의회의원단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895년 영국인 선교사 J.S.게일(Gale:奇一)의 《한영자전(韓英字典)》 편찬을 도왔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4년간 복역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편집고문에 취임, 만주로 망명하여 의성단(義成團)을 결성하였으며, 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과 통의부(統義府)를 창설하고, 1925년 지청천(池靑天)·김동삼 등과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이때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화성의숙(華成義塾)·동명의숙(東明義塾)을 세워 혁명간부 양성에 힘쓰는 한편, 잡지 《전후》와 《대동민보(大東民報)》를 발행하여 재만한인 계몽에 진력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여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

생애[편집]

양기탁(1871년 4월 2일~1938년 4월 19일)은 1871년 평안남도 강서군 용연면 신경리에서 아버지 양시영(梁時英)과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의종(宜鍾)이었다가 후에 기탁으로 개명했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동학당 및 유림(儒林)의 명망가이며 우국지사인 나현태(羅鉉泰)를 만나 시야를 넓혔다.

1895년 미국인 선교사 게일(Gale,J.S., 奇一) 및 아버지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한영자전(韓英字典)』을 편수하고,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898년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0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게일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개혁당 조직 운동에 가담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기간에 일제가 조선에게 삼림·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保安會) 운동에 참가하였다. 보안회가 일제의 방해 책동으로 해산되자,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고 지방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기자 베델(Ernest Thomas Bethell)과 제휴, 국한문 혼용체의 일간 신문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였다. 그때 신문사의 총무 겸 주필로 근무하면서, 1905년 8월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라는 제호의 영문판을 별도로 발행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와 이토(伊藤博文)를 공격하고 배일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신문 사설을 썼다. 또한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쓴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즉각 게재하였다. 그리고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코리아 데일리 뉴스』지에 실어 전 세계에 알렸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사들이 일제의 「신문지법」에 의해 애국계몽운동 및 의병운동을 보도하지 못하는 등의 제약을 받고 있을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형식상 사장이 외국인이어서 법의 저촉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한매일신보』는 모든 한말 국권 회복 운동의 대변지로 발전되어 갔다. 그래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 통감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양기탁은 '국채보상금횡령(國債報償金橫領)'이라는 누명을 쓰고 구속되었다. 그 뒤 사장 베델이 공소 사실의 허위 조작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자 무죄로 출감하였다.

1907년 4월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회영(李會榮)·이동휘·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 등과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개최된 신민회 전국 간부 회의에서는 독립 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만주의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기로 결정하였다. 1910년 8월 자신이 직접 그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1910년 12월 이동녕과 이회영을 만주로 보내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독립군 기지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안명근(安明根)에 의한 군자금 모금 사건이 일어나자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11년 1월 양기탁 등 16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1911년 9월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시키기 위한 이른바 '데라우치(寺內) 암살음모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원 800여 명을 체포하고 그중 105인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양기탁은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언도받았으나 항소심에서 6년형으로 감형되어 4년간 복역하다가 1915년 2월에 석방되었다. 1916년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 규합에 노력하다가 톈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국으로 압송되어 2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유근(柳瑾)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0년 봄 통천교(統天敎)라는 종교를 창교(創敎)하여 교리를 선포하였는데, 표면으로는 종교 운동을 펼치고 내면으로는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21년 미국 의원단 36명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 진정서를 제출하여 투옥되었다가 어머니의 별세로 가출옥되었다. 이때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1923년 만주에서 편강렬(片康烈)·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여, 국내의 친일파 암살 및 관공서 시설 파괴 등을 지휘하였다.

1924년 11월 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과 의성단·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광정단(匡正團)·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하여 일제를 공격하였다. 1926년 4월 주진수(朱鎭洙)·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 등과 정의부의 무장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30년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국무령(國務領) 이상룡(李相龍)의 사임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거절하였으나, 1934년 의정원 회의에서 법무 담당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 2월 2일 가흥(嘉興)에서 국무원이 개설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35년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해 의열단·신한독립단(新韓獨立團)·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등의 5당통일회의가 개최되고 이를 통합한 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으로 개명]이 조직되자,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유동열(柳東說) 등과 이에 가담하여 대일전선통일에 노력하였다.

요양과 사망[편집]

양기탁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터지자 대일본 전쟁에 동참할 기회로 판단, 대일 결전이 임박했다며 1937년 8월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등 3당과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대한인독립당, 동지회, 국민회, 애국부인회, 단합회(團合會), 애국단 등 6개 단체를 소집, 8월 난징하여 회의 끝에 이들 단체의 연합체인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조직, 결성하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에서는 이들을 정규 군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했고, 일부 조선의용대만이 중국군의 예하대로 참전하게 된다.

양기탁은 망명 생활과 5당 합당 추진과정에서 피로가 누적되면서 과로로 체력이 약화, 갑자기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병원에 갈 수 없었고, 1938년 그는 병을 얻어 중국 장쑤성으로 내려가 율양(栗陽) 길당암(吉堂庵)에서 건강을 회복하려고 쉬면서 요양하였으나 쾌유하지 못했다. 또한 몇 개의 한약재로 병을 다스리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938년 4월 19일 중국 장쑤 성 율양 길당암에서 피로 누적으로 인한 과로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68세였다.

양기탁의 시신은 국내에 운구되지 못하였고 장쑤성의 야산에 안장되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분묘발굴조사단이 투입, 중국 짱수 성에 매장된 양기탁의 묘소를 확인한 뒤 순국선열 봉영때 유해봉환하여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백암 박은식의 양손자인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장관 박유철은 양기탁에게 손녀사위가 된다.

양기탁과 영어의 인연[편집]

양기탁은 15세 때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하였다. 1885년 제중원이 세워지면서 외국인 의사를 보조할 사람이 양성하기 위해 제중원 내에 일종의 외국어학교가 부설되었다. 알렌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을 통해 팔도에 이 학교에 입학할 학생을 추천해줄 것을 의뢰하였는데 평안도에서는 양기탁을 추천하였다. 그는 이때 추천을 받아 서울에 올라와 이곳에서 영어를 배웠다. 이것이 그가 영어와 인연을 맺은 첫 번째 계기였다.

양기탁이 영어와 인연을 맺은 두 번째 계기는 미국 선교사 게일Gail,J,S. 奇一)과의 만남이었다. 게일은 1891년 초부터 1897년 3월까지 약 6년간에 걸쳐서 《한영자전》 편찬사업을 벌였는데 양기탁은 부친과 함께 이 사업에 참여하였다. 당시 게일은 원산에 머물면서 이 사업을 벌였는데 양기탁 부자도 원산에 옮겨가서 이 사업을 도왔다. 양기탁은 《한영자전》 편찬사업이 마무리될 무렵인 1896년 5월경부터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가 그곳의 상업학교에 근무하면서 일본 학생들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원산에 주재한 일본영사관원의 소개로 이 학교에 초빙된 것으로 알려졌다.

양기탁은 한성전기회사 사무원으로 취직한 이듬해인 1904년 3월 10일에는 예식원의 영어 통역관으로 임명되었다. 예식원은 궁내부 소속 관서로서 당시 외국 사신들의 문서와 국서 등을 해석하거나 통역하는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양기탁은 한성전기회사를 디딤돌로 해서 대한제국의 관원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당시 그의 출세를 위한 무기는 영어였다.

105인 사건[편집]

105인 사건(百五人事件)은 1911년 1월 1일부터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가 서북 지방의 신민회, 기독교, 부호, 지식층 등의 항일세력에게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 모의 누명을 씌우고 대거 체포하여 한국의 민족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이다. 양기탁은 징역 10년의 판결을 받았지만 4년 형을 살고 출소하였다.

1910년 12월 27일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가 독립군 양성자금을 모으던 안명근 등을 체포한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을 시작으로, 안명근사건과 엮어서 황해도 일대의 항일지도자들을 체포한 안악사건(安岳事件)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안명근사건을 안악사건이라고도 한다. 1911년 1월 1일부터는 평안도 일대의 기독교, 신민회, 부호, 지식층 등의 항일세력에게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 모의 누명을 씌우고 대거 체포한 신민회사건(新民會事件)이 발생되었다. 신민회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인물이 105인이기 때문에 신민회사건을 105인사건(百五人事件)이라고도 한다.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다 같은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2]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양기탁(梁起鐸,1871.4.2.~1938.4.19)〉, 《두산백과》
  2. 105인 사건〉,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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