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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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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명왕

문자명왕(文咨明王)은 고구려의 제21대 왕(재위 491∼519)이다.

개요[편집]

  • 문자명왕은 고구려의 제21대 국왕이다. 휘는 나운(羅雲)이며, 장수왕의 손자이자 고조다(高助多)의 아들이다. 문자왕(文咨王) 또는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광개토대왕장수왕에 이어 고구려의 최대 영토를 유지하고 확보하였다. 장수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이다.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나운을 궁중에서 길러 태손으로 삼았다. 491년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1]
  • 문자명왕은 고구려의 제21대(재위: 491년~519년) 왕으로 일명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나운(羅雲)이다. 장수왕(長壽王)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고추대가(古鄒大加) 고조다(高助多)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게 양육되다가 장수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문자명왕(文咨明王)은 선대 왕에 이어 중국 남 · 북조(南北朝)와 등거리 외교를 맺어 국제관계를 안정시켰고, 고구려 남쪽 영토를 확장하는가 하면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진흥시키는 등 고구려의 최대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대외 관계에서는 전대(前代)의 외교정책에 따라 중국 남 · 북조의 분열을 이용해 국제 질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유지하였다. 즉, 즉위와 더불어 북위(北魏)로부터 '사지절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낭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책봉과 함께 고구려에 친조(親朝)나 왕자의 입조(入朝)를 요구한 북위의 요구에 대해 고구려가 거절함으로써 양국 간의 이면적인 긴장 관계가 계속되었다. 양국은 상호 경계와 견제를 지속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른바 조공을 통한 화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문자명왕은 광개토왕 및 장수왕의 위업을 이어받아 고구려의 전성기를 지속시킨 인물이다. [2]
  •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이다. 497년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하였다. 백제,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기도 하였다. 이름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이며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의 아들. 문자명왕(文咨明王)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여러 번 세사(歲使)를 위(魏)나라에 보냈으며, 494년 물길족(勿吉族)에게 멸망한 부여의 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497년에 신라 우산성(牛山城), 512년에 백제 가불성(加弗城) ·원산성(圓山城)을 점령하였다. 한편, 나제군사동맹을 통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광개토왕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대국(大國)으로 발전하였다.[3]
  • 문자명왕은 고구려의 제21대 태왕이다.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한국사에서 두 번째로 태손(太孫)으로서 성장했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명리호(明理好)', '나운(亽雲)', '고운(高雲)'이라는 이름이 전하고 있다. '명리호'는 문자명왕의 별호인 '명치호왕'에서 고려 제6대 임금인 성종의 이름 '治(치)'를 피휘한 것이다. '고운'은 이름인 고나운에서 나를 빼고 두 글자로 이름을 줄인 중국식 이름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는 문자명왕의 이름이 운(雲)으로 축약 표기되었다. 고구려의 공식 시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처럼 길었을 가능성이 큰데 문자명왕, 명치호왕 등의 명칭은 '◯강상 문자 명치 호태왕(◯岡上 文咨 明治 好太王)' 같은 형식의 축약일지도 모른다. 시호에 들어가는 好 글자는 岡上과 짝지어 등장하기 때문. 장수왕의 아들인 고조다(高助多)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인 고조다가 할아버지인 장수왕보다 먼저 죽어버려서 손자인 나운이 장수왕의 뒤를 잇게 되었다.[4]

문자명왕의 생애[편집]

  • 494년 부여의 왕이 처자를 데리고 고구려에 항복하여 부여를 복속시켰으며, 같은 해 7월 실죽(實竹)이 이끄는 신라군과 살수(薩水)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신라군이 패주하여 견아성(犬牙城)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이를 포위하였으나, 백제가 3,000명의 구원군을 보내어 공격하므로 후퇴하였다. 495년 군사를 보내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였으나, 신라가 장군 덕지(德智)를 보내서 백제를 구원하므로 물러났다. 496년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하(泥河)에서 패하였다. 이듬해인 497년에 다시 우산성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498년 정월, 왕자 흥안(興安)을 태자로 삼았다. 503년 백제의 달솔(達率) 우영(優永)이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수곡성(水谷城)을 침범하였으나 막아내었다. 506년 겨울,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병사들이 동상에 걸리자 회군하였다.
  • 507년 고로(高老)를 시켜서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橫岳)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512년 9월, 백제를 공격하여 가불(加弗)·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남녀 1,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백제군이 기병 3,000명으로 반격하였고, 고구려는 백제왕군의 수가 적음을 보고 쉽게 생각하여 진영을 만들지도 않다가, 대파당하였다. 519년 왕이 훙(薨)하니, 호를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 하였으며, 태자 흥안(興安)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무덤은 미상이나 동명왕릉이 문자명왕릉이라는 주장이 있다.

문자명왕의 업적[편집]

  • 영토의 확장이다. 문자명왕 대에 북부여를 흡수하면서 고구려가 최대 영토를 일구었다고 보는 시각이 학계에서도 제기되지만 반론도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길의 침략으로 쫓겨난 부여의 유민을 받아들인 것이며 부여 영역의 회수는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이후 《당서》에 고구려 국경이 기존 2,000리에서 동서 3,100리로 확장되어 요서의 조양(朝陽, 영주)에 접했다는 기록이나 《통전》, 《태평환우기》에 수나라 시절 고구려 영토가 동서 6,000리였다는 기록 등이 전해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전성기 이후에도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했다고 보기도 한다.
  • 절을 많이 세웠다. 평양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한 학자들은 금강사가 아마도 청암리 사지에 있는 절과 동일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어쩌면 증조할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정책을 이어받았을 것이며, 장수왕이 그를 교육할 때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알려주기 위해 평양에 자주 데리고 갔었을 것이다.
  • 외교적으로 북위, 제나라, 양나라와는 대체로 친선 외교를 지속했다. 할아버지의 외교 정책을 계승한 것이다. 장수왕이 유언으로 중국과의 외교를 잘 맺어 백제ㆍ신라ㆍ가야를 늘 경계하라고 당부했었을 것이다. 거란의 기병을 이용하여 북위의 변방을 약탈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자명왕이 죽자 북위의 영태후는 동당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그 외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구려 사신이 왜국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사신이 등장한 것이다. 아마 이때 처음으로 왜국과 "긍정적"인 접촉이 이루어진 듯하다.

문자명왕에 대한 평가[편집]

  • 무색무취한 태왕, 전성기를 무난히 유지한 태왕으로 보이지만 적은 사료로도 상당히 많은 문제를 내재한 군주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사실 후대인 안장왕이 깔끔하게 뒤처리를 하며 전성기를 유지시켰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전성기가 백제처럼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단 2세대로 끝나버렸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선대 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외정에서 북방, 남방을 가리지 않고 실책을 거듭했기 때문. 북방의 기마 민족들인 물길, 거란과 남방의 농경 국가인 웅진백제의 동성왕, 무령왕과 같은 중흥 군주들에게 힘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백제와 1:1에서 밀리기 시작한 게 문자명왕의 시대였다. 덕분에 장수왕 시기에 차지한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빼앗긴 것으로 추측되는 사료들도 나오며 장수왕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남진 정책이 중단된 것 또한 문자명왕의 시기였다. 또한 지지부진한 외정의 결과 주변의 장악력도 장수왕 시기에 비해 떨어졌고 고구려의 국력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문자명왕〉, 《위키백과》
  2. 문자명왕(文咨明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문자왕(文咨王,?~519)〉, 《두산백과》
  4. 문자명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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