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다 기이치로
도요다 기이치로(豊田 喜一郎 とよだ きいちろう)는 일본의 경영가이고 기술자이며 토요타(Toyota)의 창업자이다. 1894년 6월 11일에 출생하고 1952년 3월 27일에 별세하였다. 토요타자동차공업(현 토요타)의 2대 사장과 사단법인자동차기술회 제2대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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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편집]
도요다 기이치로는 1894년 6월에 일본의 시즈오카현에서 출생하였으며 집 근처에 있는 4년제 다카오카심상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05년 나고야 사범 부속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아버지인 사키치는 학력 무용론은 주장하며 진학을 반대했다. 1920년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아버지인 도요다 사키치의 뜻에 따라 1920년 9월부터 1921년 3월 사이에 도쿄제국대학법학부에서 법학 공부를 하였으며 1921년 7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샌프란시스코, 런던, 잉글랜드의 올덤, 프랑스의 마르세유, 중국의 상하이 등 지역을 견학하였다. 해외 견학을 마치고 아이치현 헤키카이군에 시험 공장을 구축하였으며 그 뒤에 자동직기 개발을 시작하였다. 1926년에 토요타자동직기제작소(豊田自動織機製作所)를 설립하고 상무이사를 맡았으며 1933년 9월에 토요타자동직기제작소안에 자동차제작부문을 신설하였다. 1936년에 자동차제조사업법 허가 회사로 지정된 뒤 1937년에 자동차제작부문을 토요타자동차공업주식회사로 독립시켰으며 같은 해에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가 1941년에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38년에 아이치현 니시카모군 고로모정에 약 200만 평방미터의 부지를 취득하고 자동차 공장을 구축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한 후에 식품 확보로 미꾸라지 사육과 메추라기 사육을 하였다. 1949년에 닷지 라인(Dodge Line) 긴축정책의 영향으로 불황에 처하게 되면서 토요타자동차의 채무가 늘어났으며 조기우대퇴직을 시행하고자 하는 경영측과 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1950년 6월에 사장에서 퇴임하였다. 그 뒤 도쿄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엔진 연구 등을 추진하였으며 1952년에 다시 사장으로 재임하고자 하던 차에 병으로 별세하였다.[1]
주요 활동[편집]
자동차 사업의 꿈[편집]
1921년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도요다 기이치로는 아버지인 도요다 사키치 꾸리는 회사 토요타방직㈜에 입사하여 방직기 개발업무를 맡았으며 그 해에 도요다 리사부로 상무와 함께 미국유럽방직기사업 해외 시찰에 동행을 하다가 자동차 산업에 흥미를 가졌다. 그 당시 일본은 시내 전차와 철도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923년에 간토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시내전차와 철도의 역할이 마비되었다. 이로 인해 기이치로는 부흥에 필요한 교통수단은 자동차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외국차가 일본 시장을 장악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언젠가는 꼭 국산차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자동차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던 회사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1929년에 기이치로는 토요타자동직기제작소의 상무이사 신분으로 자동직기에 관련된 특허양도 협의를 추진하고자 미국으로 출장가는 기회를 빌려 업무는 동행자한테 맡기고 본인은 매일마다 자동차공장과 기계공장을 돌아다녔다. 쉐보레(Chevrolet), 포드(Ford), 크라이슬러(Chrysler) 등 여러 차종을 사들여 분해해 꼼꼼히 분석하고 직접 엔진을 만들기 위해 미국 스미스모터의 엔진도 뜯어보며 공부했다. 강대한 공업력을 기반으로 10년 전에 유럽에서 탄생한 자동차를 자동차 산업으로 만든 미국을 보면서 기이치로는 자동차의 꿈을 이루고자 전력을 할 타산을 가졌다.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편집]
미국에서 돌아온 뒤 기이치로는 토요타자동직기제작소 안에 연구소를 개설하고 소형 엔진 개발을 추진하였으며 그 당시 정부에서도 국산화를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에 4마력 가솔린 엔진의 시험 제작에 성공하였으며 1934년에 A형 엔진 개발을 완성하였다. 잇달아 회사도 자본금 300만 엔을 증자하여 자동차제조사업에 진출하기로 합의를 이루었으며 시작 공장을 완공하고 일본에서 지원이 안 되는 장비는 해외에서 수입하기로 하였다. 1934년 5월에 1호차 설계지침을 확정하였으며 엔진, 섀시 그리고 파워트레인 관련 부품은 쉐보레 부품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모든 준비가 순조롭게 가는 가운데 엔진 주조에서 큰 애로를 겪었으며, 1935년 3월에 겨우 접수할 만한 주조물을 제작했다. 이를 가지고 엔진 조립을 추진하여 마력 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65마력의 측정치가 나왔다. 이 뒤로 엔진의 본격적인 조립이 개시되었으며, 1935년 5월에 A형엔진을 탑재한 A1형 승용차 시제작이 완료되었다. 군부의 강력한 요청으로 승용차 제조는 3대에서 마치고 월 200대 생산량의 G1형 트럭 생산이 급하게 추진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트럭 생산을 추진하지 않을 경우 승용차 제조 허가를 받지 못한다는 압박도 있었다. 1935년 11월에 G1형 트럭 전시판매를 추진하였으며 일본 국산차가 출시되었다는 연유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36년부터 자동차 생산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회사 인원도 1931년의 500여 명에서 3,500명을 초과하였고 정부로부터 자동차제조사업법 허가회사로 인정을 받았다. 중일전쟁이 폭발하면서 정부는 생산 규모의 확장을 촉구하였고 이로 인해 1938년 10월 말에 월 2만 대 생산 능력을 갖춘 고로모공장이 구축되었다. 62만 평의 부지에 주조, 단조, 도금, 차체, 프레스, 기계, 도장, 조립 등의 각 공장과 사무시설, 연구시설 그리고 숙소, 사택, 식당 등 후생시설을 완비시켰다. 기이치로의 손으로 스위치를 눌러 고로모 공장 가동이 개시되었으며 기이치로의 자동차 꿈은 현실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전쟁의 소요로 정부 당국은 트럭에 사용되는 외의 자재, 부품 생산을 금지시켰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진 뒤로는 자동차의 판매조차도 자유판매에서 배급판매로 전환하였다. 1942년에 정부의 기업정비령에 따라 산업체재는 전부 집중관리체재로 넘어갔으며 1944년 1월에는 군수회사로 지정되었다. 1945년에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군수산업의 생산은 중지되고 일정한 범위내의 민수 생산은 가능해졌다. 전 회사의 노력으로 1947년 1월에 SA형 소형 승용차 시제작을 완료하고 1948년 3월에 BM형 트럭 생산을 개시하였으며 연합군사령부로부터 연간 50대 대형 승용차 제조허가가 떨어져 승용차를 생산하는 길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1949년에 배포된 닷지 라인 긴축 정책으로 자동차 소요의 급감과 자금운영이 악화되는 2중 타격을 받았으며 그 해 2억 엔의 융자가 불가능할 경우 도산의 길 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혔다. 1950년 6월 5일에 경영악화에 따른 노사분규로 기이치로는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사장직에서 퇴임하였다.[2]
생산방식[편집]
도요다 기이치로는 효율적인 생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에 기이치로는 미국에 갔을 때 슈퍼마켓 진열장에서 '재고가 바닥날 때쯤이면 즉각 새 물건을 채워 넣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은 '저스트 인 타임(Just-In-Time)'의 아이디어를 내놓고, 포드식 대량생산 체제에 대응할 일본식 생산 방식을 제안하게 된다. 라인에서 필요로 할 때 필요한 자재나 부품을 필요한 수량만큼만 공급하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고 생산비용을 낮추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도요다 기이치로만큼 존경받고 있는 오노 다이이치에 의해 토요타 생산 방식이 만들어졌다. 저스트 인 타임의 목표는 낭비의 제거이다. 토요타는 과생산의 낭비, 일손의 낭비, 운반의 낭비, 가공낭비, 재고낭비, 동작낭비, 불량품이나 수정의 낭비 총 7가지의 낭비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공정 간 흐름의 정체를 없애기 위해 간판 혹은 칸반 시스템이 도입된다. 칸반 시스템은 도요타의 생산 시스템에 포함되는 서브시스템 중 하나이다. 린 생산방식에 기초한 토요타 생산방식의 기본은 철저하게 낭비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이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물품을 필요한 양만큼 만들어 보다 효율적으로, 빠르게 정체되지 않는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간판 시스템은 생산 과정에서 작업자들이 '칸반'이라는 A4용지 크기의 마분지 카드를 사용한다. 모든 작업자나 납품업자들은 관련된 작업장에서 생산 명령을 이 칸반으로 받게 된다. 만일 A라는 제품이 a라는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하부 공정에서는 a부품을 모두 사용했을 때 다시 상부에 필요한 만큼의 a부품을 요청한다. 최종 라인에서 소비되는 양만큼을 고려해 상부에 필요량만큼의 부품을 주문하는 방식을 통해 생산을 조절한다. 이처럼 전공정과 후공정에서 칸반을 사용하여 수요에도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칸반 시스템에도 문제점은 있다. 후공정이 똑같은 부품을 한 번에 대량으로 가져가게 되면, 전공정은 인력과 설비를 보충하는 데 급급해졌다. 전공정의 부담이 증가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고, 이는 외부의 협력 기업들에게도 피해를 끼치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바로 '생산의 평준화'이다. 생산의 평준화는 최종 공정에 해당하는 완성차 조립 라인이 날마다 거의 균등한 양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도요타 생산 방식이 세계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바로 1973년에 있었던 석유 파동 때문이었다. 석유 파동을 계기로 선진국의 경제는 고도성장기에서 저성장기로 들어섰기 때문에, 기존 포드의 생산 방식에서 토요타 생산 방식으로 주류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헨리 포드(Henry Ford)의 포디즘은 밀어내기(Push) 생산 방식이고, 소품종 대량생산 전략을 사용했다. 오노 다이이치의 도요티즘은 잡아당기기(Pull) 생산 방식이고 다품종 소량생산 전략을 사용했다. 어떤 생산 방식이 항상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도성장기에는 포드의 생산 방식이, 저성장기에는 도요타의 생산 방식이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3][4]
창업 이념[편집]
도요다 기이치로는 "사람을 자르는 것은 경영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토요타 일가의 창업 정신은 토요타 경영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이다. 기이치로는 공대생 시절 무엇보다 연구 개발이 중요하며 항상 시대에 앞서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새기며 직접 연구에 몰두하여 일본 자동차의 기술력을 향상시켰다. 또한 고객 만족 정신을 창업 때인 1930년대부터 도입했다. "고객의 요구를 조사, 연구해서 자동차에 반영하라."고 지시했다. 이 어록은 토요타의 첫 번째 경영 가치인 고객 만족의 전통으로 뿌리를 내렸다. 도요다 기이치로는 납품업체와의 관계에서도 항상 안정된 거래 관계를 유지하여 부품업체의 전문화에도 이바지하였다.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를 잘 조립하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협력업체와 함께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과 달리 물건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남긴 이 말은 토요타가 납품업체와 상생하는 전통으로 계승되어 토요타 생산 시스템을 완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순수 일본의 두뇌와 기술로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창업이념을 가진 기이치로는 평소에도 입버릇처럼 "사람을 해고하지 않는 것이 경영자의 도리다."라고 말했다. 항상 솔선수범하고 검약하는 자세로 검소한 생활을 했던 도요다 기이치로의 생활상, 미국 자동차 산업을 넘어서겠다는 웅대한 꿈이 오늘날 토요타 영광의 밑거름이 되었다.[5]
각주[편집]
- ↑ 〈豊田喜一郎〉, 《Wikipedia》
- ↑ 〈喜一郎のあゆみ〉, 《トヨタ産業技術記念館》
- ↑ 정고담, 〈<도요타 생산방식> - 오노다이이치〉, 《네이버 블로그》, 2021-08-01
- ↑ LOVESCM, 〈Kanban System (칸반 시스템)〉, 《네이버 블로그》, 2017-05-05
- ↑ 〈도요타 기이치로〉,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豊田喜一郎〉, 《Wikipedia》
- 〈기이치로의 연보〉, 《トヨタ産業技術記念館》
- 김태진, 〈자동차 업계 세계 1위 넘보는 도요타를 만든 사람들〉, 《조선뉴스프레스》. 2006-04-01
- 〈(위대한결단-37도요타 기이치) 도요타의 혼을 심은 창업주〉, 《중소기업뉴스》, 2006-02-21
- 〈도요타 기이치로〉, 《네이버 지식백과》
- 정고담, 〈<도요타 생산방식> - 오노다이이치〉, 《네이버 블로그》, 2021-08-01
- LOVESCM, 〈Kanban System (칸반 시스템)〉, 《네이버 블로그》, 2017-05-05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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