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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공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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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공업사 자동차 출시 장면
김창원(金昌源) 전 신진그룹 회장
김제원(金濟源)

신진공업사는 1955년 2월, 김창원이 부산 전포동에 있던 미군 정비창을 불하 받아 설립한 부속품 제조 및 군용차와 민간차를 수리·제작하는 공장이다.

1957년 3월, 신진공업㈜로 법인 전환한 뒤 1960년에는 전포동 버스공장을 완공했으며, 1962년 10월 덕수궁 산업박람회에 출품한 마이크로버스가 상공부 장관상을 탄 것을 계기로 정부로부터 자동차를 정식으로 만들 수 있는 대형 및 중형자동차 조립공장 허가를 받았다. 신진공업사가 만든 노란색 25인승 마이크로버스는 큰 히트를 치며 1960년대 말 제대로 만든 대형버스가 쏟아져 나올 때까지 도시나 지방 여객수송자동차의 주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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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신진공업사 신성호
시-발 자동차 이후 두 번째로 나타난 국산 자동차

신성호는 당시 새나라자동차공업㈜이 생산(사실상 수입)하던 닛산 블루버드의 디자인을 모방한 세단형 승용차로, 설계적인 기반은 시-발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미군이 사용했던 군용 지프의 섀시와 엔진, 변속기, 차축 등을 활용했다. 외관은 새나라자동차의 디자인과 매우 흡사했다.

신진공업을 세운 설립자 김창원 씨는 새나라자동차를 보게 된 이래, '순수한 국산 세단'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신성호를 완성시켰다. 비록 설계적인 기반은 군용 지프를 바탕으로 했지만 외형만큼은 하나하나 두들겨서 만들어진 수제품으로, 닛산 블루버드와 매우 흡사한 외형을 가졌다. 게다가 차창과 타이어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했다. 이 덕분에 윤치영 당시 서울시장의 도움으로 신성호를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전시했다. 이를 통해 많은 수의 국민이 신성호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진공업사의 신성호는 국민들과 정부의 관심을 받았다. 심지어 당시 상공부 장관이 직접 신성호를 타고 김포가도를 달리며 국산 승용차의 탄생을 축하했다. 하지만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이 유선형의 승용차에 대한 기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특히 근본적으로 시-발 자동차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군용 지프의 재생품에 가까웠기 때문에 표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품질이 조악했고 그만큼 고장도 잦았다.

여기에 새나라자동차에 비해 가격이라도 저렴했다면 나름대로 저렴한 국산자동차를 찾는 수요를 맞출 수 있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신성호의 가격이 전혀 저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생부품을 사용한 데다, 차체 하나하나가 모두 수공업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탓에,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단가 상승의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당시 신성호의 가격은 새나라자동차에 비해 2배에 달했다. 여기에 상술한 잦은 잔고장과 낮은 신뢰도 탓에 현대적인 생산 방식으로 만들어져 우수한 품질에 가격마저 낮은 새나라자동차와는 도저히 경쟁을 벌일 수 없었다. 한국 자체 기술로 만들어진 두 번째 자동차인 신성호는 고작 318대 밖에 생산되지 못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최대의 경쟁자였으며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새나라자동차공업㈜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실 새나라자동차공업㈜은 처음부터 그 설립과 운영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한국 중앙정보부 주도로 세워진 새나라자동차공업㈜은 군사정권이 제정한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과는 정반대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새나라자동차공업㈜은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생산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일본에서 만들어진 완제품 상태인 닛산 블루버드를 공장을 세우기도 전에 들여와 판매하고 있었던 것도 모자라, 정부의 각종 특혜를 통해 수입함으로써 엄청난 마진을 붙였으며, 이를 통해 획득한 자금이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쓰였다는 내용의 언론보도가 쏟아진 것이다. 이 때문에 새나라자동차공업㈜은 증권 파동, 워커힐 호텔 신축, 파칭코 부정 도입 등과 함께 이른 바 제3공화국의 '4대 의혹'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이에 신진공업은 소형자동차 제조면허를 취득하고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새나라자동차공업㈜의 부평 공장을 인수, 신진자동차로서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새나라자동차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신진공업으로서는 실로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자본, 자재, 기술 등, 모든 것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완성해 낸 신성호는 신진자동차의 밑거름이 됨과 동시에, 국내 자동차산업에 새로운 활력이 되어 주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1]

각주[편집]

  1. 박병하 기자, 〈(특별했던차)신진공업사 신성호〉, 《모토야》, 2019-10-14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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