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영친왕(英親王)은 대한제국 군주 고종(高宗)의 서자(庶子)이자 前 대한제국 조선 황조 황실 수장이다.
개요[편집]
- 영친왕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907년 형인 순종이 즉위한 뒤에 황태자가 되었고, 1926년 순종이 죽은 뒤에는 이왕의 지위를 계승했다.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족인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일본 왕족으로 대우를 받으며 일본군 장성을 지냈다. 이름은 은(垠), 아명은 유길(酉吉), 호는 명휘(明暉)이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이다. 1900년 영친왕(英親王)이라는 봉호(封號)를 받았으며, 1907년 이복형인 순종(純宗)이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황위에 올랐을 때 형인 의친왕(義親王)을 제치고 황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순종이 '이왕(李王)'으로 불리게 된 뒤에는 '이왕세자(李王世子)'가 되었다가 1926년 순종이 죽은 뒤에는 제2대 이왕으로 즉위하였다. 사후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이 그에게 의민(懿愍)이라는 시호(諡號)를 붙여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는 문중에서 사적으로 붙인 것으로 공적인 시호는 아니다. 친왕(親王)은 본래 황제가 귀비나 후궁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시대에 따라서는 황태자를 제외한 황제의 아들이나 황제의 형제들에게 사용되기도 했다. 《고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900년(고종 37) 8월 8일 탁지부 대신인 조병식(趙秉式)이 친왕(親王) 봉호망단자(封號望單子)에 관해 고종에게 보고하자, 고종이 직접 의친왕과 영친왕의 봉호를 정했다고 전해진다. 곧 영친왕은 이은(李垠)의 대한제국 당시의 공식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1]
- 영친왕은 의민태자 이은(懿愍太子 李垠,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인데 대한제국의 황족, 일본제국의 정치인이다. 휘는 은(垠), 아명은 유길(酉吉), 자는 광천(光天), 아호는 명휘(明暉), 명신재(明新齋)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사후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정식 시호가 아닌 사시이다. 황태자로 책봉되기 이전의 작호인 영친왕(英親王)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광무제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이다. 순종과 의친왕, 덕혜옹주와는 이복 형제이다. 1897년에 경운궁 숙옹재에서 태어나 의친왕을 제치고 병약하여 아들이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제2대 창덕궁 이왕이 되었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장에 이르렀다. 1963년에서야 혼수상태인 채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하여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에 안장되었으며, 원호는 영원이다.[2]
- 영친왕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후의 황태자이자,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이왕(李王)이며 또한 일본 제국의 마지막 비주권군주다. 종묘에 배향된 마지막 조선-대한제국의 황족이다. 종묘 영녕전에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이란 명칭으로 위패를 봉안했다. 고종황제의 7남으로 순종황제와 의친왕의 이복동생, 덕혜옹주의 이복오빠이다. 순종이 즉위(1907년 7월)하고 난 다음 대한제국 황태자로 책봉(8월)되었다. 조선시대 중 동생이 왕위 계승자일 경우 세자로 칭하는지 세제로 칭하는지는 두 가지 경우로 나뉘는데, 정종의 동생 이방원은 세자로 지칭되었으나 경종의 동생 연잉군의 경우 세제로 지칭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그의 통칭은 고종이 황제가 된 후에 내린 친왕 號(친왕 작호)인 '영친왕(英親王)'이다. 간혹 '친왕(親王)'이 일본식 칭호이기 때문에 '친왕'에서 '친'을 뺀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부인인 이방자 여사도 생전에 '영친왕'은 잘못된 호칭이니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친왕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제도이고, 대한제국도 이에 준하여 제도를 정했기 때문에, '~친왕'을 가리켜 틀린 호칭이라고 하는 주장이 도리어 잘못이다. 《고종실록》 등에 '영왕'으로 적힌 예가 있긴 하나 '영친왕' 칭호가 틀려서가 아니라 이것은 단순히 '영친왕'을 줄여 쓴 표기일 뿐이다. 중국의 예를 들면, 청태조 누르하치의 아들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을 줄여서 예왕(睿王)이라고 부르곤 한다. 대한제국 시절 왕부에서 사용하던 도장에서도 '영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3]
영친왕의 생애[편집]
- 1907년 황태자가 된 뒤에 통감(統監)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후견인으로 삼아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했으며, 1911년 일본의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였다. 1915년에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1920년 일본의 왕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 한국이름 이방자)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을 낳았으나, 첫째아들인 이진(李晉)은 1922년 한국을 방문하던 중에 죽었다.
- 1926년 순종이 죽자 창덕궁(昌德宮)에서 이왕(李王)의 자리에 올랐으나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1년 둘째아들인 이구(李玖)를 낳았고,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하여 1940년 육군 중장이 되었다. 1943년 일본의 제1항공군(第1航空軍)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복무하다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에 예편되었다. 그리고 1947년 일본 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왕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그해 10월 18일에는 일본 왕족의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일본 국적도 잃었다.
- 영친왕은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까지 추진하며 반일정신을 고수한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제치고 일제의 영향으로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을 뿐 아니라, 일본 왕족과 결혼하고 일본군 장성을 지내는 등 일제에 순응하는 무기력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영친왕의 한국으로의 귀환은 반대에 부닥쳐 실현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57년 일본 국적을 취득하였고, 미국으로의 이민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인 이구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59년 3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인 1962년 12월 15일 한국 정부에 의해 영친왕 부부의 대한민국 국적 회복이 고시되면서 이듬해인 1963년 11월 22일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 뒤 병상에 있다가 1970년 5월 1일에 사망하여 고종이 묻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洪裕陵) 영원(英園)에 안장되었다.
이방자[편집]
- 이방자(李方子,1901~1989.4.30.)는 일본 국왕 메이지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친왕의 딸로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정략적 약혼을 하고 황태자비가 되었다. 1945년 광복으로 일본 왕족에서 제외되어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 불행을 겪으면서도 1962년 한국 국적 취득 후 사회사업에 전념하였다. 일본 국왕 메이지[明治]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친왕(親王)의 딸로 태어나, 히로히토(裕仁) 왕세자의 비로 정해졌다. 이후 학습원(學習院)에 입학, 왕비수업을 받던 중 1916년 일본에 볼모로 잡혀와 일본 육군사관학생이 된 영친왕과 정략적 약혼을 하고, 1920년 황태자비가 되었다. 1921년 아들 진(晉)을 낳고, 1922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진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1931년 다시 아들 구(玖)를 얻고 행복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광복으로 일본 왕족에서 제외되어 거처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생 끝에 1963년 의식불명이 된 병석의 영친왕과 함께 귀국하였다.
- 1962년 한국 국적 취득 후 1963∼1982년 신체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1965년 자행회(慈行會)를, 1966∼1988년 서울칠보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67∼1986년 사회복지법인 명휘원(明暉園) 이사장 및 총재, 1971년 영친왕기념사업회 이사장, 1975년 수원시 자혜학교(慈惠學校) 이사장, 1982년 광명시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영친왕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정박아 교육·지체부자유자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기술교육 등 육영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어린 마사코(方子)가 임신할 수 없다는 일본국의 은밀한 진단결과에 따라 조선왕족의 단절을 꾀한 정략결혼의 희생자이기는 하였으나, "내 조국도, 내 묻힐 곳도 한국"이라는 신념으로 봉사해 왔다. 1989년 4월 30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병으로 비운의 일생을 마치고, 5월 8일 경기도 남양주시 홍류릉의 영친왕묘소에 합장되었다.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 민족상, 국민훈장 모란장, 소파상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 《지나온 세월》 《세계는 하나 The World is One》 《세월이여 왕조(王朝)여》를 남겼다.
영원[편집]
- 영원(英園)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英王)과 부인 이방자(李方子)의 묘.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 이은(李垠,1897~1970)과 부인 이방자(李方子,1901~1989)의 묘로 남양주시 금곡동 141번지에 있다. 홍릉·유릉과 더불어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입구에는 제실이 있으며, 묘역에는 나지막한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봉분과 석물을 조성하였다. 제실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팔작지붕 건물로 다른 곳에 비해 아담한 편이다. 봉분은 둘레돌 대신 연꽃 문양을 조각한 난간석을 둘렀고, 봉분 앞으로 석양(石羊)·상석(床石)·망주석(望柱石)·장대석(長臺石)·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마석(馬石)·장명등(長明燈)을 두었다. 상석은 4개의 북석으로 받치고 있는데 북석에는 귀신을 쫓아 준다는 귀면(鬼面)무늬가 새겨져 있다. 또 망주석의 받침돌은 팔각형으로 그 위에 안상(眼象)문양과 꽃잎이 위로 향한 꽃문양, 그리고 청설모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문인석으로 금관조복형(金冠朝服形)이며, 장명등은 사각형의 받침대 모양으로 사방에 꽃문양을 새기고 그 위에 불창을 만들었다.
덕안궁[편집]
- 덕안궁(德安宮)은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英親王)의 생모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1903년(고종 40)에 건립되었다. 순헌황귀비는 영친왕 이은(李垠)의 어머니로, 1897년에 영친왕을 낳으면서 귀인으로 책봉된 뒤, 1903년 순헌황귀비 칭호를 받았다. 경운궁(慶運宮) 안의 명례궁(明禮宮) 터에 경선궁(慶善宮)을 세우고 이곳에서 살다가 1911년 7월 사망한 뒤 이름을 덕안궁으로 고쳤다. 이후 1913년 지금의 태평로1가에 새로 궁을 짓고, 엄비의 묘우(廟宇)라 하여 궁 이름을 덕안궁이라 하였다. 1929년 7월 덕안궁을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겨 현재는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 안에 있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육궁(六宮)이라 하다가 이 덕안궁이 옮겨오면서 비로소 칠궁이라 하게 되었다. 정면 3칸의 목조건물로, 앞 툇간이 틔어 있으며, 네모 기둥에 초익공(初翼工)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앙에 화려한 무늬로 투각 된 제단과 위패가 놓여 있고, 측면은 중방 아래까지만 벽돌을 쌓았으며, 뒷면은 상방까지 벽돌을 둘러 쌓았다. 사당 앞 서쪽에 남북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이안청(移安廳)으로 쓰이는 부속건물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영친왕〉, 《나무위키》
- 〈의민태자〉, 《위키백과》
- 〈영친왕(英親王,1897~1970.5.1.)〉, 《두산백과》
- 장수경 기자, 〈‘환국 60주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기념 특별전 8일 개최〉, 《천지일보》, 2023-11-01
- 카페디엠, 〈도쿄 다크 투어리즘 – 야스쿠니 신사, 영친왕 저택〉, 《네이버블로그》, 2023-05-19
- 이고은 기자, 〈‘비운의 왕가’ 영친왕 유물 700여점 공개〉, 《경향신문》, 2010-02-18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