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권율(權慄)은 조선 중기의 의주목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개요[편집]
- 권율은 조선 중기의 명장이다. 금산군 이치(梨峙)싸움, 수원 독왕산성 전투, 행주대첩 등에서 승리했다. 임진왜란 7년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전공을 세웠다. 본관 안동. 자 언신(彦愼). 호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호 충장(忠莊).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1588년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 되었으며,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1]
- 권율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 모악(暮嶽). 도첨의(都僉議) 권보(權溥)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 · 감찰 · 예조 좌랑 · 호조정랑 · 전라도 도사 · 경성 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 목사로 발탁되었으나, 1592년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 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1841년 사액 되었으며, 그곳에 향사 되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2]
- 권율은 조선 중기의 문관이자 장군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1537년 경기도 강화도호부 선원면 연동(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에서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권철(權轍)과 어머니 창녕 조씨 조승현(曺承晛)의 딸 사이의 넷째 아들, 막내로 태어났다. 여말선초의 유학자이며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이 6대조로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인 것이다. 벼슬길에 뜻을 두게 된 이유는 아버지 권철 때문이라고 전한다. 아버지 권철은 죽기 직전에 막내아들 권율을 빤히 쳐다보다가 "널 내가 낳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는데 이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 급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벼슬길에 늦게 올라 1582년(선조 15)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정9품)에 제수되었으니 이때 나이가 46세였다. 그 후 죽은 영의정의 아들이자, 현직 관료들의 친동생이라서인지 승진은 빠른 편이라 전라도 도사(종5품), 예조 정랑, 호조 정랑(정5품), 경성 판관 등을 거쳤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일본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 장군 마귀와 함께 울산에 주둔, 울산성 전투에서도 활약하였다. 왜란이 끝나자 권율은 전란 중에 기력을 소진한 탓인지 곧 사퇴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고, 1599년 7월 6일, 자택에서 향년 63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사후 선무 1등 공신이 된 뒤에는 도원수 때 전과가 크게 돋보이지 않아 이에 따른 여러 비판이 있었지만, 결국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명장(名將)으로 남았고, 조선 시대 내내 '명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권율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름은 '권율장군묘'라고 해 놓았지만 사실은 권율 집안의 가족 묘역인데, 권율의 묘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전부인 창녕 조씨와 후부인 죽산 박씨가 함께 안장되어 있고 권율 내외의 묘 뒤편으로는 형 권순과 아버지 권철 내외의 묘가 있다.[3]
- 권율(1537년 12월 28일 ~ 1599년 7월 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또는 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그는 영의정 권철의 아들이자, 재상인 오성 이항복의 장인이다. 임진왜란의 조선군 장수로, 왜란 중반부터 종전까지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로서 조선의 군대를 총지휘하며 왜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데 기여했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무인으로 알려졌지만 문과(文科)에 급제한 문관 신분이었다. 사후 바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가 뒤에 영의정으로 가증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추봉 되었다. 1604년 선무공신 1등(宣武功臣一等)에 녹훈 되었다.[4]
생애[편집]
- 권율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 권율은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권율 장군 묘[편집]
- 권율 장군 묘(權慄 將軍 墓)는 조선 중기의 명장 권율(權慄:1537∼1599)의 묘이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다. 권율의 호는 만취당(晩翠堂),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1537년(중종 31) 강화군 영동에서 태어났다. 1582년(선조 15) 과거에 급제하고 55세 때는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1593년(선조 26)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에 큰 전공을 세웠고, 행주대첩 후 도원수로 임명되어 전군을 지휘하였다. 1599년(선조 32) 권율이 죽자 나라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을 추봉하여 공적을 기렸다.
권율장군 이치대첩비[편집]
- 권율장군 이치대첩비(權慄將軍 梨峙大捷碑)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비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명장 권율(權慄)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높이는 206cm, 너비는 72cm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2만여 병력이 이치를 넘으려 할 때 장군이 1,500여 군사로 왜적을 격퇴하였다. 이 싸움을 이치대첩이라고 한다.
- 1866년 금성면(錦城面) 상가리(上佳里)에 이치대첩비와 대첩사(大捷祠)를 세웠으나 1944년 6월 일제가 항일유적 말살정책으로 폭파하여 그 파편이 진산면 사무소에 보관되었다. 1963년 대첩에 참여한 후손과 지역 유지가 지금의 장소에 비석을 건립하였다. 1991년부터 성역화계획이 수립되어 사당·비각 및 안내판 이축, 내삼문·외삼문·담장을 건립하였다. 권율 장군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長興面) 석현리(石峴里)에 있다.
권원수실적과 사후[편집]
-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로 큰 공을 세운 만취당(晩翠堂) 권율(權慄)의 사적을 기록한 책. 필사본. 1책. 편자 미상. 규장각 도서. 《권충장공실기(權忠莊公實記)》라고도 한다. 여러 책에 나오는 지장(誌狀)·제문(祭文)·사행(事行)과 난중(亂中)의 사실 및 죽은 뒤의 포장(褒奬)의 문자(文字)를 수록하고, 부록으로 그의 형 중추부 동지사(同知事) 순(恂)의 묘명(墓銘)이 실려 있다.
- 권율의 묘비문과 묘표음기는 사위 이항복이 짓고 썼으며, 행주대첩의 승리를 기념하여 최립은 고양 행주에 권원수행주비(權元帥幸州碑)를 세웠다. 훗날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筳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에 추증되고, 1604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 중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 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충장공(忠莊公)이 되었으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1605년 청난원종공신 1등에 추록되었다. 1841년(헌종 7) 고양군 행주에 기공사(紀功祠)가 건립되면서 기공사에도 제향 되었다.
행주대첩[편집]
-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북관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불리며,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 전투와 독성산성 전투 등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한양을 탈환하려다 조명연합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 상태에 빠졌다. 이때 권율은 이순신에게 여러 가지 무기를 제공받았다.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와 비격진천뢰, 이순신에게 제공받은 각종 함포들(천자총통 등)도 맹활약한 바 있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권율〉, 《나무위키》
- 〈권율〉, 《위키백과》
- 〈권율(權慄,1537~1599)〉, 《두산백과》
- 〈권율(權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고석철, 〈권율 장군 묘 (2024.07.16)〉, 《네이버블로그》, 2024-07-19
- 광야, 〈(권율장군 묘/양주) 임진왜란이 만든 영웅〉, 《네이버블로그》, 2023-02-17
- 상전남매, 〈권율장군을 모셔둔..행주산성 한켠 행주서원〉, 《네이버블로그》, 2023-05-28
- 건행자, 〈행주대첩(1593)의 주인공 권율(權慄)장군(1537-1599) ! 양주에 잠들어 있다.〉, 《네이버블로그》, 2020-11-21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