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
이자성(중국어:李自成lǐ zì chéng)은 중국 명나라 말기 농민 반란군 지도자이다. 명을 멸망하게 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1]
개요[편집]
이자성은 중국 명(明)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로서 1644년 대순(大順)을 세우고 베이징(北京)을 점령해 명(明)을 멸망시켰으나 오삼계(吳三桂)와 청(淸)의 연합군에 패하였다. 이자성이 죽은 뒤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자성이 탈출하여 후난(湖南)의 석문(石門, 지금의 湖南省 常德市) 협산사(夾山寺)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康熙 13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청(清)은 베이징(北京)에 진입하여 숭정제(崇禎帝)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역적(逆賊)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입관(入關)과 중국 지배를 정당화했다. 따라서 청(淸, 1636∼1912) 시대에 이자성은 역적(逆賊)이자 유적(流賊)의 우두머리로서 비하(卑下)되었다. 하지만 1944년 궈모뤄(郭沫若, 1892~1978)가 이자성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하면서, 오늘날에는 명(明) 말기의 농민 반란의 지도자로서 그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2]
생애[편집]
이자성(1606년 9월 22일~1645년 5월 17일)의 본명은 홍기(鸿基)이고 연안부(延安府) 미지현(米脂縣, 지금의 陝西省 榆林) 출신이다. 중농(中農)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家勢)가 기울어 어려서부터 목동(牧童)의 일을 했으며, 기마술(騎馬術)과 창술(槍術), 곤봉술(棍棒術) 등을 즐겨 익혔다고 전해진다. 성격이 검소하고 참을성이 많아, 주색(酒色)을 멀리하고 거친 음식도 마다하지 않고, 부하들과 함께 즐거움과 어려움을 함께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자성은 아버지가 죽은 뒤, 빚을 갚기 위해 역참(驛站)에서 역졸(驛卒) 생활을 하였다. 1628년(崇禎 원년) 명(明) 조정(朝廷)은 경비 절감을 위해 전국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역참(驛站)을 폐지하였는데, 이자성(李自成)도 역졸(驛卒)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1629년 간쑤[甘肅] 감주(甘州, 지금의 甘肅省 張掖市)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 하지만 식량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자 유중(榆中, 지금의 甘肅省 蘭州)에서 현령(縣令)과 참장(參將)을 죽이고 병란(兵亂)을 일으켰다.
이자성은 왕좌괘(王佐挂)가 이끄는 농민군에 가담했으나, 1630년 그가 관군에 투항하자 장존맹(張存孟)의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 1631년 장존맹이 명군(明軍)에 패배하여 항복하자 남은 부대원을 이끌고 허난[河南]으로 이동하여 고영상(高迎祥)의 반군에 합류하였다. 당시 고영상은 농민 반란의 초기 지도자였던 왕가윤(王嘉胤)이 전사한 뒤 농민반란군의 중심 지도자가 되어 스스로 틈왕(闖王)이라 일컫고 있었다. 이자성은 고영상의 반군에서 주요 부장(部將) 가운데 하나로서 '틈장(闖將)'의 칭호를 받았다.
1635년 고영상(高迎祥)과 나여재(羅汝才), 장헌충(張獻忠), 노회회(老回回) 등 농민 반란군 13가(家)의 지도자들은 허난성(河南省) 잉양(滎陽)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른바 '형양대회(滎陽大會)'라고 불리는 이 회의에서 이자성은 농민군의 공동 전략을 제시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 뒤 고영상(高迎祥)의 농민군은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의 고향인 펑양(鳳陽)을 공격하여 명(明) 황실(皇室)의 무덤을 파헤치고 주원장(朱元璋)이 출가했던 황각사(皇覺寺)를 불태웠다. 하지만 장헌충(張獻忠)이 이자성(李自成)과 반목하여 점차 독립세력화하면서 농민군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결국 1636년 고영상은 시안(西安)을 공격하다가 산시(陝西) 순무(巡撫)인 손전정(孫傳庭)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고영상이 죽은 뒤 이자성은 '틈왕(闖王)'의 칭호를 계승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쓰촨(四川), 간쑤(甘肅), 산시(陝西) 일대로 진출하였다.
1637년 명(明) 조정(朝廷)은 양사창(楊嗣昌, 1588~1641)을 파견하여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討伐)을 추진하였다. 농민군의 세력은 나여재(羅汝才)와 장헌충(張獻忠)의 부대가 패배하여 투항하는 등 크게 위축되었고, 이자성도 홍승주(洪承疇, 1593~1665)와 손전정(孫傳庭)이 이끄는 명군(明軍)에게 크게 패하여 겨우 10여 명의 병사만을 이끌고 산시(陝西)의 상락산(商洛山)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1638년 청(淸)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자 명(明) 조정(朝廷)은 명군(明軍)을 철수하였고, 이자성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639년 중국 전역이 가뭄 등의 재해를 겪자 굶주린 농민들은 다시 봉기하였다. 장헌충(張獻忠)은 곡성(谷城, 지금의 湖北 襄樊)에서 다시 봉기하였고, 명군(明軍)의 주력(主力)이 장헌충에 집중된 사이에 이자성은 상락산(商洛山)을 벗어나 허난(河南)으로 진입하였다. 이자성의 부대는 규율이 엄하기로 소문이 났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조세를 감면한다는 '균전(均田)'과 '면부(免賦)'를 내세웠다. 이자성의 농민군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급속히 세력을 넓혔다. 1641년에는 뤄양[洛陽]을 점령하여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3∼1620)의 셋째 아들인 복왕(福王) 주상순(朱常洵)을 죽이고, 그 재산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봉천창의문무대원수(奉天倡義文武大元帥)'라 칭했다. 1642년에는 카이펑(開封)을 공격하고, 1643년에는 좌량옥(左良玉), 손전정(孫傳庭) 등이 이끄는 명군(明軍)을 격파하여 허난(河南)의 중심지인 샹양(襄陽)을 점령했다. 샹양(襄陽)에서 이자성은 자신을 '신순왕(新順王)'으로 칭하고, 6부(六部) 등의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손전정(孫傳庭)이 이끄는 명군(明軍)을 대파하고 퉁관(潼關)을 점령하였다. 1644년에는 시안(西安)을 함락시킨 뒤, 그곳에서 국호(國號)를 '대순(大順)', 연호를 '영창(永昌)'으로 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3월 베이징(北京)을 향해 북벌(北伐)을 시작하여, 4월 25일(崇禎 17년 3월 19일) 베이징[北京]을 점령해 명(明)을 멸망시켰다.
산하이관(山海関)을 지키던 오삼계(呉三桂, 1612~1678)가 청(淸)에 투항(投降)하여 청군(淸軍)과 함께 공격해 오자, 이자성은 패배하여 베이징(北京)을 벗어나 시안(西安)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청군(淸軍)의 추격으로 시안[西安]도 포기하고 상주(商州, 지금의 陕西省 商洛市)까지 물러났다. 대순(大順)의 군대가 계속 패퇴(敗退)하자 많은 사람들이 명(明)의 유신(遺臣)들이 난징(南京)에서 세운 남명(南明, 1644∼1662)이나 청(淸)에 투항하여 대순(大順)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1645년 이자성은 청군(淸軍)에게 퉁관(潼關)마저 빼앗기자 샹양(襄陽)을 거쳐 후베이(湖北)로 이동하였다. 남명(南明)의 좌양옥(左良玉, 1599~1645)과 연합하여 청군(淸軍)에 대항하여 형세의 회복을 노렸지만, 좌양옥의 병사(病死)로 무산되었다. 우창(武昌)과 장시(江西)에서도 청군(淸軍)에 패배한 이자성은 통성(通城, 지금의 湖北省 通山)으로 퇴각하였지만, 구궁산(九宮山)에서 명조(明朝)에 충성하는 현지 무장세력에게 살해되었다(<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에는 탈출이 어려워지자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이 죽은 뒤 대순(大順)의 군대는 구궁산(九宮山) 일대를 소탕하여 보복하고, 남명(南明)과 연합하여 청(清)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자성의 난[편집]
1627년부터 1646년까지 지속된 명 말엽의 대규모 농민반란으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대순(大順)이라는 신(新) 왕조를 수립했지만 얼마 못 가 청나라 군대와 투항한 오삼계의 명군에 의해 멸망하였고, 반란 또한 진압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자성의 난이 일어난 근본적 원인은 역시 100여 년 가까이 누적된 명나라의 사회 질서 붕괴와 변혁, 이에 따른 혼란, 재정 파탄, 그리고 계속되는 암군의 등장으로 인한 통치체제 약화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는 1505년 등극한 정덕제를 시작으로 무능한 황제들의 등극 및 초반에는 왜구와 오이라트가, 나중에는 만주족의 외침으로 이후 멸망 때까지 약 140여 년간 바람잘 날이 없었다. 환관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민생이 악화되여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런 농민 반란에 청군까지 대처하느라고 명나라의 대군이 산해관에 묶였던 것은 명나라한테 불운이라고 할 수 있다.
영창[편집]
영창(永昌)은 중국 명나라 말기 이자성이 사용한 연호(1644~1645년)이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반란군 지도자인 이자성(李自成)이 사용한 연호이다. 1644년을 원년으로 1645년까지 2년 동안 사용되었다. 고영상(高迎祥) 휘하의 장수이던 이자성은 1636년 고영상이 죽은 뒤에 그가 사용하던 틈왕(闖王)의 칭호를 이으며 농민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1641년 뤄양[洛陽]을 점령한 이자성의 군대는 1642년에는 샹양[襄陽]을 장악했다. 그리고 1643년 정월에 샹양에서 스스로를 '신순왕(新順王)'이라 칭했으며, 1644년(숭정 17) 정월에는 시안(西安)에서 제위에 올라 국호를 '대순(大順)',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였다. 그리고 베이징(北京)으로 동진을 시작했다. 1645년(영창 2) 5월 이자성이 죽으면서 대순 왕조는 멸망했다.
나여재[편집]
나여재(羅汝才)는 중국 명(明)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로서 이자성(李自成)과 연합하여 명군(明軍)을 물리치고 허난(河南)을 점령하였지만, 이자성(李自成)에게 살해되었다.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 출신으로 언변(言辯)이 좋고 꾀가 많아 '조조(曹操)'라고도 불렸다. 이자성(李自成, 1606~1645), 장헌충(張献忠, 1606~1646) 등과 함께 명(明) 말기의 농민 반란을 이끈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하나이다.
1636년 고영상(高迎祥)이 관군에 사로잡혀 처형된 뒤, 반군의 세는 크게 약화되었다. 고영상이 죽은 뒤 나여재(羅汝才)는 장헌충(張獻忠)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1637년 양사창(楊嗣昌)이 이끄는 명군(明軍)은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반군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이자성(李自成)의 부대는 궤멸되어 산시(陝西)로 퇴각하여 산야(山野)로 숨어들었고, 좌량옥(左良玉)이 이끄는 관군(官軍)은 후베이(湖北) 방면으로 진출해 있던 장헌충(張獻忠)과 나여재(羅汝才)의 부대를 공격하였다. 장헌충(張獻忠)과 나여재(羅汝才)의 반군은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하였다. 나여재(羅汝才)는 이자성(李自成)과 연합하여 농민반란군이 허난(河南) 지역을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나여재(羅汝才)는 재물과 주색(酒色)을 매우 탐해서 군중(軍中)에서도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방탕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이자성(李自成)은 주색(酒色)을 멀리하며 검소하게 생활을 하며, 군율(軍律)을 엄격히 했다. 결국 이자성은 나여재(羅汝才)가 군율(軍律)을 어지럽힐 것을 우려하여 그가 자는 사이에 살해하였다.
평가[편집]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반란 수령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한국, 일본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국에서는 영웅으로 숭배되는 인물이다. 중국공산당이 이자성의 난을 높이 평가하기 이전부터 이자성은 농민 출신 영웅, 한족민족주의의 상징으로 평가받았다. 틈왕(闖王)이라는 칭호도 "관제"로 불린 관우나, "악왕"이라로 불린 악비와 마찬가지로 민중이 그를 영웅시하는 호칭인 것이다.
농민 출신에서 황제까지의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점이 인기의 주 요소 중 하나인데, 이런 점을 보면 명나라의 창업 군주인 주원장과 비슷하다. 망해가던 명나라를 끝장낸 성공한 반란군 지도자라는 점, 얼마 안 되어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에게 패해 최후를 맞았다는 비극적인 행적도 인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자성은 농민 출신에서 황제까지의 자수성가와 중국 한족의 민족주의를 만족시켜준다는 점에서 인기가 많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이자성〉, 《위키백과》
- ↑ 〈이자성(李自成,1606~1645)〉,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이자성(李自成,1606~1645)〉, 《두산백과》
- 〈이자성〉, 《위키백과》
- 〈이자성〉, 《나무위키》
- 이진우 선생님, 〈[이자성의 난과 명의 멸망 그리고 오삼계]〉, 《네이버블로그》, 2024-12-24
- 아아덕후, 〈이자성의 난, 제국 하나를 무너뜨리다〉, 《네이버블로그》, 2023-04-21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