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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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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측천무후(중국어:则天武后zé tiān wǔ hòu)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통치자이며 황제로 즉위한 인물이다.

개요[편집]

측천무후는 중국 당나라 제3대 황제 고종의 황후이자 무주(武周)의 여제이다. 무측천(武则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포 정치를 했다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제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측천무후가 통치했던 15년을 '무주의 치'라고 부른다. 그런 만큼 당나라 멸망 이후 문치주의와 유교 시스템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정치체제가 마련되었던 송나라와 이후 명나라의 유학자들에 의해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다. 또한 여성의 중앙정치 진출이 극도로 제한되었던 고대에 그녀가 어떻게 여제가 되려 했는가에 대한 비판과 그녀의 욕심, 야욕, 욕망에 대한 것이 명나라까지의 주된 평가였다면 청말 개항 이후 신해혁명을 거치며 평가는 조금씩 달라졌다. [1]

생애[편집]

측천무후(624년 2월 17일 ~ 705년 12월 16일)의 성은 무(武), 이름[諱]은 조(曌), 시호(諡號)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皇帝)가 되었던 인물로 무후(武后), 무측천(武則天), 측천후(則天后), 측천제(則天帝), 측천여제(則天女帝), 측천여황(則天女皇) 등으로도 불린다. 측천무후라는 호칭은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皇后)로서의 지위를 나타내지만, 690년 당(唐)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무측천(武則天)'이라는 호칭이 더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름인 '조(曌)'는 '비출 조(照)'의 뜻을 나타내는 측천문자(則天文字)로서 해(日)와 달(月)이 하늘(空)에 떠있는 모양처럼 세상을 비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측천무후는 624년 2월 17일(武德 7년 1월 23일) 당(唐)의 수도인 장안(長安, 지금의 陕西省 西安)에서 당의 건국 공신(功臣)인 무사확(武士彠)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무사확은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 지금의 山西省 文水) 출신으로 목재상으로 큰 부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당 고조(高祖, 재위 618~626) 이연(李淵)이 수(隋) 양제(煬帝, 재위 604∼618)에 맞서 타이위안(太原)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그를 지원하여 당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당이 건국된 뒤에 원종공신(元從功臣)으로 대우를 받으며 공부상서(工部尙書), 이주(利州, 지금의 四川 廣元)와 형주(荊州, 지금의 湖北 江陵) 도독(都督) 등을 지냈다. 그는 620년에 본처를 잃고 양(楊)씨를 새로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둘째가 무후이다.

측천무후는 637년(貞觀 11년)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의 후궁으로 입궁하였으며, 4품(四品) 재인(才人)으로서 태종에게 '미(媚)'라는 이름을 받아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렸다. 649년에 태종이 죽자 무후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하였다. 그러다 651년 고종(高宗, 재위 649~683)의 후궁으로 다시 입궁하였고, 이듬해에 2품 소의(昭儀)가 되었다. 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으며, 655년 왕황후와 소숙비(蕭淑妃) 등을 내쫓고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무후는 고종을 대신해서 정무(政務)를 맡아보며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장손무기(長孫無忌, ?~659), 저수량(褚遂良, 596~658), 우지녕(于志寧) 등의 대신들을 몰아내고 신진 세력을 등용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656년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李弘, 652~675)을 황태자로 앉혔고, 664년부터는 수렴청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675년 고종의 병세가 악화하자 무후는 섭정이 되어 전권을 행사했으며, 그 해 이홍이 죽자 둘째 아들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다 680년에는 이현(李賢)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이현(李顯, 656~710)을 황태자로 세웠다. 683년 고종이 죽자 이현(李顯)이 황제가 되었는데, 당의 4대 황제인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이다. 하지만 중종의 황후인 위후(韋后)가 아버지 위현정(韋玄貞)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려 하자 684년 중종을 폐위시키고 넷째 아들인 이단(李旦, 662~716)을 황제로 세웠다. 그가 당의 5대 황제인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이다. 그 해 서경업(徐敬業), 서경유(徐敬猷) 형제가 일부 황족들과 연합하여 양주(揚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후는 40일 만에 이를 진압하였다.

688년에도 태종의 아들인 월왕(越王) 이정(李貞)이 아들인 이충(李沖)과 함께 박주(博州, 지금의 山東省 濟寧)와 예주(豫州, 지금의 河南省 汝南)에서 무후에 반대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무후는 내준신(来俊臣), 색원례(索元禮), 주흥(周興) 등을 등용해 반대파에 대한 밀고와 감시에 기초한 공포정치를 펼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처럼 황실 안팎의 반대파를 제거한 무후는 690년 예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하고 수도를 장안에서 신도(神都)라 이름을 바꾼 뤄양[洛陽]으로 옮겼다. 역사가들은 이를 고대의 주(周, BC 1046∼BC 771)와 구분하여 '무주(武周)'라고 부른다.

측천무후는 과거제도를 정비해 적인걸(狄仁傑), 요숭(姚崇), 송경(宋璟) 등의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했지만,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그녀의 통치기는 태종이 통치하던 '정관의 치'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의 치'라고 불리며, 이후 당의 전성기인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의 '개원의 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699년 이후에는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형제와 환관(宦官) 설회의(薛懐義) 등의 총신(寵臣)들이 횡포를 부리는 등의 폐단이 발생했다. 결국 705년 무후가 병으로 앓아눕자 재상(宰相) 장간지(張柬之, 625~706) 등이 그녀에게 양위를 압박하였고, 무후는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고 698년에 다시 황태자가 되었던 중종(中宗)이 복위되어 당 왕조가 부활하였다. 그리고 무후는 그 해 12월 16일(長安 5년 11월 2일) 황제가 아니라 황후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등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2]

죽음과 사후[편집]

만년에 이르러, 무씨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황조의 황태후로 돌아가야 할지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무씨 황조를 잇는 것에 대해 적인걸 등과 같은 여러 재상들과 신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699년, 무씨는 유폐되어 있던 여릉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6년 뒤인, 705년에 무씨는 병에 걸렸고, 이러한 때에 재상 장간지가 군사들을 이끌고 무씨가 와병 중인 전각으로 가 당 황조의 복원을 요청하였고, 무씨는 이를 승낙하여 당 황조가 15년 만에 복권되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무씨는 그리고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705년 11월, 무씨는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달라 간청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하였다. 705년 음력 11월 26일, 거의 반세기 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여걸인, 측천 성신대황제 무조는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측천무후는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이러한 그의 정치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이후 성공한 정치를 펼쳐, 훗날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무씨는 본래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대신하여 무주를 세웠기에 역적으로서 태묘(太廟)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그의 두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른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무주의 황제가 아닌 당나라의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

황제 신분으로 올린 존호는 자씨월고금륜성신황제(慈氏越古金輪聖神皇帝)이며, 후에 개칭하여 천책금륜성신황제(天冊金輪聖神皇帝)로 존호를 고쳤으며, 태상황 신분으로 받은 존호는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이다. 사후에 당나라 황후로 신분이 복원되어 시호를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올렸으며, 후에 천후(天后), 대성천후(大聖天后), 천후성제(天后聖帝) 등으로 개칭하였고, 최종적으로 올린 정식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 능호는 고종과 합장 된 건릉(乾陵)이다.

무주의 치[편집]

무주의 치(武周之治)는 중국 측천무후의 치세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655년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皇后)가 된 뒤 50년 가까이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자신의 두 아들인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황제로 세웠다가 폐위하였고, 690년에서 705년까지의 15년 동안은 국호(國號)를 주(周)로 바꾸고 직접 황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후는 정적(政敵)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맏아들인 이홍(李弘)을 독살(毒殺)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자신의 피붙이라도 권력에 도전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냉혹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음탕하고 잔인한 심정을 지닌 악녀(惡女)로 평가해 왔고, 그녀는 한(漢, BC 202∼AD220)의 여태후(呂太后, ?~BC 180), 청(清, 1636∼1912)의 서태후(西太后, 1835~1908)와 함께 '중국의 3대 악녀(惡女)'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무후(武后)가 죽은 뒤 황제가 된 중종(中宗)을 독살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한 위후(韋后)와 함께 '무위(武韋)의 화(禍)'라 불리기도 한다.

측천무후가 귀족들을 억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함으로써 당이 북주(北周, 557∼581) 이후 이어온 8주국(八柱國) 중심의 귀족정치(貴族政治)에서 벗어나 문인(文人) 중심의 관료체제로 발전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강조되면서 역사적 해석도 크게 바뀌었다. 측천무후의 통치기는 태종(太宗)이 통치하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武周)의 치(治)'라고 불리며, 과거제 정비 등을 통해 중국을 문인(文人) 출신의 관료 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꾸어 당(唐)의 전성기인 '개원(開元)의 치(治)'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주(北周, 557∼581) 이후 당(唐) 초기까지 오늘날의 산시성(陝西省)과 간쑤성(甘肅省) 지역인 관중(關中)과 농서(隴西) 일대를 중심으로 한 '관롱귀족(關隴貴族)' 집단이 최상위 지배층을 이루며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비록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강했지만,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과 충성도를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하여 귀족정치(貴族政治)를 약화시키고 행정적 통일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무후의 통치기에는 과거 출신자가 대거 등용되었는데, 요숭(姚崇, 650~721), 송경(宋璟, 663~737)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현종(玄宗) 시대의 '개원의 치(開元之治)'를 이끈 인물들이다. 무후(武后)는 전시(殿試) 제도를 도입하는 등 과거제를 정비하였으며, 서적을 간행하여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 675년 무후(武后)는 문인과 학사를 소집하여 《현람(玄覽)》, 《고금내범(古今內範)》, 《백료신계(百僚新誡)》, 《신궤(臣軌)》, 《유성전훈(維城典訓)》, 《효자전(孝子傳)》, 《열녀전(列女傳)》, 《내범요략(內範要略)》, 《악서요록(樂書要錄)》 등의 서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편찬하였다. 그리고 이들 학자들을 정사(政事)에 참여시켜 재상(宰相)의 권한을 견제했는데, 이들을 '북문학사(北門學士)'라 한다. 무후(武后)의 통치기에는 과거 응시자가 크게 늘었으며, 서적의 보급은 문화 발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측천무후는 적인걸(狄仁傑, 630~700), 장간지(張柬之, 625~706), 환언범(桓彥範), 경휘(敬暉) 등 유능한 관리들을 중용하여 정치 개혁을 실시해 경제와 문화 발달을 이끌었다. 무후(武后)는 667년 '건의십이사(建議十二事)'를 고종(高宗)에게 건의하였는데, 이는 개혁의 방향을 포괄적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무후(武后)는 관리들의 감찰(監察)을 엄격히 하여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여 정부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 하였다. 또한 농업을 권장하여 《조인본업(兆人本業)》이라는 농서(農書)를 편찬하여 보급하였다.

측천무후는 대외 정책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660년 신라(新羅)의 요청을 받아 백제(百濟)에 군대를 파견하여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696년에는 거란(契丹)의 족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營州)를 점령하자 군대를 보내 697년 이를 물리쳤다. 또한 무후는, 스스로 노자(老子)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도교(道敎)를 장려하던 당(唐) 황실(皇室)과는 달리 불교(佛敎)를 중흥시켰다. 전국에 불교 사원들을 건립하였으며, 불상을 세웠다. 뤄양[洛陽] 용문산(龍門山) 봉선사(奉先寺)에 있는 17m 높이의 로사나불(盧舎那佛) 석상(石像)은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모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평가[편집]

개원(開元) 4년(716년) 측천무후의 아들이었던 태상황(太上皇) 예종이 사망하자 현종은 무측천의 시호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무측천의 정책을 부정했으며 그녀나 무씨 일족에 의해 숙청된 자들의 명예 회복을 실시하였다.

후세 중국 사회나 문인 사회에서 측천무후는 여성으로써 군주의 권한 위에 군림하면서 당의 황위를 찬탈하였다는 부정적 평가가 이어졌고, 찬탈에 실패한 위황후의 행실과 함께 '무위(武韋)의 화(禍)'라 부르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치세 중의 사적에 대해서도 그녀가 정치를 펼쳤던 시대에 떠돌거나 도망친 호수가 늘어나는 등 전적(田籍) 파악이 등한시되고 은전(隠田)이 늘어나 균전제를 실시하기 곤란해졌으며, 측천무후 자신의 씨족을 요직에 앉혀서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에 대해서도 혹평되고 있다.

한편으로 측천무후가 권력을 쥐었던 시기에 중국에서 농민반란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정관 말기의 호수가 줄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민중의 생활은 그전보다 안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나아가 그녀의 인재 등용 능력은 측천무후를 혹평했던 후세의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것으로, 측천무후에 의해 등용되었던 인재들이 현종 시대 개원의 치를 이끌었다는 점도 긍정적인 평가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측천무후〉, 《위키백과》
  2.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12.16)〉,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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