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순종(純宗)은 대한제국기 제2대(재위: 1907∼1910) 황제이다.
개요[편집]
- 순종은 조선의 제27대 왕(재위 1907 ~ 1910. 8)이자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이다. 이름은 척(坧). 호 정헌(正軒), 자 군방(君邦). 고종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 비는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 계비(繼妃)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 1875년(고종 12) 2월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된 후 다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융희 1)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강요로 헤이그 특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양위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910년 8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연호는 융희(隆熙)를 사용하였다. 1910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한국 관리(官吏) 임용을 허용하여 사실상 국내정치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8월 1일에는 다시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하였으며, 12월에는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고,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여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1909년 일본은 한국의 민정(民情)을 살펴 가며 국권탈취공작을 추진하여 7월에 군부(軍部)를, 10월에는 법부(法部)를 각각 폐지하여 정치조직을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하였다.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본국으로 간 뒤, 소네 아라스케(曾禰 荒助)를 거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후임으로 오면서부터 더욱 야욕을 드러내자, 각지에서 나라가 망함을 통탄하고 조정 대신들의 무능을 비난하며 암살을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동년 10월 안중근에 의하여 이토가 암살되고 12월 이완용이 습격을 당하였다. 그러나 불법적으로 국권을 강탈하여 1910년 8월 29일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昌德宮)에 머물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불렀다.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생을 마쳤으며, 능은 유릉(裕陵)이다.[1]
- 순종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한국사의 마지막 군주(재위 : 1907년 7월 19일 ~ 1910년 8월 29일)이다. 휘는 척(坧), 본관은 전주,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이다. 묘호는 순종(純宗), 시호는 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이후에는 사실상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왕공족 중 이왕가의 수장인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으로 불렸다. 명성황후는 순종을 포함하여 4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조졸하고 성인이 된 자녀는 순종이 유일하다. 1875년(고종 13년) 2월 18일,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882년(고종 20년)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 민씨(순명효황후)와 혼인하였다. 1895년 1월,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격상되었고 같은 해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어머니 명성황후를 잃었다. 1897년(광무 원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1904년(광무 8년), 황태자비 민씨가 죽자 순명비(純明妃)로 추존하였으며 즉위 후에 순명효황후로 추존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1월, 윤택영의 딸 윤씨(순정효황후)와 혼인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4월,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을 특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 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파견 이후,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로 고종은 퇴위 요구를 받았다. 7월 19일, 고종이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자 황제에 등극하였다. 등극과 동시에 대한제국 육군 대장 예편과 아울러 원수에서 대원수로 승급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로 개원하여 8월 2일부터 사용하였다. 8월 27일, 덕수궁 돈덕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오전 6시에 심장마비로 승하하였다. 고종의 홍릉 근처인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순종의 장례식 날짜에 맞추어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 만큼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민족주의 계파와 사회주의 계파가 합작한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묘호는 순종(純宗)이며 1926년 5월 1일 이왕직 장관 민영기가 제안한 순종, 경종(敬宗), 성종(誠宗) 중 수망(首望)대로 결정되었다.[2]
- 순종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조선 제27대 마지막 국왕이다. 또한 현재 기준 한국사상 마지막 군주다. 묘호는 순종(純宗), 시호는 효황제(孝皇帝). 휘는 척(坧), 자는 군방(君邦)이다. 정식 시호는 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약칭 순종효황제. 융희황제, 융희제라는 호칭도 사용한다. 현재 대한민국 문화재청에서는 '순종 효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생일인 3월 25일은 대한제국 때 '건원절(乾元節)'이라는 이름의 국가 경축일이었다. 1907년(융희 원년) 8월 7일 궁내부대신 이윤용이 황제 탄신경절을 건원절(乾元節)로 개칭하자고 상소해 이를 윤허하였으며, 다음 해인 1908년(융희 2년) 음력 2월 8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3월 25일로 정했다. 순종은 결국 1926년 4월 25일 묘시 창덕궁 대조전에서 52세를 일기로 자식 없이 붕어하였는데, 순종의 국장을 기회로 제2의 3.1 운동을 시도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왕의 위(位)는 영친왕에게로 이어졌다. 죽기 전 일본군 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사망 전에 남긴 유조(유언)(遺詔)가 있는데, 궁내부 관리인 조정구에게 구술하도록 했고, 이 유언은 미국의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新韓民報)》에 실렸다. 주 내용은 '한일병합 조약의 조인이 일본 및 친일 관료의 강압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순종 본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에 위치한 유릉(裕陵). 고종의 홍릉과 마찬가지로 황제릉의 형식으로 꾸몄다. 이 능에는 순종, 순종의 첫 번째 부인 순명효황후 민씨와 두 번째 부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모두 합장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능제 중 유일한 3인 합장릉 형식이다.[3]
- 순종은 1874년 2월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이다. 출생 다음 해 2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에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 7월에 일제가 강제로 고종을 퇴위시키면서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황제(皇弟)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하였고,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순종의 재위 기간은 일본에 의한 한반도 무력 강점 공작으로 국권이 점차 제약되고 있었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인 1907년 7월 일제는 이른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강제 체결하여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정부 각부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정치를 시작하였다. 내정간섭권을 탈취한 일본은 동시에 얼마 남지 않았던 한국 군대를 재정 부족이라는 구실로 강제 해산시켜 우리 겨레의 손에서 총칼의 자위 조직마저 해체해 버렸다.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己酉覺書)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해 버렸다. 이처럼 순종은 실권을 상실한 허수아비 황제였다. 일제는 1909년 7월 각의(閣議)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한국과 만주 문제를 러시아와 사전에 협상하기 위해 이토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에게 포살(砲殺)되자 이를 기화로 한반도 무력 강점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침략 의도에 부화뇌동하는 친일매국노 이완용 · 송병준 · 이용구(李容九) 등을 중심한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조선인이 원하여 조선을 합병한다는 미명하에 위협과 매수로 1910년 8월 29일에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순종 주변에는 친일 매국 대신과 친일 내통인만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최고의 수렴자로서의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무력 앞에 종언을 고한 뒤, 순종은 황제의 위에서 왕으로 강등되었다. '창덕궁(昌德宮) 이왕(李王)'으로 불렸고, 왕위의 허호(虛號)는 세습되게 조처되었다.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4월 25일에 사망하였다.[4]
순종실록[편집]
- 순종실록(純宗實錄)은 1927년 4월 이왕직(李王職)의 주관하에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의 재위 4년간과 퇴위 후의 17년간의 사적을 편찬 수록한 책이다. 22권 8책이다.
순정효황후[편집]
-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는 조선 제27대 왕인 순종의 비이다.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옥새(국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백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는 일화가 있다. 국권피탈 후 이왕비전하로 강칭되고 순종이 후사 없이 죽은 후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본관 해평(海平). 윤택영(尹澤榮)의 딸. 1906년(광무 10) 13세로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될 때 어전회의의 진행을 병풍 뒤에 숨어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옥새(국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백부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는 일화가 있다. 국권피탈 후 이왕비전하(李王妃殿下)로 강칭(降稱)되고, 1926년 순종이 후사 없이 죽은 후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낙선재(樂善齋)에서 병사하였으며,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순종에 대한 평가[편집]
- 과거 망국의 군주였던 신라의 경순왕, 고려의 공양왕과는 달리 마지막 황제로서 뭔가를 하려고 했던 흔적도 없었고, 친일파와 일본 세력에 이리저리 휘둘렸으며, 망국 후에도 일제가 보장해 준 이왕직에 만족하고 잘 먹고 잘 살면서 그 이상의 특별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단, 마지막 왕이라고 해서 나라 망친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말 그대로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그가 사리분별이 가능한 나이가 된 1890년대쯤부터 이미 대한제국의 미래는 암울한 상태였다.
- 순종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저항은 아버지 고종이 다 해보기는 했다. 외교적 청원이라거나 국외 단체와의 연락이라던가, 국내의 반외세 세력과의 연락이라거나 국외로의 탈출 시도라거나, 심지어 결과적이지만 죽음을 통한 저항까지. 순종은 옆에서 그게 다 안되는 것을 보고 성장했다. 더구나 모친은 일본에 저항하다가 미우라 공사를 뒷배로 둔 일본 낭인 자객에 의해 끔찍하게 암살당했다. 물론 궁궐이 생각보다 쉽게 뚫린 건 고종의 친위부대 중 하나였던 훈련대가 고종에게 불만을 품고 일본에게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부인 순명효황후 민씨 역시 이 사건으로 병사했으니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순종 본인도 독살 미수 피해자였고, 즉위 당시 이미 아무런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세도 정치 시대의 철종마저도 세도가들에게 눈칫밥 먹이고 입 다물게 할 권력은 충분히 있었고 고종도 초반이나 극후반을 제외하면 왕이라고 불릴만한 권력이 있었다. 근데 순종 시대에는 권력이 전부 일본으로 넘어가 버려서 일본의 덴노 수준일 정도로 허수아비였다. 순종이 기거한 창덕궁에도 일본 경비병들이 감시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 궁중 의사 호러스 뉴턴 알렌은 순종을 싫어했는데, 알렌 일기에서는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것은 알렌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서 널리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주로 언급되는 건 김홍륙 독차 사건 후유증으로 바보가 되었다는 설이었다. 그러나 순종이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는 기록을 볼 때 지능 자체가 낮았다기보다 사람이 좀 어수룩하게 보였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전반적으로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명석하다는 평도 내렸지만, 대외적인 이미지가 낮고 대중적 지지도가 없었다. 순종이 김홍륙 독차 사건 후유증으로 몸이 크게 약해진 것은 사실이며 이로 인해 건강 상태가 좋지 않고 힘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순종은 거의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그 후유증에 평생 시달릴 정도로 매우 병약했고 이것이 자신감 결여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6·10 만세운동[편집]
- 6·10 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은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융희(隆熙) 순종 황제의 인산일(因山日 출상일)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운동. 병인(丙寅)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 주동자는 연희전문의 이병립(李炳立), 박하균(朴河鈞), 경성대학의 이천진(李天鎭), 천도교의 박내원(朴來源), 권동진(權東鎭), 양재식(楊在植), 손재기(孫在基), 박내홍(朴來弘), 백명천(白明天), YMCA의 박두종(朴斗鍾), 중앙고보의 이선호(李先鎬), 이광호(李光鎬), 이황희(李晃熙), 사회주의 측의 권오설(權五卨), 김단야(金丹冶), 이지탁(李智鐸), 박민영(朴民英), 인쇄직공으로 민창식(閔昌植), 이용재(李用宰), 김항준(金恒俊) 등이었다. 권오설은 자금을 조달하였고, 박내원은 전단지 살포와 연락을 담당하였다. 양재식, 이용재, 백명천 등은 안국동 감고당(感古堂) 민창식의 집에서 10만매의 전단지를 인쇄하였고, 태극기도 준비하였다. 전단의 내용은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맡겨라,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라, 토지는 농민에게 돌리라, 8시간 노동제를 채택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시민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황제 국장일을 거사일로 택하였다.
- 조선 황제의 국장일을 맞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과거 3·1운동의 일을 거울삼아 매우 민감하게 경비에 대비하였다. 조선총독부 산하 전경찰과 일본군 5000여 명이 경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1926년 6월 10일 오전 8시 30분경 황제의 상여가 종로 단성사 앞을 통과할 때 중앙고보생이 전단을 뿌리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모든 민중이 호응하여 관수교, 황금정 3정목(3가), 훈련원, 동대문 동묘(東廟), 청량리에 이르는 상여통과 예상 연도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은 그 후 전국으로 전파 확산되어, 순창, 군산(이상 전라북도), 정주(定州 평안북도), 홍성, 공주(이상 충청남도)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계열의 권오설, 박내원, 민창식 등은 상하이에 있는 여운형(呂運亨)과 연락하여,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전단 10만 매를 인쇄하며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6·10 만세운동'으로 서울에서 이병립, 박하균 등 200여 명이 체포되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 동모자 또는 관련자로 체포, 투옥되었다. 이 만세운동은 3·1 독립운동만큼 전국적이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민족운동이었다.
유릉[편집]
- 유릉(裕陵)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에 있는 조선 27대 왕 순종과 비 순명효황후 민씨,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洪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 8) 11월 5일 숨졌고, 이듬해 1월 4일 양주 용마산 아래 언덕에 예장되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세상을 떠나 그해 6월 11일 홍릉 왼쪽 산줄기 현 위치에 안장되면서 순명효황후를 이장하여 합장하였고, 1966년에는 순정효황후가 합장되었다.
- 조선시대의 마지막 왕릉인 유릉(裕陵)은 조선 왕릉 중에서 하나의 봉분에 세 명을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이다. 홍릉처럼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약간 작은 편이다. 봉분을 감싼 병풍석과 난간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졌으며, 혼유석·망주석·사각 장명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된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는 없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 침전(寢殿)이 있고, 침전 앞 참도(參道) 양쪽에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 등 동물 석상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침전 외에 비각·홍살문·수복방·재실 등의 부속건축물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순종(대한제국)〉, 《나무위키》
- 〈순종 (대한제국)〉, 《위키백과》
- 〈순종 (純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순종(純宗,1874~1926.4.25.)〉, 《두산백과》
- 현동민 기자, 〈(오늘의 역사) 대한제국 마지막 군주, 순종 즉위식 거행〉, 《인천투데이》, 2024-08-27
- 현동민 기자, 〈(오늘의 역사) 침체된 독립운동에 불씨를 지핀 6.10만세운동〉, 《인천투데이》, 2024-06-10
- 달뫼, 〈4월 25일 / 대한제국 순종 황제 승하〉, 《네이버블로그》, 2024-04-25
- 박문선 기자, 〈98년 만에 대한제국 고종황제 장증손 이준 황손, 여수 삼황묘 참반〉, 《전남인터넷신문》, 2024-04-17
- 이경영 기자, 〈1926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 사망〉, 《경향신문》, 2011-04-24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