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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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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진흥왕(眞興王)은 신라의 제24대 왕 (재위 540~576)이다.

개요[편집]

  • 진흥왕은 성은 김(金), 이름[諱]은 삼맥종(彡麥宗)이며, 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호(諡號)는 진흥이며, 개국(開國, 551〜567)·대창(大昌, 568〜571)·홍제(鴻濟, 572〜584)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인 김씨이다. 왕비는 사도부인(思道夫人) 박씨(朴氏)이며, 동륜(銅輪)과 사륜(舍輪) 등의 자녀가 있었다. 553년에는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4)의 딸을 소비(小妃)로 맞이하기도 했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어머니가 지소부인(只召夫人)으로 식도부인(息道夫人) 박씨(朴氏)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고, 왕비는 각간(角干) 영실(英失)의 딸인 색도부인(色刀夫人) 박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기이(紀異)' 편의 '후백제 견훤(後百濟甄萱)' 조에서는 《이비가기(李碑家記)》를 인용해 왕비는 사도(思刀)이며 시호는 백융부인이고, 그녀의 셋째 아들 구륜(仇輪)이 견훤의 고조부라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진흥왕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한강 유역과 함경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크게 넓혔다. 북한산(北漢山, 555년)·창녕(昌寧, 561년)·황초령(黃草嶺, 568년)·마운령(摩雲嶺, 568년)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와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등은 당시 신라의 영토 확장과 관직제도 등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1]
  • 진흥왕은 신라의 제24대 국왕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법흥왕의 동생이며 지증왕의 아들인 입종 갈문왕(立宗 葛文王) 구진(仇珍)과 법흥왕의 딸인 식도부인(息道夫人, 지소태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큰아버지이자 외조부가 된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전성기였으며, 정복 군주로 불렸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원산만 훨씬 너머까지 진출한 흔적은 마운령비에서 알 수 있다.[2]
  • 진흥왕은 신라의 제24대 군주이다. 신라 역사상 최고의 청년 정복군주로 꼽히는 명군이다. 백제의 근초고왕 및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명군인 동시에 자비 마립간, 소지 마립간, 지증왕, 법흥왕의 뒤를 이어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능숙한 현군이다. 진흥왕 시기의 치세를 전후로 신라는 실질적으로 국력상에서 백제를 추월하고, 고구려와 호각을 다툴 정도로 강성해지면서 6세기 전반에 걸쳐서 위용을 뽐내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진흥왕의 정복 전쟁을 계기로 신라는 향후 100여 년 동안 백제와 고구려를 동시에 맞닥뜨리게 되는 형세에 놓이게 되면서 소모적인 양면전선에 휘말리기도 했다. 즉위 37년째인 576년 8월에 승하했다. 장례는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현대에 이 진흥왕릉이라고 전해지는 왕릉은 고고학이랄 게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 시대 김씨 문중에 의해 임의로 비정된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진흥왕의 업적과 위상에 비해 너무 작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서악동 고분군이 진흥왕릉이라고 이미 조선시대 김정희 때부터 추정해왔기도 하고, 현대에도 서악동 고분군의 대형 고분이 진흥왕 가계의 능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가 많이 있다. 진흥왕릉 앞의 설명에도 서악동 고분군 진흥왕릉설을 같이 써 놓았다. 사망 시 나이는 고작 40대 초반이었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재위 기간은 상당히 길었다.[3]
  • 진흥왕은 신라 제2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40년~579년이다. 그는 전왕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이 이룩한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을 바탕으로, 국력을 신장시키고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신라를 고구려, 백제와 대등하게 경쟁하는 삼국의 하나로 우뚝 세웠다. 그가 정복한 영토를 순시하며 세운 순수비(巡狩碑)는 그의 업적을 잘 보여준다. 또한 자신이 불교의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임을 표방하는 등 불교를 크게 진작시키고 불교 이념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였다.

진흥왕의 가계와 즉위[편집]

  • 진흥왕은 본명이 심맥부(深麥夫) 혹은 삼맥종(彡麥宗)으로, 534년(법흥왕 21)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의 동생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과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 김씨(只召夫人 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진흥왕은 전왕 법흥왕의 조카이면서 외손자였다. 형제로는 숙흘종(肅訖宗)과 만호부인 김씨(萬呼夫人 金氏)가 있다. 왕비는 각간(角干) 영실(英失)의 딸인 사도부인 박씨(思道夫人 朴氏)이고, 둘 사이 자식으로 동륜태자(銅輪太子, ?~572)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이 있다. 540년 7월 법흥왕이 사망하자 신라 제24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마 법흥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왕위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즉위할 당시 진흥왕은 7살의 어린 나이였기에, 태후인 지소부인이 섭정을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즉위할 때 나이가 15살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태후가 섭정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534년에 출생하여 7살에 즉위하였다고 보고 있다.

진흥왕의 생애[편집]

  • 진흥왕은 540년(법흥왕 27) 가을에 백부이자 외조부인 법흥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7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을 하였다. 진흥왕의 친정(親政)은 법흥왕 때의 '건원(建元, 536〜550)'이라는 연호를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로 바꾼 551년(진흥왕 12년)이 되어서야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15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법흥왕의 왕비인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가 아니라 법흥왕의 딸인 모후(母后) 김씨가 태후로서 섭정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541년(진흥왕 2) 백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해왔다. 이에 진흥왕은 초기에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에 맞서는 정책을 펼쳤으나 계속되지는 않았다. 진흥왕은 정복한 영토들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여러 차례 지방행정조직을 개편했다. 555년(진흥왕 16) 비사벌(比斯伐, 지금의 경남 창녕)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했으며, 556년(진흥왕 17)에는 비열홀주(比列忽州, 지금의 함남 안변)를 설치해 사찬(沙湌) 성종(成宗)을 군주로 삼았다. 557년(진흥왕 18)에는 예전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 지금의 충북 충주)을 소경(小京)으로 만들었으며, 이듬해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豪民)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경북 상주)를 폐지하는 대신 감문주(甘文州, 지금의 경북 김천)를 설치해 사찬(沙湌) 기종(起宗)을 그곳의 군주로 삼았으며, 신주(新州)도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다. 562년(진흥왕 23)에는 대가야(大加耶)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그곳에 대가야군(大加耶郡, 지금의 경북 고령)을 설치했다. 565년(진흥왕 26)에는 완산주를 폐지하고 대야주(大耶州, 지금의 경남 합천)를 설치했으며, 568년(진흥왕 29)에는 북한산주와 비열홀주를 폐지하고 남천주(南川州, 지금의 경기도 이천)와 달홀주(達忽州, 지금의 강원도 고성)를 설치했다.
  • 진흥왕 재위 기간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해 중국과의 직접 교통로를 확보하고 중국 남북조(南北朝) 국가들과의 교류도 확대했다. 549년(진흥왕 10) 양(梁) 나라의 사신 심호(沈湖)가 부처의 사리를 가지고 신라로 왔고, 564년(진흥왕 25)에는 신라가 북제(北齊)로 사신을 보냈다. 565년(진흥왕 26)에는 북제의 무성제(武成帝, 재위 561~565)가 진흥왕을 ‘낙랑군공 신라왕(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는다는 조서를 보냈고, 신라는 572년(진흥왕 33)에도 북제로 사신을 보냈다. 565년(진흥왕 26)에는 남진(南陳)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1,700여권의 불경을 지니고 왔다. 신라에서도 566년(진흥왕 27), 567년(진흥왕 28), 568년(진흥왕 29), 570년(진흥왕 31), 571년(진흥왕 32)에 남진으로 사신을 보냈다.
  • 진흥왕은 545년(진흥왕 6)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 대아찬(大阿湌) 거칠부(居柒夫)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케 했다. 그리고 가야에서 건너온 우륵(于勒)을 국원성에 정착시키고,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만덕(萬德) 등 3인을 보내 그에게서 음악을 배우게 했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때에 도령가(徒領歌)라는 노래가 만들어져 불렸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 진흥왕은 576년(진흥왕 37)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그가 죽기 한 해 전에 황룡사 장륙상이 눈물을 흘리며 왕의 죽음을 예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흥왕은 죽은 뒤에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매장되었는데, 오늘날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한 진흥왕릉은 사적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흥왕은 불교를 신봉해 말년에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승복을 입고 지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그의 왕비도 진흥왕이 죽은 뒤에 출가하여 영흥사(永興寺)에서 지냈으며, 614년(진평왕 36)에 죽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화랑제도도 진흥왕 때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진흥왕은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을 원화(源花)로 선발해 그들을 중심으로 무리가 어울리게 하였다. 그러나 준정이 남모를 시기하여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진흥왕은 남자를 곱게 단장시켜 '화랑(花郞)'이라고 부르고, 그를 중심으로 어울려 연마하게 하면서 화랑제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경주 진흥왕릉[편집]

  • 경주 진흥왕릉(慶州 眞興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능묘이다.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주시 선도산(仙桃山) 서쪽 기슭에 있는데, 봉분 이외에는 아무런 부대시설도 없는 평범한 원형 토분이다.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뒤쪽 언덕에는 진홍왕릉을 비롯한 대형 분묘 4기가 상하로 줄지어 있는데, 모두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해당 왕의 재위 시기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과 진흥왕의 능이 애공사(哀公寺)터 북쪽 봉우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애공사터와 현재의 위치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또, 진흥왕은 한강에 진출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지대를 점령, 그곳에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고, 화랑제도를 창설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편집]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北汉山新罗真兴王巡守碑遗址)는 서울특별시 북한산 비봉(碑峰) 절벽 위에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의 순수비가 있던 자리이다. 1972년 7월 24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이 영토확장과 국위선양을 위해 세운 기념비인데 비석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972년 원비(原碑)인 국보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경복궁으로 옮겨져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하고, 비가 서 있던 자리를 사적으로 지정하여 표석(標石)이 세워져 있다. 비석은 아래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는데 이 자리가 산정(山頂)이기 때문에 풍화가 심할 뿐만 아니라 등산객의 왕래가 빈번하여, 비를 그대로 두면 손괴(損壞)가 점점 더할 것을 우려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강 유역과 함경남도 지역까지 점유한 진흥왕은 555년 10월 북한산을 순행(巡行)하여 강역(疆域)을 확정하였고, 11월에는 북한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통과한 여러 고을에 1년 동안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특별사면으로 죄수들을 석방하였는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순수비로 추정된다. 북한산의 승가사(僧伽寺) 뒤쪽 해발고도 556m인 큰 바위 위에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져 있었으며 비석이 있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비봉이라는 산봉우리 이름이 유래하였다. 북한산 순수비는 조선 후기의 서화가·금석학자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승가사에 들렀다가 이곳에 찾아와 이끼가 덮인 비면을 닦아내고 판독함으로써 진흥왕순수비로 확인되었다.

진흥왕의 외교[편집]

  • 진흥왕 때 신라는 비로소 서해에 면한 항구도시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을 얻어, 백제나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 국가들과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기록을 보면 신라가 건국 ~ 진흥왕 이전 수백 년 동안에 중국 국가들에 사신을 보낸 건 377년, 382년, 502년, 508년, 521년 딱 다섯 번뿐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고구려나 백제 사신이 갈 때 신라 사신을 데려간 게 대부분이었고, 같은 시기 고구려와 백제는 서해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 장점 덕분에 중국 국가들에 수십번씩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진흥왕 이후 ~ 진덕여왕까지 100년 정도 동안 신라는 중국에 42번 사신을 보냈다. 진흥왕의 한강 하류 점령 이후 신라가 중국ㆍ서역 문물을 이전 시대보다 넘사벽으로 받아들이기 쉽게 되어 비로소 고구려와 백제의 조건과 동등해진 것이다.
  • 진흥왕 집권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로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는데, 진흥왕은 564년에는 북제에 사신을 보내고, 북제 역시 여기에 화답해 신라에 '동이교위' 관작을 수여했다. 동이교위는 중국 동쪽에 있는 동이 여러 나라들의 교섭을 총괄하는 의미로 물론 명목상의 관작이지만, 본래 '동이교위'나 '동이중랑장' 관작은 북위 시절부터 북조가 장수왕을 비롯한 고구려 역대 국왕에게 수여하던 관작이었다. 이는 북조를 차지한 북제가 나름대로 진흥왕의 신라를 전성기 고구려를 대신하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인정한 것이다. 이후 남조 진과도 외교 관계를 맺으며, 불경 1,700여 권을 선물로 받았다. 당항성은 이후에도 수, 당, 왜, 서역 등으로 사신을 보내고 무역을 하는 창구로 계속 쓰였다. 549년 2월에 양나라에서 사절단으로 갔던 사신들과 유학을 갔던 승려 각덕(覺德)을 보내면서 사리(舍利)를 보내왔는데 이에 진흥왕은 흥륜사(興輪寺) 전각에서 이들을 맞이하게 했다. 즉 진흥왕은 장수왕, 위덕왕처럼 남북조 국가들이랑 모두 조공ㆍ책봉 관계를 맺은 왕이다.

진흥왕의 업적[편집]

  •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섭정을 하였는데, 그녀와 함께 541년(진흥왕 2)에 병부령(兵部令)의 지위에 올라 군사권을 장악한 이사부(異斯夫)가 정국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라는 이미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과 법흥왕을 거치면서 강력한 왕권 중심의 권력 구조를 확립했기 때문에, 진흥왕 역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왕이었다. 545년(진흥왕 6) 이사부가 신라의 역사를 정리한 『국사(國史)』를 편찬할 것을 건의하자, 진흥왕은 대아찬(大阿湌) 거칠부(居柒夫)에게 명령하여 편찬 작업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진흥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음에도 군정운영이 가능했음은, 이사부, 거칠부 등의 유능한 신하의 조력도 있었겠지만, 선대 지증왕부터 법흥왕 시기에 신라 왕권이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 영토를 확장하고 순수비를 세웠다. 진흥왕은 전왕들이 다져 놓은 기반 위에서 신라를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그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한 정복 군주였다. 당시 한반도는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포함한 중부 지역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은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의 요지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그로 말미암아 힘이 크게 약화되었기에, 이를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진흥왕은 백제와 군사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고 중부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553년에는 백제마저 물리치고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여 한강 유역 전체를 신라의 영토로 삼았다. 이에 격분한 백제가 신라를 공격했으나, 554년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신라군이 성왕을 죽이고 대승을 거두어 한반도 중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 업적은 그가 세운 순수비(巡狩碑)에 잘 나타난다. 순수(巡狩)란 왕이 영토 각지를 돌아다니며 천지산천(天地山川)에 제사하고, 방문한 지방의 정치와 민심의 동향을 살피던 행위이다. 순수비는 왕이 순수한 것을 기념하고, 왕의 덕과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글을 새겨 세운 비석을 말한다. 진흥왕은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모두 4개가 확인된다.
  • 불교를 진흥시켜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진흥왕은 불교를 진흥시키는 데에도 크게 힘썼다. 544년(진흥왕 5) 2월 법흥왕이 불교 공인 시 세우고자 했던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가 드디어 완공되었고, 3월에는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락하여 불교가 완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549년(진흥왕 10)에는 남조 양(梁)이 불사리(佛舍利)를 전해 오자 그것을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모시기도 하였다. 진흥왕이 불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 아들들의 이름이다. 진흥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동륜(銅輪)이고 둘째가 사륜(舍輪), 곧 철륜(鐵輪)이었다. 이 이름은 불교에서 불법으로 세계를 통일하고 지배하는 이상적인 군주를 의미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에서 따온 것이다. 전륜성왕은 금륜(金輪), 은륜(銀輪), 동륜(銅輪), 철륜(鐵輪)의 4왕이 있다고 하는데, 이중 동륜과 철륜을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진흥왕은 불교를 장려하고 그것을 국가통치 이념으로 활용하는 불교 국가 신라를 만들었다.
  • 화랑도를 시작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들었다. 진흥왕대에 화랑도(花郞徒) 제도가 처음 시작되었다. 화랑도란 리더인 화랑과 그를 따르는 무리인 낭도(郎徒)로 구성된 청소년 자치수련조직 겸 군사조직이다. 신라에서 그전까지 이러한 청소년 조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흥왕대 이를 체계적으로 만들고 국가에서 지원하였다. 신라의 많은 인재들이 화랑도를 통해 실력을 키워 나라의 큰일을 하는 인재들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 많은 인재들의 힘으로 신라는 더욱 발전할 수 있었고, 결국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다. 그 기반을 만든 것이 바로 진흥왕이었던 것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진흥왕(眞興王,534~576)〉, 《두산백과》
  2. 진흥왕〉, 《위키백과》
  3. 진흥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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