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크반트
귄터 크반트(Günther Quandt)는 독일의 공업가이며 오늘날의 자동차제조사 비엠더블유(BMW)와 특수화학 그룹 알타나(Altana)를 포함한 산업왕국을 창립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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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귄터 크반트는 1881년에 독일의 프리츠발크(Pritzwalk)에서 아버지인 직물제조상인 에밀리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크반트(Emil Friedrich Heinrich QUANDT)와 어머니인 헤드비히 크반트(Hedwig Quandt)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밀리의 뜻에 따라 섬유산업(textile industry)에서 수습기를 마치고 1909년 경에 이미 고향에 있는 몇 개 의류공장의 총괄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폭발한 뒤 귄터 크반트는 제국모직(Reichswolle AG)의 총괄을 맡았으며 전쟁기간에 그의 그룹은 독일군의 주요 텍스타일과 가죽의 공급업체로 역할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귄터 크반트는 1922년까지 제국경제부(Reich Ministry of Economics) 컨설턴트로 지냈으며 그 뒤 전시경제 시절에 쌓은 인맥을 이용하여 포타쉬산업(potash industry, 칼륨비료 산업)에 뛰어들었고 배터리 업체 AFA(Accumulatoren Fabrik Aktiengesellschaft, 후에 VARTA, BAE로 변경 됨)의 대부분 지분을 인수하여 총괄이사를 맡았다. 유사한 시기에 병기제조사 마우제르(Mauserwerke AG)를 재편하였으며 1928년에는 독일무기탄약공장(Metallpatronen AG)[1]을 인수하고 그 외 BMW나 다임러 벤츠의 지분을 인수하였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집권한 뒤 귄터 크반트는 초기에 지배자들과 관계처리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후에 독일 산업계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1937년에 방산경제와무기관리처로(Defense Economic and Armaments Office)부터 군수품 매니저(Wehrwirtschaftsführer)[2]로 임명되었으며 AFA의 축전지는 잠수함과 로켓에 사용되고 기타 텍스타일 회사의 유니폼과 담요(blanket)는 독일국방군( Wehrmacht, 베어마흐트)으로 공급되었으며 기타 회사들은 무기와 탄약을 제조하였다.
이외 귄터는 헐값으로 나치정부가 박탈한 유대인 소유주의 경쟁사들을 인수하였다. 하나의 사례를 들면 독일이 룩셈브르크와 벨기에를 점령한 뒤 귄터는 룩셈브르크의 배터리회사 튜더 어큐뮬레이터 회사(Société Anonyme des Accumulateurs Tudor)를 인수하여 AFA에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게슈타포(Gestapo)의 힘을 빌어 강압적으로 소유주인 레온 라발(Léon Laval)에 지분양도를 요청하였다. 레온 라발이 거절하는 태도를 변하지 않았을 때 귄터는 이를 룩셈브르크의 감옥에 감금했다가 독일로 보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금하였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 참의원은 청문회를 소집하여 독일 전시경제 운영상황을 요해하였으며 이 과정에 귄터의 중대한 역할을 인식하였다. 귄터는 독일업계에서 많은 인터로킹 회사, 신디케이트와 코퍼레이션의 총괄자였으며 보험, 은행, 자동차, 병기, 텍스타일, 전력, 배터리 및 기타 여러분야에 이익이 있었다. 특히 그는 군수품 매니저(Wehrwirtschaftsführer)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1946년에 귄터는 미군정부의 지시로 체포되어 2년간 구속되어 있었다. 그 당시에 영국정부는 귄터를 대상한 기소문서를 미국검찰에 넘겨주지 않았으며 기소문서에는 제3제국 시기에 귄터가 활동한 내역들이 들어있었다. 초기에 조사를 추진하였으나 뉘른베르크 전쟁 범죄 재판소(Nuremberg war crimes trials)는 귄터의 혐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비나치화(denazification)의 일부분으로 귄터는 슈타른베르크(Starnberg) 심판소에서 레온 라발 안건에 일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1948년에 귄터는 동조자(fellow traveler)로 최종 판결을 받았으며 전쟁기간에 귄터의 방산회사의 역할과 노예를 사용한 사실들은 귄터의 심판과 관련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감옥에서 풀려 나온 뒤 귄터는 도이체방크(Deutsche Bank)를 포함한 여러 회사의 감사회 멤버로 다시 임직하였으며 1951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명예시민으로 되었다.
1954년 12월 30일에 귄터는 카이로(Cairo)에서 유람을 하던 도중에 별세하였다.[3][4]
직계 가족[편집]
□ 제1대 에밀리 크반트(Emil Quandt) (1849-1925)
1865년에 에밀리 크반트는 베를린 서북부에 있는 작은 타운에 있는 방직공장 제국모직(Reichswolle AG)에 입사하여 수습생으로 일했다. 독불전쟁(1870년-1871년)기간에 제국모직은 독일해군에 군복을 공급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1882년에 제국모직의 사장이 별세한 뒤 에밀리는 사장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1900년에 회사통제권을 가졌다.
□ 제2대 귄터 크반트(Günther Quandt)(1881-1954)
제1차 세계대전 시절에 AFA, DWM, BMW, Benz의 주식을 걷어 들이고 대규모로 중공업에 진출하였다. 첫 번째 결혼은 안토니오 이왈드(Antonie 'Toni' Ewald)와 하였으며 아들 둘을 가졌다. 큰 아들은 헬멧 크반트(1908-1927)이고 둘째 아들은 헤르베르트 크반트( Herbert Quandt)였다. 안토니오는 1918년에 스페인 독감으로 별세하고 헷멧은 1927년에 충수염으로 별세하였다. 1921년 귄터 크반트가 40세 일때 두 번째 마누라 20세의 마그달레나 릿(MagdalenaRitschel(1901-1945))과 결혼하였으며 1929년에 이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셋째 아들 하랄트 크반트(Harald Quandt)가 있었다.
마그달레나는 1931년에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와 결혼하였으며 신랑의 들러리는 아돌프 히틀러(dolf Hitler)가 서주었다.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국가원수로 되고 요제프 괴벨스가 선전부장으로 되었으며 그 해에 귄터 크반트가 나치에 가입하였다. 1945년에 히틀러가 자살한 데 이어 마그달레나는 요제프 괴벨스와 함께 자식 6명을 죽이고 자살하였다.
1946년에 구속되었다가 1948년에 석방되었으며 1954년에 별세하였다. 이 시절에 크반트 가문의 사업은 200개 이상의 회사들에서 추진되었고 이에는 배터리, 야금, 방직, 화학, 의약 등이 포함된다. 이외 BMW의 30% 지분을 보유하고 벤츠의 10%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 제3대 형 헤르베르트 크반트
1940년에 AFA 이사회에 들어갔으며 1954년에 귄터가 별세한 뒤 하랄트와 공동으로 귄터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헤르베르트는 주로 AFA와 자동차 사업을 책임졌으며 1959년에 BMW가 경영위기로 벤츠에 매각을 검토할 때 BMW의 지분을 50%까지 올려 BMW를 위기에서 건져냈다. BMW는 1962년에 New Class 모델을 런칭하여 스포츠카 위상을 구축하였으며 순리로운 발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헤흐베르트는 1982년에 별세하였다.
□ 제3대 동생 하랄트 크반트
하랄트 크반트는 항공기 사고로 1967년에 별세하였다.
각주[편집]
- ↑ "Metallpatronen AG", Wikipedia
- ↑ "Wehrwirtschaftsführer", Wikipedia
- ↑ "Günther Quandt", Wikipedia
- ↑ "Quandt (family)", Wikipedia
참고자료[편집]
- "Günther Quandt", Wikipedia
- 〈BMW 오너 남매는 어떻게 독일 최고 부자가 됐나〉, 《스케치북다이어리》, 2019-01-21
- "Emil Friedrich Heinrich Quandt (1849 - 1914)", Genealogy
- "Günther Max Emil Quandt (1881 - 1954)", Genealogy
- 〈宝马背后的德国巨富_Magdalena〉, 《사이트》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