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
양규(楊規)는 고려 초기의 고려와 거란전쟁 때 활약한 문관이자 장수이다.
개요[편집]
- 양규는 고려의 장군으로 거란의 제2차 침략(1010~1011) 때 흥화진을 지켜내고 곽주·무로대·이수·석령·여리참 등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여 많은 포로를 구출하고 고려를 승리로 이끌었다. 출신과 생년이 역사서에 보이지 않으며, 1010년(현종 1)부터 그 행적이 확인된다. 양규는 목종(穆宗)을 섬겼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형부낭중(刑部郎中)의 관직에 이르렀다. 그가 형부'낭중'을 역임하였다는 점, 당시 고려에는 무신을 선발하는 무과(武科)가 시행되지 않았다는 점, 고려 전기까지 군 지휘관은 대부분 문신(文臣)이었다는 점에서 본래 양규는 문신이었음이 유추된다. 이는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등이 문과(文科)에 급제한 문신이었으면서도 군사 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양규는 문신 출신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거란의 제2차 침략에서 거란은 흥화진-통주-곽주-안북부(安北府, 평안남도 안주시)-서경(西京, 평양직할시)의 비교적 평탄한 해안 교통로를 이용하여 개경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흥화진, 통주, 서경은 제압하지 못했고, 함락시켰던 곽주는 양규의 공격으로 다시 고려의 통제에 들어갔다. 거란이 이용한 교통로에서 거란군의 영향이 미치는 곳은 하나도 없게 된 것이다. 이는 개경을 함락시킨 거란이 서둘러 고려와 강화하고 철군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결국 거란은 개경을 출발하여 서경과 안북부를 거쳐 귀주(龜州, 평안북도 구성시)-무로대의 험한 내륙 교통로를 따라 철군할 수밖에 없었고,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까지 고려군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양규는 고립된 군대를 이끌며 약 한 달 동안 거란군과 7번 싸워 수많은 거란군을 죽이고, 다량의 낙타·말·병장기를 거두었으며, 포로가 된 백성 3만여 명을 되찾았다. 거란의 후방에서 벌어진 양규의 활약이 거란의 제2차 침략에서 고려가 승리를 거둔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1]
- 양규는 고려의 문관이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때 도순검사(都巡檢使)로서 활약하여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추봉되었다. 양규는 역사서에서 출신과 생년 정보가 확인되지 않으며 1010년부터 행적이 확인된다. 그는 목종 때 여러 차례 승진해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다. 1011년(현종 2년) 봄 거란군이 철수하게 되자 귀주(龜州,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 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무로대(無老代)에서 귀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을 기습해 2,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 명을 구출했다. 다시 이수(梨樹)에서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거란군 2500명을 베고 포로 1000명을 구출하였다. 이후 여리참(余里站)에서는 거란군 1,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1,000명을 구출했고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艾田)에서 교전하여 1,000여 명을 베었다. 그리하여 고군에서 순월 사이에 7차례나 거란군을 기습해 적 65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3만 명을 구출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전리품을 노획했다. 하지만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김숙흥과 함께 거란 성종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항전하다가 함께 전사했다. 거란 전쟁의 전공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고, 부인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는 교서와 함께 양곡 100석이 하사되었으며, 아들 양대춘(楊帶春)은 교서랑(校書郎)이 제수되었다. 1019년(현종 10)에 공신녹권(功臣錄券)이 내려지고, 1024년에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봉되었다. 문종(文宗) 때 양곡 100석이 하사되었으며, 공신각(功臣閣)에 도형(圖形)되었다.[2]
- 양규는 고려 시대 초기, 11세기 초엽에 벌어진 제2차 여요전쟁 시기에 맹활약한 관리이자 군인이다. 거란-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이자 명군이었던 성종 야율융서가 친정했을 때, 소수 정예의 고려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며, 포로로 끌려가던 여러 백성을 구출해낸 영웅으로 《고려사》에서 유금필, 척준경, 김경손 등과 함께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큰 전과를 올린 고려의 용장 중 한 명에 해당한다. 제1차 여요전쟁의 주인공 중군사 서희가 강동 6주를 차지하여 거란의 공세를 이겨낼 기틀을 마련했고, 제3차 여요전쟁의 주인공 고려 군주 현종과 상원수 강감찬이 금교역 전투, 귀주 대첩으로 길었던 대거란 전쟁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면 도순검사 양규는 그 사이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 제2차 여요전쟁의 주인공으로 고려의 멸망을 극적으로 막아낸 구국의 명장이라 할 수 있다. 대(對) 거란 전쟁 이전 초년기의 양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선천군편에 따르면 양규가 안악군 출신이라고 하고 있다. 발해의 유력 가문인 우성망족 중 하나로 양씨가 있고, 한국사에서 양규 이전 시대에 기록된 양씨라고는 발해의 양씨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사후 양규는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써서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00섬을 지급하게 했고,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 벼슬을 내렸다. 한편,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에게도 장군직을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게 했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1019년(고려 현종 10)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가 개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양규가 개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이다. 뒷날 11대 문종(현종의 3남)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두 사람의 초상화를 신흥사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3]
- 양규는 고려 전기 형부낭중, 도순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이다. 목종(穆宗) 때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으며, 1010년(현종 1)에 거란의 성종(聖宗)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진사(鎭使) 정성(鄭成)과 부사(副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 장호(張顥) 등과 더불어 성을 굳게 지키며 완강히 저항하고 항복 권유를 물리쳤다. 이에 거란군은 포위를 풀고 통주(通州)에서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 부대를 격파한 뒤 남진하였다. 거란군은 이때 사로잡은 노전(盧戩)을 흥화진에 보내 항복을 권했으나, 오히려 노전을 사로잡고 성을 더욱 굳게 지켰다. 그 뒤 군사 700여 명을 거느리고 흥화진을 출발하여 통주에서 강조의 부하였던 병사 1,000여 명을 수습해 곽주(郭州)에 머무르고 있던 거란병 6,000여 명을 공격하여 성을 탈환하고 성 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1011년에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顯祖)이 나주까지 피란 갔으나 거란군과의 철병교섭이 성공해 거란군이 물러가게 되었다. 이에 양규는 구주(龜州) 방면으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무로대(無老代)에서 2,0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 명을 탈환하였으며, 석령(石嶺)에 이르러 다시 2,5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된 1,000여 명을 탈환하였다. 거란의 군사가 갑자기 몰려와 구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과 더불어 싸웠으나, 남은 군사가 얼마 되지 않고 화살이 떨어져 진중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양규는 고군(孤軍)으로 한 달 사이에 7차례 싸워 적을 6,500명 베고 포로가 된 백성 3만여 명을 구했으며, 낙타 · 말 · 병장기 등 노획물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4]
양규의 활동 사항[편집]
- 1010년 11월 거란의 황제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가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고려를 직접 공격하여 거란의 제2차 침략이 발발하였다. 11월 10일(이하 음력)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넜고, 16일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피현군)을 포위하였다. 양규는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가 되어 흥화진사(興化鎭使) 호부낭중(戶部郎中) 정성(鄭成), 흥화진부사(興化鎭副使)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흥화진을 사수하였다. 성종은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 밖의 백성을 사로잡아 그들을 흥화진에 보내 '목종은 거란의 번신(藩臣)었는데 강조에 의해 시해되었으니 강조를 잡아 보낸다면 회군하겠다'며 항복을 권하였다. 그러나 흥화진을 지키던 장수들은 항복 권유에 응하지 않았고, 성종이 은그릇, 비단옷 등을 보내며 다시 귀순을 재촉하였으나, 이번에도 따르지 않았다. 22일 성종은 이들이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무로대(無老代, 평안북도 의주군)에 주둔시키고, 다른 하나는 통주로 이동시켰다. 통주에서 강조를 제압한 성종은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강조의 명의로 위조하여 양규에게 보냈다. 그러나 양규는 '나는 왕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며 따르지 않았다.
- 1010년 12월 6일 거란은 곽주(郭州, 평안북도 곽산군)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6,000여 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양규는 16일 흥화진에서 군사 700명을 이끌고 통주로 이동하여 패잔병을 1,000명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17일 밤을 타 곽주로 이동하여 그곳을 지키던 거란군을 급습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남녀 7,000여 명을 구출하여 통주로 옮겼다. 1010년 12월 28일 현종(顯宗)은 강감찬의 권유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였고, 1011년(현종 2) 1월 1일 성종이 개경(開京, 개성특별시)에 입성하여 태묘(大廟), 궁궐,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11일에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양규는 18일 군대를 이끌고 무로대를 지키던 거란군을 습격하여 2,000여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3,000여 명을 되찾았다. 다음날인 19일 이수(梨樹)에서 거란군과 충돌하여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2,500여 명을 죽이고 포로 1,000여 명을 구출하였다. 22일 여리참(余里站)에서 거란군과 싸워 1,000여 명을 베고 포로 1,000여 명을 되찾았는데, 이 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성종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양규는 귀주(龜州) 별장(別將) 김숙흥(金叔興)과 종일 싸웠으나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모두 전사하였다. 이러한 양규의 분전에 힘입어 29일 흥화진에 주둔하였던 정성의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고 잃었던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 조선과 거란의 전쟁은 두 나라의 전쟁뿐이 아닌, 한 시대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상훈[편집]
- 1011년 2월 현종은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였고, 4월에는 양규의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 평생토록 곡식 100섬을 내리고 아들 양대춘(楊帶春)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였다. 아울러 현종은 직접 교서(敎書)를 써 홍씨에게 내리며 양규의 능력을 칭찬하고 그의 활약으로 여러 성(城)과 진(鎭)이 보전되었다고 하였다. 1019년(현종 10) 현종은 양규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1024년(현종 15)에는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고려 태조(太祖)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삼한공신 중에서도 신흥사(新興寺)의 공신당(功臣堂)에 초상화가 걸린 자들을 특별히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 하였다. 삼한후벽상공신은 삼한벽상공신에서 후(後)가 추가되었으니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에 최고의 공을 세웠다는 뜻인 것이다. 고려의 10대 왕인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은 양규의 공을 기려 공신각(功臣閣)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두게 하였다.
-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이후 그 관직이 안북대도호부부사(安北大都護府副使)를 거쳐 직문하성(直門下省) 위위경(衛尉卿)에 이르렀다.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시기에는 양규의 증손 신기직장(神騎直長) 양제보(楊齊寶)에게 은합(銀榼)을 내렸다. 이처럼 양규의 전공은 그 후대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조선 시대에도 양규는 명장으로 인식되었는데,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시기 양규 등 18명을 배향하는 무묘(武廟)의 건립이 논의된 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전공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고, 부인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는 교서와 함께 양곡 100석이 하사되었으며, 아들 양대춘(楊帶春)에게는 교서랑(校書郎)이 제수(除授)되었다. 1019년(현종 10)에 공신녹권(功臣錄券)이 내려지고, 1024년에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봉(追封)되었다. 또 문종(文宗) 때 양곡 100석이 하사되었으며, 공신각(功臣閣)에 도형(圖形)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양규〉, 《위키백과》
- 〈양규〉, 《나무위키》
- 〈양규(楊規,?~1011)〉, 《두산백과》
- 〈양규(楊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기환 기자, 〈"뼈가 가루가 되도록 싸웠다’…사료만으로 따져본 양규의 7전승 신화〉, 《경향신문》, 2024-01-15
- 황재하 기자, 〈지승현 "양규 장군 활약 '고려거란전쟁'으로 알려 뿌듯해"〉, 《연합뉴스》, 2024-01-09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