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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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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이다.

개요[편집]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조각·건축·토목·수학·과학·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그의 명성은 몇 점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비롯하는데, 〈최후의 만찬〉·〈모나리자〉·〈동굴의 성모〉·〈동방박사의 예배〉 등이 그러하다.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생존했던 가장 경이로운 천재 중 하나다. 그의 생애를 대개 5시기, 즉 제1차 피렌체 시대(1466~1482), 제1차 밀라노 시대(1482~1499), 제2차 피렌체 시대(1500~1506), 제2차 밀라노 시대(1506~1513), 로마·앙부아즈 시대(1513~1519)로 구분한다.[1]

생애[편집]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년 4월 15일~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의 예술가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석학(polymath)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와 직업을 갖고 활동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근교 빈치에서 출생하였다. 빈치(Vinci)는 현 피렌체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25km 떨어진 곳으로 아르노 강의 여러 지류 중 위쪽에 자리한 산골 부락이다. 다빈치의 생가는 보존되어 있어 많은 방문객들이 레오나르도 박물관과 생가를 찾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공증인 세르 피에로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카타리나(Catarina)라는 이름을 가진 농사꾼의 딸로, 신분의 차이로 아버지와 공식적인 혼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 아버지 피에로 다 빈치(Piero da Vinci)는 법률가들을 배출한 지주 가문 출신으로 직업은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 재주가 뛰어났으며, 그림 그리기를 즐겨 하였다. 1466년 피렌체로 가서 부친의 친구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에게서 도제 수업을 받았으며, 이곳에서 인체 해부학을 비롯한 자연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사실상 15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사실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에 성공하였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주관과 객관의 조화로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만년에 이르러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회화론·과학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기체역학·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연구결과는 19세기 말에 들어서 주목을 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고 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이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란세스코 멜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 듯,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유언장에서 그는 사후 프랑스에 묻히길 희망했고 그의 연애 상대였던 살라이와 다빈치의 하인 바티스타에게 밀라노 공작에게 받은 포도밭을 반씩 나누어 상속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모나리자' 등의 그림과 메모가 적힌 노트들을 제자인 멜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의 프랑스 클로 뤼세(Clos Lucé)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업적[편집]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다. 1473년 수업을 끝내고 피렌체 화가 조합에 등록하여 한 사람의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6년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그림인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력하고, 그 좌단에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석죽의 성모>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들은 이야기인 <수태 고지>, <베노바 가의 성모>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1481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다. 약 17년 동안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다.

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의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 <성 모자와 성 안나>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와 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다.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장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파동 운동 이론, 연통관 내의 압력, 유체에 미치는 압력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 응용 면에 있어서 양수기와 수압의 발견자였다. 새의 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비행기의 원리를 생각하고 공기의 연구에서 바람의 발생과 구름과 비의 발생도 이론적으로 연구했다. 또 공기 역학, 조류의 비행 등의 연구 노트에는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해부학에 있어서도 인체 각 부분의 작용을 역학적 원리로서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 식물학 등에 관해서도 연구를 하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밝힌 천재였다. 저서로, 그림에 관한 르네상스 예술 이론의 중요한 문헌인 <회화론>을 비롯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 한동일 서강대학교 교수가 쓴 《라틴어수업》(흐름출판)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과 과학뿐만 아니라 라틴어 공부도 했다.

평가[편집]

2007년 11월에 네이처 지가 선정한 인류 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 중에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차지했다. 네이처는 과학 전문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과학자를 1위에 뽑을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으며 2위는 세익스피어였고, 과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간신히 6위를 차지했다. 르네상스형 만능인 다빈치가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융합형 인재로 평가된 것이다. 그는 평생 기술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창의적인 노력을 끓임없이 시도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여러 작품 중 오늘날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리자이다. 모나리자 없이는 루브르 박물관을 논할 수 없다는 평가가 존재할 정도로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매우 유명한 그림이다. 그 외에도 '최후의 만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세기의 명작으로 손꼽을 수 있다.[2]

최후의 만찬[편집]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이탈리아어: Il Cenacolo)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 작품은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마지막 날 있었던 최후의 만찬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은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수도원의 식당 벽화로 그려진 것으로, 가로 880cm, 세로 460cm 크기의 거대한 작품이다. 레오나르도는 1495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498년에 완성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불리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 몇 안되는 완성작 중 하나지만, 가장 손상이 심한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 빈치의 과학적 연구가 회화에 응용된 이 그림은 석고에 유채로 그렸기 때문에 그가 죽기 전에 이미 파손되었다. 원형의 아름다움은 성 필리포 등의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소묘에 의존하여 파악해야 한다. 다빈치가 얼마나 철저하게 초기 르네상스의 양식을 개혁하였느냐 하는 것은 카스타뇨와 기를란다요의 같은 제목의 벽화와 비교하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간결하게 그 중심 과제에 집중하였고 또한 극적인 것이다.

모나리자[편집]

모나리자

모나리자(Mona Lisa)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富豪)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를 위하여 그 부인을 그린 초상화이다. 이 초상은 눈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典型)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라는 설, 미완성작이라는 설, 원래 눈썹이 그려졌으나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또 2009년에는 프랑스의 미술전문가가 240메가픽셀의 특수카메라를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다 빈치는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유약으로 여러 겹을 특수처리하였고, 가장 바깥에 그려졌던 눈썹이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을 일으켜 사라지거나 떨어져 나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다 빈치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하여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心氣)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神技)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기(傳記)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시대에 해당하는 1503∼15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風說)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르네상스[편집]

르네상스(이탈리아어: Rinascimento) 또는 문예 부흥(文藝復興), 학예 부흥(學藝復興)은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일어난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을 말한다. 이것은 과학 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를 근세와 이어주는 시기가 되었다. 여기서 문예부흥이란 구체적으로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옛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人間中心)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유럽은 르네상스의 시작과 더불어 기나긴 중세시대의 막을 내렸으며, 동시에 르네상스를 거쳐서 근세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정신, 혹은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비롯되었으며, 얼마 안 가 알프스를 넘어 유럽의 다른 국가, 즉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페인 등지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나라들은 이 운동에 거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초 이 운동의 인문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교회 개혁과 학문적 방법에 영향을 주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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