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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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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장비(중국어:张飞zhāng fēi)는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이다. 유비·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었고 후한 말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개요[편집]

장비는 유비의 익주 공략 때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가 되고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자는 '익덕(益德)'으로 《삼국지연의》에는 '익덕(翼德)'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격이 호쾌하여 생각한 바를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기질의 인물이었다. 후한(後漢) 말 동란기에는 유비, 관우와 함께 공손찬, 공융, 도겸 휘하에서 장수로 참전하여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고 위(魏)나라의 명장 장합이 장로(張魯)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車騎將軍)·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었다. 장비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였고 지나치게 부하들에게 엄격하여 원성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유비에게 훈계를 자주 듣기도 하였다. 유비가 형주에서 죽음을 당한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吳)나라 동정(東征)을 명했는데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술에 취해 잠이 들었을 때, 자신의 부하였던 장달과 범강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진다. [1]

장비의 생애[편집]

장비(165년~221년)는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의형제인 유비, 관우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이름을 떨쳤다. 무예와 용맹이 매우 뛰어나서 관우와 함께 만인적이라 불렸다. 특히 장판 전투, 서촉 공방전, 한중 공방전에서 활약했다. 어려서부터 유비를 섬겼다. 유비는 장비의 자(字)인 익덕(益德)을 지어준 장본인이다. 당시의 관례에 의하면 자신의 자를 지어준 사람에게는 친아버지의 대우를 해야 한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다. 이에 따라 장비는 평생 유비 단 한 사람만 섬겼다. 관우는 이 이후에 만난 사이이다. 따라서 장비는 간옹과 더불어 유비를 가장 먼저 섬긴 사람들이다.

장비는 탁군 사람이다. 유비가 평원상일 때 별부사마(別部司馬)를 했다. 196년(건안 원년) 서주목 유비가 원술을 치러가면서 도겸의 옛 부하이자 하비상인 조표와 같이 하비를 지켰다. 그러나 서로 다투어서 조표가 여포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유비의 처자식을 남겨둔 채 패주했다. 198년 여포가 토벌된 후 조조가 중랑장을 주었다.

199년 유비는 동승과 조조 주살을 모의하다가 서주로 출정하여 거병하였다. 이때 장비가 진의록에게 '귀공의 전처를 조조가 취하지 않았냐'며 동참을 권하였다. 이에 따라오던 진의록이 이내 후회하여 돌아가려고 하자 죽였다. 200년 유비군은 조조에게 패배하여 하북의 원소에게 귀의하고 장비도 여기에 동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와중에 하후연의 열서너 살 된 조카딸이 땔감을 모을 때 만나서 양갓집 규수임을 알고는 처로 삼았다. 그러나 위략 자체가 신빙성이 부족한 기록이 많고 기록상으로도 사건이 벌어진 200년에 장비는 유비를 따라 서주와 화북으로 도주하던 시기라 하후씨가 납치되었다는 고향(예주 초현)에 들렀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며, 조조의 친인척이 땔감을 모으는 잡일을 하는 등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부족하다.

208년 조조가 형주로 군을 움직이면서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빠르게 추격해온 조조군을 당양(當陽)의 장판(長阪)에서 20기만을 거느린 채 다리를 끊어 막았다. 눈을 부릅뜨고 모를 가로로 들어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니 아무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적벽대전 후 마침내 유비가 강남을 평정하자 의도 태수 겸 정로장군(征虜將軍)에 임명되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해졌다. 이후 남군 태수로 전임되었다.

215년 조조가 장로의 한중을 손에 넣고 하후연과 장합을 남겨둔 채 돌아갔다. 장합이 파서군으로 내려와 그 주민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기에 탕거현(宕渠縣)에서 서로 겨루었다. 50여 일을 대치한 끝에 정예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와구(瓦口)를 공격하였다.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서 앞뒤가 서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장합은 부하 10여 명과 같이 말을 버리고 산을 타 퇴각한 후 패잔병을 수습하여 남정(南鄭)으로 돌아갔다. 217년 마초, 오란, 뇌동과 하변(下辯)에 주둔하니 조홍이 맞서 왔다. 218년 유비가 직접 한중으로 나아갔다. 3월(음력) 장비는 오란과 따로 기동하며 조홍군의 뒤를 끊는 척 시위하였다. 조홍이 조휴의 진언으로 이것이 허장성세임을 간파하고 바로 오란을 습격하여 격파하자 장비는 유비의 본진이 있는 양평관(陽平關)으로 물러났다.

219년(건안 24년) 비로소 유비가 한중을 정복하고 한중왕에 올라 우장군 가절(假節)을 주었다. 221년(장무 원년) 유비는 제위에 오르고 장비는 거기장군 겸 사례교위가 되고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다. 이전에 관우가 죽은 것 때문에 유비가 오나라 정벌에 나서자 낭중(閬中)으로부터 만 명을 인솔하여 강주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장비의 폭력을 당했던 부하 범강, 장달에게 암살당했다. 후사는 차남 장소가 이었다. 260년(경요 3년) 관우, 마초, 방통, 황충과 함께 시호를 받아 환후(桓侯)라 하였다.

도원결의[편집]

도원결의(桃園結義)는 후한 말 영제시대 황건적이 일어나 유주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있었던 때에 유비, 관우, 장비가 장비의 집 뒤뜰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은 일을 말한다. 관우와 장비는 형제 같은 우애로 지내고 있었는데, 후한의 왕손 유비를 만나서 장비의 집 뒤뜰에서 의형제를 맺었다. 훗날 이 일을 복숭아 밭에서 맺은 결의라고 하여 도원결의라고 불렀다.

황건의 난이 일어났던 서기 184년에 현재의 허베이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에 해당되는 유주 탁현에서 도원결의가 맺어졌다. 삼국지 판본에 따라 장비의 집이 아닌 유비의 집에서 결의했다고도 나온다. 이때의 결의는 후세 사람들에게도 아주 유명한 결의 중 하나다. 하지만 연의에서 지어낸 이야기일 뿐,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 많다.

윈양 장비묘[편집]

윈양 장비묘(雲陽 張飛廟)는 중국 충칭(重慶) 윈양현(雲陽縣)에 흐르는 양쯔강(長江) 남쪽 기슭에 있는 장비(張飛)의 사당이다.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명장 장비를 기리는 사당으로, 그의 시호를 따서 장환후묘(張桓候廟) 또는 장환사(張桓祠)라고도 한다. 페이펑산[飛鳳山]을 등지고 양쯔강과 인접한 곳에 산세를 따라 축조되어 기세가 장관을 이룬다. 문헌에 따르면, 3세기 중반에 창건되었으며, 북송(北宋)의 신종(神宗) 때 대규모 보수작업이 이루어져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1870년 청나라 동치제(同治帝) 때 홍수로 크게 훼손되었으며, 현존하는 사당은 그 뒤 재건 및 보수작업을 거쳐 보존된 것이다.

주요 건축물은 산문(山門)·결의루(結義樓)·망운간(望雲矸)·정전(正殿)·조풍각(助風閣)·득월정(得月亭)·두견정(杜鵑亭)과 곁채로 이루어져 있다. 결의루는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의 도원결의 고사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다. 결의루 뒤편에 있는 정전은 사당의 주 건물이자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하다. 정전 안에는 높이 3m인 장비의 소상(塑像)이 있는데, 두 눈을 부릅뜨고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나갈 것만 같은 자세로 생동감이 넘친다. 조풍각은 5각형의 정각식(亭閣式) 건물로, 장비가 자신의 수급을 거두어 페이펑산에 묻어준 파촉(巴蜀)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날마다 윈양 지역에 흐르는 양쯔강에 바람을 3번 크게 일으켜 배가 순항하도록 도왔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어 지어졌다. 이는 자연현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람들은 장비를 기리는 마음이 담겨 있다. 사당 앞에 "삼십리풍 주선조순(三十里風 舟船造順)"라고 새겨진 비석을 세운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당에는 약 300점의 마애석각(摩崖石刻)과 200여 점의 목각(木刻) 서화가 보전되어 있으며, 양쯔강 수문(水文) 역사를 기록한 용척석(龍脊石) 등 진귀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득월정 옆에는 허공에 걸려 있는 듯한 폭포가 눈길을 끈다.

평가[편집]

유비, 관우와의 우애가 끈끈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유비가 탁군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부터 형처럼 여긴 관우와 함께 유비를 위해 싸웠다. 이들은 한방에서 같이 잤고 그 정은 형제 같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하루 종일 유비 곁에 서서 윗사람처럼 모셨으며 고난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어디든 따라다녔다.

장비는 그의 정치 가치와 충성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후한의 성공적인 재건을 도모하기 위해 장비는 후한의 고려된 발전과 국가 안정을 추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충성심과 충신의 정신을 바탕으로 후한의 유명한 장군들과 함께 자국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장비는 뛰어난 학자이자 용맹한 장수였다. 학문에 뛰어난 인재로서 그의 군사적 기량은 언제나 감탄을 자아냈다. 장비는 후한의 관료 제도와 행정 체계 개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치적 무능력자를 배제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임용하며, 행정 능력 있는 사람들을 우대하였다. 이러한 장비의 행정 능력은 후한의 국가 발전과 안정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후한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행정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용맹한 장수나 훌륭한 장수를 일컬을 때마다 "관우와 장비 같다"라는 표현이 주로 쓰이는 것으로 보아 이후 중국에서는 관우와 장비를 용맹한 장수의 아이콘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보아 관우와 장비의 용맹과 장수로서의 능력이 당시는 물론 후세까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장비(張飛,?~221)〉,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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