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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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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

구천(중국어:勾践gōu jiàn)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제35대 군주이자, 제2대 왕이다. 범려의 보좌를 받아 오나라를 멸했으며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다.

개요[편집]

구천은 춘추시대 말기의 월(越)나라의 왕(재위 BC 496∼BC 465)이다. 오왕 합려와 싸워 그를 죽였고 부차에게 패했다. 그 후 부차를 꺾어 자살하게 하고 서주(徐州)에서 제후와 회맹하여 패자가 되었다. 아버지 윤상(允常)이 죽은 뒤 왕위를 이어받자마자 오왕(吳王) 합려(闔閭)와 싸워 그를 죽였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섶나무 위에서 자며 복수심을 불태웠다고 한다. 2년 후인 BC 494년에 구천은 부차에게 패배하여 회계산(會稽山)에 숨었다가 버티지 못하고 용서를 빌어 오왕의 신하가 되었다.

구천은 명신(名臣) 범여(范)를 추방하고 대부(大夫) 문종(文種)을 자살하게 하는 등 만년에는 지각없는 행동을 많이 하였다.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의 망산일호초묘(望山一號楚墓)에서 '월왕구천자작용검(越王勾踐自作用劍)'이라는 명(銘)이 있는 아름다운 동검(銅劍)이 출토되었다. [1]

생애[편집]

구천은 중국 춘추 전국 시대 후기의 월나라 군주로 윤상(允常)의 아들이다. 책사 범려의 뒷받침으로 당시 화남에서 강세를 자랑하고 있던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다. 기원전 508년에 왕태자(王太子)로 책봉된 이후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전 497년까지 월나라 왕태자의 신분으로 부왕 윤상(允常)의 대리청정을 맡았으며 기원전 497년에 부왕의 서거로 즉위하였고 기원전 464년에 붕어하였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오랜 기간 숙적이었다. 오왕 합려는 월나라를 없애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범려의 계책으로 오군은 대패하고, 합려는 이 때의 부상으로 사망하게 된다. 대신 장자인 부차가 오왕으로 즉위했다. 부차는 부친의 원한을 잊지 않기 위해,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보좌에 올라서 다시 월나라를 쳐들어가고 이번에는 월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충신 범려의 진언에 따라 빼어난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바치면서 항복을 청하고, 부차는 오자서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것을 수용한다. 구천은 오나라로 가서, 부차의 하인이 되어 열심히 부차를 섬겨 방심을 유도하여 다시 월나라로 돌아온다. 구천은 이 때의 억울함을 잊지 않고 방에 쓴 쓸개를 매달고 매일 그것을 맛보면서 복수를 맹세한다.

월나라로 돌아간 구천은 착착 국력을 기르고, 부차가 출타한 틈을 타서, 침략을 단행한다. 오의 황태자 우를 참하자, 부차는 허둥지둥 되돌아오지만, 힘을 기른 월나라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구천은 월나라의 수도를 현 장쑤성 연운항으로 옮기고, 제후들을 모아 중원의 패자가 된다.


범려는 또 다른 구천의 총신인 문종에게 구천은 고생은 함께 할 수 있으나, 낙은 함께할 수 없는 관상이니 떠나자고 권하였다. 하지만 문종은 숙청을 피해 구천을 떠나야 한다는 범려의 도움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범려는 사직하고 천하를 주유한다. 예견대로 구천은 공을 세운 신하들에 대한 숙청을 자행하여, 문종 역시 죽임을 당했다.

부차[편집]

부차(夫差)는 춘추시대 말기의 오(吳)나라 왕(재위 BC 496∼BC 473). 아버지가 월왕 구천에게 패해 죽자 월나라에 복수했다. 책사 오자서가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듣지 않아 결국 월나라의 공격으로 오나라는 망했다. 합려(闔閭)의 아들이며 오나라의 군주. 아버지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패하여 죽자 그 유언을 받들어, 와신(臥薪)하며 복수를 다짐하였다. 마침내 BC 494년 월(越)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굴복시켰다. 책사(策士)였던 오자서(伍子胥)가 구천(勾踐)을 죽여야 한다고 진언하였으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구천을 콰이지산(會稽山)에서 근신하도록 허락하였다. 이때 월나라의 대부였던 범려(范蠡)가 절세의 미인으로 알려지 서시(西施)를 부차에게 바치는 미인계를 술책을 사용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월나라를 굴복시킨 부차는 북진(北進)정책에만 신경을 쓰며 제(齊)나라를 공격하는 동안에, 설욕에 여념이 없던 구천이 범려 등의 보좌로 공격해와 태자를 사로잡았다. 부차는 구천에게 화의(和議)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2~3차례 월나라의 공격으로 오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내가 죽어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합려[편집]

합려(闔閭)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제24대 임금이며, 제6대 왕으로, 휘는 광(光)이다. 춘추 5패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신하인 손무, 오자서 등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키고 패자를 꿈꾸었으나, 월왕 구천에게 패배하여, 아들인 부차에 복수를 맹세하게 하고 죽는다. 그를 묻은 언덕에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후치우(虎丘)라고 불렀다. 기원전 496년, 10년 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월나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월나라의 장군 범려의 책략에 막혀 패배하고 다리에 활까지 맞아 상처가 덧나 죽게 된다. 아들 부차에게 구천이 부친을 죽였던 것을 잊지 말라고 유언하고, 복수를 맹세하게 했다.

구천과 범려[편집]

범려는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패하였을 때 구천을 따라 오나라에 노부로 종사하였다가 그의 지략으로 목숨을 건져 구천과 함께 월나라로 귀국하였다. 이후 범려는 구천을 상담(嘗膽)하게 하고 월나라를 부흥시켜 20여 년 뒤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범려는 어려울 때가 아닌 맹주로서 구천을 더 이상 섬길 수 없는 군주라고 생각하여, 가족을 데리고 떠나게 되는데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면서 그의 친구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글귀를 남겼다고 전한다. 제나라에서는 그의 현명함을 듣고,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하지만 얼마 뒤 재물을 모두 친지·향당(鄕黨)에게 나누어 주고 재상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당시 교통 ·상업의 중심지였던 도(陶:山東省 定陶縣)로 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하고 상업에 종사하였다. 범려는 장사로 다시 거만(巨萬)의 재산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오나라와 월나라가 처음으로 맞붙었을 때인데, 당시 오나라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합려가 즉위한 이후 오자서와 손무의 활약으로 초나라의 도읍 영까지 강탈해서 멸망 직전까지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신포서의 간곡한 부탁으로 출병한 진나라의 지원군과 국가가 빈틈을 노린 월나라 왕 윤상의 기습 및 합려의 동생 부개가 일으킨 반란에 의해 후퇴해야 했으나 춘추오패의 하나였던 초나라를 멸망시킬 뻔하기도 했으니 그 기세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거기에 오나라를 기습했던 윤상이 죽고, 구천이 즉위하니 나라가 안정적이지 못한 때에 월나라를 쳐야 한다며 전쟁을 일으켰다.

《사기》에 따르면 이때 범려가 월군 내에서 결사대(死士)를 선발하여 그들을 오군 진영 앞에 보낸 후, 일제히 목을 찔러 자살하기를 몇 번에 걸쳐 반복하다가 갑자기 오군을 공격하게 하는 기책을 내어 절대 우세에 있던 오군을 격파했다. 《삼국지》에서 태사자가 북해의 포위망을 뚫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계책. 이 과정에서 화살에 맞은 오왕 합려는 중상을 입고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한 후 죽음에 이른다. 구천은 이 전쟁에서 오나라를 격파한 것에 자만하여 장작 위에서 누워 자며 구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있던 오왕 부차를 얕잡아봐 범려의 충고도 듣지 않고 정병 30,000명으로 오를 공격했다. 그러나 도리어 부초 전투에서 부차에게 대패한 후 회계산에서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범려는 구천을 구하기 위해 오나라의 대부 백비를 뇌물로 매수하고, 부차에게 미녀들을 바쳐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다.

구천은 오나라로 건너가 부차를 섬기게 되었고 범려가 그를 수행했다. 부차는 구천을 석실에 가두고 치욕스러운 마부 노릇을 강요했다. 부차는 범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권유했지만 범려는 완곡하게 사양하고 구천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러던 중 부차가 병에 걸리자, 범려는 구천을 설득해 부차의 똥을 핥게 하는 엽기적인 행동까지 불사하게 한다. 부차의 병이 쾌차할지의 여부를 알아본다는 명분이었지만 부차의 환심을 사고 구천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부차는 자신의 변까지 핥아가며 아부하는 구천에게 넘어가 버렸고, 건강을 회복한 뒤 구천과 범려를 월나라로 돌려보내게 된다.

월나라로 귀국한 후, 구천은 부차에게 복수할 날만을 다짐하며 쓴 쓸개를 곁에 두고 맛보며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한편 범려는 구천에게 각종 부국강병책을 제안했고, 구천은 이를 받아들여 월나라는 점점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몇 년 후, 부차가 제나라를 공격하러 대군을 이끌고 북진한 틈을 타 구천은 오나라를 기습해 부차의 태자를 죽이고 오나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결국 부차는 구천에게 전에 살려준 예를 들어 항복했다. 마음이 약해진 구천은 순간 망설였지만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하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며 진언하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을 살려줬기 때문에 차마 죽일 수가 없었는지 100호의 장으로 봉하겠다고 제안했다. 부차는 자신이 늙어 군왕을 섬길 수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고소산에서 얼굴을 가린 채 자결했다. 구천은 부차가 죽은 후 여세를 몰아 북상하여 모든 제후들을 소집해 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와신상담[편집]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장작 위에 누워서 쓰디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의 한자성어이다. 복수나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가오는 어떠한 고난도 참고 이겨낸다는 말이다. 《사기》(史記)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부차가 아버지 합려의 원한을 갚겠노라고 장작 위에서 잠들면서 다짐하다가 기어이 성공시킨 것과, 또 구천이 그에 대한 원한을 쓸개를 핥아가며 잊지 않고 이뤄냈다는 복수의 연쇄에서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춘추시대, 장강 하류에 서로 적대적인 오나라와 월나라가 맞닿아 있었고 그들은 항상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월왕 구천이 병법의 대가인 손무가 오를 떠나고, 오왕 합려가 주색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계획을 세워 오를 공격했다. 이 전쟁으로 오왕 합려와 세자는 죽임을 당하고 오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둘째 왕자 부차는 오왕이 되어 그날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매일 장작더미 위에서 자며(臥薪) 부하들에게 인사 대신에 구천에게 원수 갚을 것을 각인시키도록 했다. 그렇게 오자서 등의 도움으로 수년간 복수를 다짐하고 부국강병을 이룬 끝에, 오나라는 월군을 몰살시키고 월왕 구천을 생포해 오국으로 압송, 합려의 묘지기 일을 보고 왕후와 함께 삭발시키는 등 치욕을 주고, 월나라를 철저히 파괴하고 돌아갔다.

몇 년 후, 구천은 오자서가 자신의 복수 의지를 알아채고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부차의 신임을 얻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초나라를 경유해 월나라로 돌아가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구천은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밖으로는 부차에게 경국지색이라고도 불리는 서시를 보내고, 온갖 진귀한 조공품이며 군대를 지원해 주는 등 진실한 신하로 보여서 20년을 기다렸다. 마침내 부차가 제나라와 초 양강을 굴복시키고 마침 또 다른 중원의 강국 진(晋)을 굴복시키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려는 틈을 타 오국을 기습, 라오허 산에서 화공과 수전의 대승으로 오나라를 패배시켰다. 이후 구천은 부차를 죽이고 오국을 합병하였다. 이 고사로부터 와신상담은 '장작에 누워 복수를 다짐하고 곰의 쓸개를 핥으며 노력해서 고난을 이겨낸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월나라[편집]

월나라(越)는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나라이다. 무여(無余)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책봉 받았으며, 구천 때 전성기를 누렸다. 백월족이 건국하였다. 월은 고대 남방 민족의 통칭이다. 월나라에서 초나라가 건국되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월나라·초나라를 바탕으로 한나라가 건국되면서 중국어는 더욱더 남방 즉 동남아시아 북부의 타이어파 언어와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백월(百越)어와 유사해졌으며 성조가 많아지게 되었다. 초나라 출신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면서 월나라에 있던 동남아시아 북부와 가까웠던 초나라, 한나라의 중국 한족들은 중국어에 성조라는 특징이 생기게 된다.

월나라의 위치는 오늘날 저장성 사오싱 시를 중심으로 하여 광둥성, 장시성, 푸젠성 등의 중국 동남부와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기원전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켰고, 그 후 초나라에 멸망당한다. 범려가 구천을 보좌할 때 가장 세력이 강력했으며, 후에 점점 쇠퇴의 길을 걸었다. 기원전 306년 구천의 6대손인 무강 때 초나라에 멸망했다. 중심지인 저장 성 사오싱시에 우임금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저장성은 유방의 출신지이며, 진나라 반군의 군사 기지였다. 초한쟁패기 서초가 재건된 지역이며, 전류가 건국한 오월이 있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사람들은 한국, 일본과 교역을 많이 하였다. 백제 시대 문헌에 월나라 성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구천(勾踐,?~BC 465)〉,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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