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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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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

김수로왕금관가야(金官伽倻)의 건국 시조이다. 수로왕이라고도 부른다.

개요[편집]

  • 김수로왕가락국의 시조이다. 전설에 의하면 42년(신라 유리왕 19) 금관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이 김해구지봉에 모였을 때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를 얻었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화하였는데 수로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수릉(首陵)이라고도 하며 김해김씨의 시조이다. 키가 9자(尺)이고 팔자 눈썹이며 얼굴은 용과 같이 생겼는데, 처음으로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비로 삼았다.[1]
  • 김수로왕은 수로왕(首露王)이라고도 하는데 김수로(金首露)는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시호는 수릉왕(首陵王)이다. 신라 유리왕 19년(42년) 가락국 북쪽 구지봉(龜旨峰)에 하늘로부터 떨어진 6개의 금란(金卵)이 모두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김수로도 그 가운데 하나이며, 변한(弁韓)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9명의 간이라는 뜻인 구간(九干)들이 수로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가락국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 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9척(약 2m[4])의 소년이 수로왕이 되었다고 하나, 신라의 최치원에 의하면 그가 천신 이비가지와 정견모주라는 여성의 아들이었다고 기록하였다.[2]
  • 김수로왕은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김해 김씨 족보》에는 태조(太祖)로 서술되었으며, 기록상으로는 알 6개에서 태어난 가야의 왕들과 같이 키가 9척이었다. 중국 후한시대 초기인 서기 42년에 가야를 건국했다. 이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출신으로 추정되는 허황옥과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 중 아들 둘은 허씨 성을 받고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서기 199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아들은 금관국의 제2대 거등왕이었다. 가야 건국 신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양쪽에서 모두 등장한다. 흔히 《삼국유사》에 수록된 <구지가>와 얽힌 6개의 알 신화로 유명하다. 서기 42년 김해 구지봉에 사람들이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알 6개가 내려왔고, 알들 중 가장 먼저 깨어난 이가 김수로였으며, 나머지 알 5개에서 태어난 아이가 각자 나머지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다른 출생 신화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최치원이 썼다는 《석이정전》을 인용했다고 하며 서술한 정견모주 전설이 있다. 여기서 김수로는 이비가지의 아들로 이진아시와 형제였고, 이름이 뇌질청예(惱室靑裔)였다. 전자는 김해 금관국 중심, 후자는 후기 가야 체제에서 강국으로 떠오른 고령 대가야 중심적인 신화인 듯하다. 수로왕이 즉위한 지 1년이 지나 도읍을 정했는데 임시 궁궐 남쪽에 위치한 신답평(新畓平)을 둘러보더니 자리가 좋다면서 공사를 명령했다. 43년 3월 10일 궁궐 외곽의 성벽 공사가 종료되고, 44년 궁궐이 완성되자 그곳에서 정무를 보았다고 한다.[3]
  • 김수로왕은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건국 시조로 알려져 있다. 수로왕 설화를 통해 그가 이주민 계열로서 김해 지역의 토착 세력과 함께 금관가야를 건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기는 건국 시조로서 수로왕의 신이한 탄생 과정과 그의 신통력, 하늘이 맺어준 왕비에 관해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어 사실로 믿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또한 가락국기 자체도 고려 문종대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전부 신뢰할 수는 없다. 다만 9간의 무리가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자 하늘에서 금빛 알 6개가 내려오고, 이 알이 남자아이로 변하자 9간이 이들 중 한 명을 추대하여 수로왕으로 삼았다는 줄거리에는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수로왕보다 9간의 이름과 활동이 먼저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수로왕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김해 지역의 유력 세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은 수로왕이 9간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람, 이주민 계열이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9간들의 추대에 의해 수로가 왕이 되었으므로 국가 형성에 있어 9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로왕에 관해서 가장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삼국유사』에서도, 수로왕의 즉위 후 활동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9간의 명칭을 관직 명칭에 걸맞게 바꾸고, 신라와 중국의 관제를 모방하여 관직을 설치하였다는 것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본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조에서 수로왕이 당시 소국이었던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의 영토 분쟁을 해결해 주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허황후[편집]

  • 가야국 김수로왕의 비이며 김해허씨의 시조이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되었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2명에게 어머니의 성(姓) 허(許)를 주었다고 한다. 이름은 허황옥(許黃玉)이며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이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이다. 아유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인도, 태국, 중국, 일본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인도 아요디아라고 알려진 것이 가장 유력하다. 그 연유는 수로왕릉 정문 대들보에 새겨진 두 마리의 물고기가 인도 아요디아 지방의 건축양식에서 볼 수 있는 문양이기 때문이다. 서기 48년(유리왕 25) 7월 27일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 이듬해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뒤에 가야국에 상륙한 곳은 주포촌(主浦村)이고, 비단 바지를 벗어 산령(山靈)에게 제사했던 곳은 능현(綾峴)이며, 붉은 기를 꽂고 들어온 바닷가는 기출변(旗出邊)으로 불렸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장자인 거등(居登) 왕통을 잇게 하였고 2명에게 어머니의 성(姓) 허(許)를 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7명의 아들은 불가에 귀의했다. 가야가 몰락하게 되자 허씨의 자손들은 흩어졌는데 김해에 남은 김해 허씨, 하양으로 이주한 하양 허씨, 양천 허씨, 태인 허씨 등이 있으며 태인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가 있다. 김해시에 허황후의 묘가 있으며 그녀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전하는 파사석탑이 남아있다.

김해김씨[편집]

  • 김해김씨(金海金氏)는 경상남도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한다.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제12대손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대소 98파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김유신의 직계종파(直系宗派)는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그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김관(金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金克一·金馹孫·金大有)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양왕(讓王:仇衡)의 증손으로, 그의 조부는 신라의 장군이며 각간(角干)인 무력(武力)이고, 그의 부친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장인이며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서현(舒玄), 그의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 김해김씨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많은 문무명신(文武名臣)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에 속하며, 고려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 등 숱한 인물을 배출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진을 면치 못하여 역대 정승 가운데도 숙종 때의 김우항(金宇杭)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한말 이후 김해김씨는 으뜸가는 성씨 인구에 걸맞게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주요인물을 살펴보면, 삼현파의 파조(派祖)인 김관은 고려 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고, 그 5세손인 김극일(克一)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그의 차자(次子) 김맹(金孟)의 준손(金駿孫)·기손(金驥孫)·일손(金馹孫) 등 세 아들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나 '김씨삼주(金氏三珠)'라 하였다. 이 밖에 이조참판·시문가(詩文家) 김현성(金玄成), 사군파 파조(派祖) 김익경(金益卿), 예조판서 조, 고려의 좌시중(左侍中) 김보(金普), 조선시대의 무장(武將) 김경서(金景瑞)·김완(金完), 학자로는 김자정(金自貞)·김덕승(金德承), 화가로는 김홍도(金弘道)·양기(金良驥) 부자 등이 있다.

김수로왕의 탄생신화[편집]

  •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에 따르면, 3월의 재계일(齋戒日)에 구지봉(龜旨峰)에 9간(干:족장 또는 왕)들이 203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하늘이 나로 하여금 이곳에 새로 나라를 세워 다스리라 명하므로, 내가 거기로 내려가고자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합(金盒)을 받았는데, 몇 시간 뒤 그 알 속에서 나온 아기들이 6가야국의 왕이 되었으며, 그중 가장 먼저 나와 '수로'라는 이름으로 불린 키가 가장 큰 인물이 김해김씨의 시조이자 금관가야의 건국자가 되었다는 신화이다. 특히 이 신화는 하늘의 신이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등 9명의 간들이 부족들을 다스리는 부족(9간) 연합사회의 통치자로서 인간사회에 내려왔다는 것과, 인간사회가 그를 환영의 극치인 '춤과 노래'로 스스럼없이 맞아들여 왕으로 삼은 영신(迎神)신화라고 해석하고 있다.

김해 수로왕릉[편집]

  • 수로왕릉(首露王陵)은 사적 제73호로,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릉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73호로 지정되었다. 수로왕릉은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린다. 무덤의 높이는 약 5m의 원형 봉토무덤이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 안향각, 전사청, 제기고, 납릉정문, 숭재, 동재, 서재, 신도비각, 홍살문, 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 문무인석, 마양호석, 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황폐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芝峰類洩)』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수로왕(首露王,?~199)〉, 《두산백과》
  2. 수로왕〉, 《위키백과》
  3. 수로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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