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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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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이승만(李承晩)은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이다.

개요[편집]

  • 이승만은 광복 후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로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선 후, 4·19 혁명으로 사임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우남(雩南), 초명은 승룡(承龍)이다. 1875년(조선 고종 12) 3월 26일(양력 4월 18일)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위의 두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으로 지냈다.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反共)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 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 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 《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1]
  • 이승만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초기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마지막 주석,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로 왕실 후손이며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서훈되었다. 아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9년 농지개혁법 제정,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했다.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사수하였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을 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하야했고, 하와이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2]
  • 이승만은 1875년(고종 12년) 조선 황해도 평산에서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승만은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이자 태종 이방원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이후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연마하였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YMCA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하에서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퇴위 음모에 가담한 사실이 있어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중에 사면되어 을사조약의 국제법적 부당함을 주장하는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돼 활동하였고, 한국의 주권회복을 위한 청원외교를 전개하였다. 이후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이후 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초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거쳐서 1948년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이후 직선제로 바뀐 1952년 2대 대선과 1956년 3대 대선에서도 2연속으로 도전해 왔던 무소속 조봉암 후보를 이기면서 총 12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3]
  •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고종 12)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출생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으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두 아들이 일찍이 사망해 집안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해 낙동(駱洞)과 도동(桃洞)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4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1896년 배재학당 내에서 청년단체인 협성회(協成會)에 참여하였으며, 협성회의 주간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창간해 주필을 맡았다. 1891년 박승선과 결혼하였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유엔 감시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였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해 무투표 당선되었다. 그러나 3 · 15부정선거로 4 · 19혁명이 발발하자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梨花莊)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1965년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4]

이승만의 생애[편집]

  • 이승만은 젊은 시절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倍材學堂)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1895년에 졸업하였다. 일본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대한 복수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위기를 모면,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1904년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귀국,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지만,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14년 박용만(朴容萬)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西歐)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國民會)를 분열시키고 따로 좌파세력을 규합, 동지회(同志會)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191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漢城)임시정부와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와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내부의 무단파(武斷派)로부터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가 있었다.
  • 이승만은 워싱턴군비축소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정부 및 국제연맹 등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雩南派)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島山派)의 대립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노선에 분열이 나타났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1945년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1946년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1948년 7월 24일 취임하였다.
  •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이승만의 거주지[편집]

  • 제주 이승만별장(濟州 李承萬別莊)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이승만 별장으로 사용했던 근대 건축물. 2004년 9월 4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57년에 미군의 지원을 받아 지은 귀빈 숙소로 벽돌조 박공지붕 형태의 전원형 단독주택 건물이다. 당시 국가원수였던 대통령 이승만이 사용했다. 1층 15평 규모이며 이국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실내는 침식 분리의 입식 생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사진을 비롯해 여러 가지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미국식 주택 건축 양식과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근대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산156번지에 있다.
  • 창원 이승만 전대통령 별장 및 정자(昌原 李承晩 前大統領 別莊 및 亭子)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현동에 있는 별장 및 정자이다. 1990년 1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지 998㎡(302평), 건평 218㎡(66평)에 별장 2동과 정자 1동으로 집무실 겸 응접실, 침실, 경호실, 기타 부속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군 통신대가 사용하던 건물을 1945년 10월 5일 대한민국 해군에서 인수, 이를 개축하여 당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1949년 8월 8일 이승만과 장제스[張介石] 당시 타이완 총통이 이곳 육각정에서 태평양 동맹 결성을 위한 예비회담 개최를 필리핀 대통령에게 제의한 바 있는 곳이다.
  • 화진포 이승만 별장(花津浦李承晩別莊)은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 화진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이승만의 별장이다. 이승만이 대통령 재임 시 부인과 함께 수시로 찾았던 별장으로 1954년 건립되었다. 1961년부터 방치되던 것을 1997년 7월 육군이 재건축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단층 석조 건물로 면적은 89.25㎡이다. 집무실·침실·거실을 재현하였으며, 이승만 부부가 사용한 침대·낚시 도구·의복·안경·장갑·여권·편지 등 유가족이 기증한 유품 53점을 전시하고 있다. 별장 뒤에는 친필 휘호·의복·소품·도서 등을 전시해 놓은 이승만대통령화진포기념관이 있다. 1km 남짓한 거리에 있는 화진포의 성(김일성 별장)·이기붕 별장과 함께 역사 안보 전시관을 이루고 있다.

평화선[편집]

  • 평화선(平和線)은 1952년 1월 18일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한국 연안수역 보호를 위해 선언한 해양주권선이다. 이승만의 주장에 따라 선포하였다 하여 '이승만라인' 또는 '이라인(Lee Line)'이라고도 한다. 이 평화선은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에 달하며, 이 수역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정한 것으로, 일본을 비롯한 우방들의 반대가 있었다. 평화선의 선포를 위한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부는 국가의 영토인 한반도 및 도서의 해안에 인접한 해붕(海棚)의 상하에 이미 알려진 것과 또 앞으로 발견될 모든 자연자원 ·광물 및 수산물을 국가에 가장 이롭게 보호 ·보존 ·이용하기 위하여 그 심도 여하를 불문하고 인접해붕에 대한 국가의 주권을 보존하며 행사한다. 평화선 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원을 보유 ·보호 ·보존 ·이용하는 데 필요한 다음과 같은 한정된 연장해안에 걸쳐 그 심도 여하를 불문하고 인접국가에 대한 국가의 주권을 보지(保持)하며 행사한다. 상술한 해양에 존재하는 모든 자원을 감독 ·보호할 수역을 한정할 경계선을 선언하며 유지한다. 이 경계선을 앞으로 구명될 새로운 발견 ·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에 인하여 발생하는 새로운 정세에 맞추어 수행할 수 있다.
  • 해양주권선(海洋主權線)은 1952년 1월 18일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한국의 영토 ·도서의 인접수역에 대한 주권을 선포함으로써 설정된, 한국의 주권이 미치는 독점수역(獨占水域)을 긋는 선이다. '평화선'이라고도 하며 일본측에서는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는 이 인접해양주권선의 선포로, 독도(獨島)의 영유권(領有權)을 내세운 일본의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국제선례에 따른 이 선언은 국방상 이유와 수산물 ·광물자원의 보호를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편, 평화선이 선포된 지 8개월 후인 1952년 9월 당시 국제연합군 사령관 M.W.클라크는 북한의 잠입을 막고, 전시(戰時) 밀수출입품의 해상침투를 봉쇄할 목적으로 한반도 주변에 해상방위수역을 설정하였다. '클라크라인'으로 불린 이 수역이 평화선과 거의 비슷한 수역이었으므로, 평화선 선포를 간접적으로 지원한 결과가 되었다. 평화선은 1965년 6월 한일조약 체결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이승만(李承晩,1875.3.26.(음)~1965.7.19)〉, 《두산백과》
  2. 이승만〉, 《위키백과》
  3. 이승만〉, 《나무위키》
  4. 이승만 (李承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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