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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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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성 3형제와 시발자동차
왼쪽 최무성, 오른쪽 최혜성, 아래 최순성
시발(始發)

최무성은 한국 자동차산업 초기단계에 유명했던 국제차량제작소의 사장이다. 국제차량제작소는 1955년에 한국 최초로 시발자동차를 출시하여 업계에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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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최무성은 1906년에 서울 종로구 가회동 부잣집의 6남매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신학교(儆新學校) 2학년에 다닐 때 반일운동에 참가한 연유로 퇴학을 당하고 그 뒤 동아일보의 기자로 임직하고 있던 누이 최의순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아카사카(赤坂)중학교를 다녔으며 후에 센슈(專修)대학 경제전문부를 졸업하였다.

1945년에 해방을 맞으면서 동생인 최혜성, 최순성과 함께 서울 을지로 2가에 차량정비공장 '국제공업사'를 설립하고 그 당시 상업은행, 조선은행의 관용차였던 토요타, 닛산, 시보레, 클라이슬러 등 브랜드 승용차 정비사업을 추진하였다.

1950년에 6.25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갔으며 그 곳에서 고장난 미군 지프를 수리하고 폐차된 차의 부품을 모아 재생차를 만들었다. 1954년에 1,000만 환의 자본금을 가지고 국제차량제작소를 설립한 뒤 자동차 제조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최무성이 사장을 맡고 최혜성이 부사장을 맡았으며 최순성이 공장장을 맡았다. 1955년 4월에 엔진개발에 성공하고 1955년 10월에 시발자동차를 출시하였으며 잠재해있던 소요의 폭발로 생산이 급증하였다. 그러다가 한국 휘발유 부족과 외환사정의 연유로 정부에서 1956년 5월 8일에 긴급조치를 발표하여 등록차량수를 동결하고 일체 신차등록을 폐차의 범위내에서만 허용됨에 따라 확장일로에 있던 시발자동차는 거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후에 일본 이스즈자동차를 도입하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여전한 5.8조치와 휘발유 부족, 정부보조금 중단과 정부융자마저 무마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61년 5.16 이후 재일교포가 설립한 '새나라자동차'가 닛산에서 수입, 조립한 모델을 내놓게 되면서 시발자동차는 완전히 경쟁력을 상실하였으며 게다가 정부에 제출한 외자유치도 반려되면서 1963년 5월에 문을 닫았다.

1970년에 최무성은 자녀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노후를 보냈으며 1993년 5월에 별세하였다.[1][2]

각주[편집]

  1. 최무성(Mu Sung Choi)1906 - 1993 , 한국〉, 《CARLAB(카랩)》, 2014-09-04
  2. 최주식, 〈최초의 국산자동차 - 국제차량제작(주) 시발〉, 《네이버블로그》, 2008-12-02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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