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마오쩌둥(毛泽东, Mao Zedong, máo zé dōng,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혁명가, 정치인이다. 초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을 지냈으며, 중국 인민의 지도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 전략가와 이론가, 중국 공산당, 중국 인민 해방군 및 중화 인민 공화국의 주요 창립자이자 지도자이다. 자(字)는 룬즈(潤之), 융즈(咏芝), 호(號)는 쯔런(子任). ‘마오쩌둥 사상’을 창시한 사상가로도 족적을 남겼으며 시인, 서예가로도 이름이 있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를 역임했으며, 마르크스 레닌주의(马克思列宁主义) 발전에 대한 그의 공헌, 군사 이론, 공산당에 대한 이론적 공헌을 마오쩌둥 사상(毛泽东思想)이라고 한다. 그가 가진 모든 주요 직위는 모두 주석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오 주석(毛主席)’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타임지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그를 선정하기도 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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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1893년 12월 26일 청나라 후난성 샹탄현 사오산구의 부유한 농가에서 농부 모이창(毛貽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셋째 아들이었으나, 위의 형제 두 명이 요절했기 때문에, 사실상 맏이가 되었다. 원래는 명문 호족의 후손이었다가 빈농으로 전락하였으나 마오의 부친이 농업과 곡물상 등을 하면서 재산을 모으고 가세를 일으켜 부농이 되었다. 유모와 하인을 두었던 마오는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1900년 7세 때 마을 서당에 입학하여 유교경전의 기초지식을 익혔다. 유년기부터 민족주의적인 사상을 접하게 된 그는 청나라를 이민족의 침략자라 생각하고 은연중 반청 사상을 갖게 되었다. 이후 학교에 들어가 정식 초등교육을 받았는데, 집안이 상대적으로 넉넉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수 없었던 동년배들과는 달리 학교에 갈 수 있었다. 1905년 12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강요로 집안의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공부를 하고자 했던 그는 부친의 강요에 의해 학업을 중단하였으나 공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의 풍습대로 마오 쩌둥도 조혼을 하게 되었으나 부모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시키려고 하자 집을 나와 현립(縣立) 둥산 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하숙과 아르바이트로 생활했고, 후에 창사에 있는 상향 중학교로 전학하고 계속 학업에 정진하여 주성중학에 입학했다. 독서를 좋아한 그는 학교에 재학하며 역사책과 소설을 탐독하였으며, 반청활동가들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혁명군에 가담했다. 1911년 10월 10일 후난성 혁명군 소속의 한 부대에 배속되어 사병으로 6개월을 보냈다.
혁명가 활동[편집]
마오쩌둥은 1912년 봄이 되어 중화민국이 개국했고 이후 학교로 복학하여 다시 학업에 매달렸으며, 1912년 수석의 성적으로 후난성 공립고등중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기도 했고 여러 고전들을 읽으면서 여러 달을 보내기도 했으며. 1913년에는 후난 성립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제1사범학교 재학 중인 1917년 그는 개혁성향의 꿈을 꾸던 동료학생들과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는데, 회원은 대부분이 제1사범학교 학생들이었고, 신민학회 출신은 훗날 후난성 혁명 지식인의 모태가 된다. 1918년 후난 성립 제일사범학교(창사 소재)를 졸업한 그는 베이징대학에 취직,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보(司書補)로 근무하였다. 1918년 "신민학회"를 창립하고, 이해 사범학교를 졸업 후, 스승이자 훗날 장인이 되는 양 창지와 함께 베이징으로 왔다. 1919년 여름에 마오쩌둥은 창사에서 농민을 제외한 학생·상인·노동자들만의 연대단체를 결성, 조직해 당시 국민 정부에 항일운동을 촉구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1920년 고향으로 돌아와 잡지 “상강평론”을 창간했지만 성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었으며. 이후 천두슈, 리다자오와 만나고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학교창립에 참여, 창샤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교육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아버지의 유산까지 물려받아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양 창지의 딸이자 동급생이었던 양 카이휘와 결혼했다. 마오쩌둥은 양카이휘와 부부생활을 하면서 아들을 두 명 두었다. 상향중학교 시절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연구하던 그는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 공산주의 사상가 천 두슈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왔다. 1920년 말 그는 창사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학부 어문(語文學) 교사가 되었고,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에 재직했다. 창사제1사범학교 교사 재직 중 1921년 1월부터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혁명가의 길에 투신을 결심하였다. 본격적으로 마오쩌둥은 공산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하였고, 1921년 8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에 창립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참석한 멤버 중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까지 중국 공산당에 남아있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는 혁명 운동 중에 죽거나 혹은 변절하여 중국 국민당이나 일본 제국으로 전향하였다. 이 대회에서 마오쩌둥은 회의 서기를 맡아 보았으며,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10월에는 후난성에 중국 공산당 지부를 창립하고 서기로 취임하였다.
정치 활동[편집]
마오쩌둥은 1923년에 제3차 전당대회에 출석하여 5명의 책임비서 중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공산당은 국민당과 함께 항일연대를 위해 국공합작을 추진했고 곧 성사되었으며, 그는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1924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제1기 중앙후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동시에 1924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 공산당 선전부장 대리, 중화민국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 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5년 제4차 국민당 당대회에 참석하였으나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는 데 실패하였으며, 1925년 10월에는 국민당 선전부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1926년 11월 마오쩌둥은 고향인 후난성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1927년 1월과 2월 그는 고향의 농민운동을 연구하고 살펴봤다. 당시 장제스는 노동자•농민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노력하지 않았고, 1927년 4월에는 국민당의 상하이 입성을 도왔다가 소비에트 요원이 된 상하이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국공합작은 실패했고 1927년 10월 마오쩌둥은 후난의 추수 봉기에서 살아남은 수백명의 농민운동가들 이끌고 피신, 장시성과 후난성 접경지역에 있는 징강산(井崗山)으로 퇴각, 한동안 은신하며 농민부대를 재정비했다. 1927년 마오쩌둥은 창샤에서 추수 봉기를 이끌었으며, 여기서 그는 "중국공농혁명군"이라고 이름붙은 무장병력을 이끌었지만, 토벌군에게 진압당하여 패잔병을 이끌고 장시성의 싼완으로 도주했다. 1931년에서 1934년까지 홍군은 영향력을 넓혀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華蘇維埃共和國)이라는 과도정부를 건설하고 마오쩌둥은 주석겸 중국 공산당 중앙집회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그는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았던 주더의 도움을 받아 매우 효율적인 부대를 조직하였으며, 특히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엄정한 군율로 농민을 지지세력으로 삼아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게릴라전략으로 계속되는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분쇄하였다. 이후 1932년 6월까지 홍군은 9만 명의 정규병력과 보조병력으로 4만 명의 민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국민당군은 100만의 병력을 동원해 제5차 토벌전을 시작하였으며, 이에 1931년부터 마오를 대신해 군사지휘권을 장악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보구와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은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다가 커다란 인명손실을 내었다. 또한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배후 촌락이 모두 국민당의 손에 넘어가 소비에트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 가을, 공산당 지도부는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산시 성에 있는 근거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1만 킬로미터를 걸어 결국 산시에 도착하였으며, 장정 도중 1935년 1월 열린 회의에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은 붕괴하고, 마오쩌둥에게 공산당의 절대적인 지도권이 넘어왔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티베트와 같은 소수민족 지역을 거쳐 목적지에 도달했고, 1936년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피해 이동을 개시한 나머지 부대들도 이곳에 합류하였다.
정풍 운동
1942년부터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에서 정풍운동을 개시하였다. 이는 마오쩌둥의 당에 대한 지도권을 재확인하고 당에 남아있던 마오의 반대파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왕밍 등 한때 마오쩌둥에 반기를 들었던 당내 주요 인사들은 대중앞에서 스스로 과오를 인정하는 자아비판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보안조직을 이끌었던 캉성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힌 몇몇 인사들은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중국 국가주석[편집]
국공 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항복한 이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미국의 중재로 공동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했고, 이어 본격적인 내전이 개시되었다. 초기국면에서 국민당군은 병력수에 있어서 공산군보다 월등히 우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초기에 유리한 국면을 선점하였다.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이어 파죽지세로 4월에는 창 강을 건너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어 5월에는 최대도시 상하이를 함락시켰고 12월에는 중화민국의 영역에 남아있던 최후의 대도시인 청두마저 함락되어 결국 중화민국의 대륙 영토는 완전히 상실하였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 토지개혁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 직후 소련을 방문하여 원조를 청하고,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한국 전쟁의 참전을 결정하여 막대한 전비 때문에 신국가 건설이 잠시 지체되지만, 1953년부터 소련의 차관과 기술의 원조를 받아 소련을 본뜬 제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특히 농업 생산에서 커다란 진전을 보였고, 공업 발전을 위한 기초산업을 건설하였다. 결과에 고무된 마오는 제2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고, 농업을 집단화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제2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수년안에 중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탈바꿈시키고, 공업 국가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철 생산량을 늘려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대약진 운동을 개시하였다.[2]
- 자동차 산업
마오쩌둥은 일찍부터 중국산 자동차 제작을 구상했으며, 발단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 초, 소련을 방문한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기분이 상했으며, 귀국 후 지스를 자주 이용하지 않았다. 중공업부(重工業部)를 신설해 자동차 만들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소련이 만드는 걸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다. 샘이 나서 못살겠다. 소련 자동차 베끼는 것부터 시작해라. 전력과 철강 자원이 풍부한 동북 지역에 부지를 물색해라. 전국에 있는 대학을 뒤져라. 해외에서 귀국한 전문가가 있는지 찾아봐라.” 칭화 대학에 적당한 인물이 있었다. 창춘(長春)은 만주국의 수도였으며, 한때나마 정치 중심지 역할을 한 관계로 다른 곳에 비해 공장이 적었다. 중공업부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일본 관동군 세균 연구소가 있던 자리에 자동차 제작 지휘소를 차렸다. 당시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중국 길림성 창춘에 본사를 둔 중국 최초로 설립된 국유 대형 자동차 제조 기업인 이치자동차(第一汽车, 제일자동차, FAW)가 설립되었다. 이치자동차는 1953년에 설립되었으며 마오쩌둥(毛泽东)이 친필로 공장 이름을 썼다. 그 후 이치자동차는 2년 후인 1958년 이름도 마오쩌둥이 지어준 ‘둥펑(東風)’이라는 자동차가 개발되며 시운전에 성공하였으나 작고 가벼운 승용차에 불과하여 관용차와 의전차량으로는 쓸수 없었다. 그러자 동펑이 등장한지 한달 반이 지나고 홍치의 새로운 개발 계획이 세워졌다. 홍치는 미국 크라이슬러의 럭셔리 세단 모델인 임페리얼 C69를 바탕으로 베이징의 고궁, 베이하이(北海), 이화원 등 중국을 대표하는 건축 예술과 전통문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치홍치(一汽红旗)라는 브랜드로 이 차량의 기술은 서구의 것을 따르더라도 외형만큼은 중국의 전통을 반영하자고 한 것이다. 그리고 다섯 차례의 시운전을 거쳐 드디어 홍치의 완성 모델인 CA72가 탄생하였다. 10주년 건국기념일 때 마오쩌동 전 주석이 CA72를 타고 퍼레이드를 펼쳤으며 1960년에는 라이프치히 국제박람회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호평을 이끌어 냈고 본격적으로 중국 자동차가 세계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모두 홍치를 애용했으며, 엠블럼의 한자인 홍치(红旗)는 마오쩌둥의 친필이다. 현재 시진핑(習近平) 주석도 2015년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홍치를 타고 사열했다.[3]
생애 후반[편집]
마오쩌둥은 1970년 헌법 수정 초안을 채택하여 1인 체제를 확립하고 사실상의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마오는 이러한 와중에서 파킨슨병 또는 운동 뉴런 장애로 짐작되는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활동을 못했고, 공식 업무는 후처 장칭이 사실상 업무를 대행하였다. 1971년부터 72년에는 저우언라이 정무원 총리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대혁명의 가치관과 1966년 이전의 정치·경제 질서 사이에 일종의 절충이 시도되어 사회갈등의 조정을 노력했다.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전에 벌써 문화대혁명 가치관과 이전의 질서 간 절충, 조정 노력은 균열이 보였고, 저우언라이가 사망하면서 사회갈등 조정 노력은 실패하였다. 마오는 전문기술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광란적인 당원과 야심가들의 정치적 수사(修辭)에 묻혀버리고 말았고, 외국에서 온 것은 모두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오쩌둥은 1972년부터 병으로 고생하였으며, 암살과 테러를 의심했던 그는 고층 건물에 오르는 것과 비행기 탑승을 주저하거나 꺼렸다고 한다. 1976년 9월 9일 그는 베이징에서 사망되었으며,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84세였다. 그의 유해는 자신의 시체를 매장하라는 유언과는 상당히 다르게, 화장하라는 자신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미르 레닌과 마찬가지로 시신이 보존되어 베이징의 "마오주석기념관"에 안치되었다.[2]
사상[편집]
신민주주의론[편집]
1940년 마오쩌둥은 당시 사회 성격에 근거하여 혁명의 임무를 밝혔다. “중국 사회는 이미 하나의 식민지이자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이며, 중국 혁명의 주요한 적은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이다.” 마오쩌둥은 이 시기의 혁명의 대상은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이며, 중국 혁명의 성격은 무산계급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계급 민주주의라고 보았다. 다만 일반적인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신식의 특수한 혁명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이 자본주의 구민주주의와 소련의 사회주의와 다른,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특정한 역사 시기에서 채택된 국가 형식으로 신민주주의 공화국의 과도기를 거쳐야 한다고 보았다. 신민주주의 경제는 '자본을 제한하고 토지권을 고루 분배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으며, 신민주주의 문화는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인민대중의 반제국, 반봉건 문화”를 가리킨다. 이 문화는 중화민족의 신문화이며 민족적, 과학적, 대중적 특징을 갖는다. 마오쩌둥은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의 보편 진리를 중국 혁명의 구체적 실천과 완전히 꼭 알맞게 통일시켜야 하며,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의 특징과 서로 결합하고 일정한 민족적 형식을 거쳐야 비로소 쓰임새 있어지며, 결코 주관적, 공식적으로 응용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 사회 현실, 즉 객관적 실재에 근거한 혁명을 주장한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의 혁명노선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넓혀가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민 혁명으로 시작해 도시로 확장하는 방식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중국이 서구나 소련과 같은 도시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2]
마오쩌둥주의[편집]
마오쩌둥을 따르는 공산주의의 분파. 따라서 모택동주의, 마오쩌둥주의라고도 한다. 《마오쩌둥 어록 선집》에 이 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 마오쩌둥주의는 중국 공산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 전략에서 모델을 따왔다. 주로 도시 노동자, 혁명가들로 이루어진 정당(政黨) 중심 혁명을 주장했던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외에도 농민과 소수민족을 포섭하려 했던 레닌주의를 넘어 아예 농촌과 농민을 혁명의 중심으로 삼았다. 마오이즘의 대표적 경향을 따진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이는 1920년대 혁명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어 정강산 투쟁,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대장정, 국공 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마오쩌둥의 인식론은 1931년 그때까지 공산권에서 정설로 취급되던 데보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해석이 스탈린에 의해 비판받고 밀려나면서 탈 데보린 운동이 일어나는 기조 속에서 탄생하였다. 스탈린이 저술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1938)은 기존 데보린 학파의 학설을 비판하고 있고, 모순에 대한 입장이 마오쩌둥의 이론과 지엽적인 차이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오쩌둥 사상의 인식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사실상 다르지 않다는 분석도 존재한다.[4]
논란[편집]
주석 퇴임과 막후실권 행사
1959년 대약진 운동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류사오치는 대약진 운동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덩샤오핑과 함께 경제개혁을 주도하게 되었다.
문화 대혁명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각각 국가주석과 당서기를 맡아 파멸적 결과를 초래한 대약진 운동의 뒷수습을 하면서 점점 마오쩌둥을 제치고 실권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마오는 점점 이름뿐이고 상징적인 위치로 몰려갔다. 그러자 마오는 류사오치의 실각을 위한 공작을 계속하는 한편, 1966년 문화 대혁명을 일으켜 다시 한번 실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다. 전국에서 마오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홍위병들이 일어났고, 이들은 "공산주의의 적"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사회 원로와 종교인 등에게 무자비한 폭행과 조리돌림을 행했다. 문화대혁명으로 반체제 인사와 야당 인사, 반마오쩌둥 인사를 제거한 그는 자신의 권력을 한층 강화하였고, 특히 류샤오치에 맞서 마오를 지지한 국방부장 린뱌오는 일약 마오의 후계자로 떠올랐다.
린뱌오의 쿠데타 음모
린뱌오 등의 도움을 얻어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의 실각 음모를 꾸몄고, 1969년 류샤오치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국가주석직은 일시적으로 공석이 되었고, 부주석 둥비우와 쑹칭링을 주석 대행에 앉힌 뒤 사실상의 주석직 복귀와 다를 바 없는 실권을 행사한다. 그리고 류샤오치 제거에 공을 세운 린뱌오를 후계자로 승인한다. 린뱌오가 후계자 자리를 굳히는 듯했으나, 승계시기를 둘러싸고 린뱌오와 마오의 사이에 균열이 생겼고, 린뱌오는 빨리 정권을 넘겨주지 않는 마오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린뱌오는 마오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 쿠데타 음모를 꾸몄고, 1971년 마오는 남중국을 시찰하면서 돌연 린뱌오를 비난했다. 그러나 린의 음모는 실패로 끝났고, 린뱌오는 아들과 함께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1차 천안문 시위와 사망
마오쩌둥은 1972년부터 병으로 고생하였으며, 와병 중이던 1976년 4월 4일 제1차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대규모의 민중봉기였으며, 4월 5일 분노한 시위대는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관공서, 자동차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야기되었다. 교통은 마비되었고, 플래카드에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을 비롯한 4인방과 측근인 야오원위안 등을 비판하는 구호와 시가 많이 게재되어 있었고, 뒤에는 마오쩌둥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까지 올라왔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압되었으며, 마오쩌둥은 이를 덩샤오핑 당시 중국공산당 부주석 겸 국무원 부총리를 제거할 기회로 삼고 덩샤오핑에게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실각시켰다. 그러나 소요사태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고 마오쩌둥의 퇴진을 외치며 시위가 격화되며 사태가 확산되어 가던 중 그는 진압을 시도했으나 군은 움직여주지 않았고 그는 완전히 고립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2]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毛泽东(伟大的无产阶级革命家)〉, 《百度百科》
- 〈마오쩌둥〉, 《위키백과》
- 〈마오주의〉, 《나무위키》
- 김명호, 〈마오쩌둥 “소련도 만드는 데 샘난다, 차 만들어라”〉, 《중앙일보》, 2016-03-06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