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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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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문익점(文益漸)은 고려 후기 목화 종자를 도입하고 재배하여 전국에 보급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개요[편집]

  • 문익점은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서장관으로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字)는 일신(日新),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초명(初名)은 익첨(益瞻)이다.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남 산청) 출신으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으로 임명되었으며, 성균관(成均館)의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공민왕 12)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육품(從六品) 벼슬인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문익점 면화 시배지(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는 문익점의 묘소와 함께 그의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1]
  • 문익점(1329년 2월 8일~1398년 6월 13일)은 고려 경상도 김해부사록, 고려 한림원 순유박사 등을 거쳐 고려 성균관 대사성 직책을 지낸 고려 말의 학자, 문신, 외교관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강성 문씨(江城 文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초명은 문익점(文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이다. 관직은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고 작위는 강성군에 봉군되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다가 목화씨 몇 알을 고려로 들여와 장인 정천익하고 함께 이를 재배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그의 장인 정천익이 심었던 한 송이가 겨우 싹을 틔웠다. 그의 3년 동안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를 퍼지게 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목화솜에서 실을 뜨는 방법을 연구해냈다. 고려사 기록에 그가 최초로 한국에 면포를 만드는 목화를 들여왔다고 전하나, 백제 시대 면직물을 발견하여 삼국시대에도 목화를 재배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의 목화 반입과 재배 기록은 후일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곡의 문인이다.[2]
  • 문익점은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강성현(江城縣) 출생. 문숙선(文淑宣)의 아들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禀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고려사』 열전 「문익점전」에 의하면,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원에 체류한 채 덕흥군 편에 붙었으나 덕흥군이 패배하자 고려로 귀국하였다. 문익점이 실제로 덕흥군을 지지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중국[元] 승려 홍원(弘願)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문익점은 이색(李穡) · 이림(李琳) · 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되었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또한 그의 고향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또,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산청 목면시배 유지가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여기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가 세워져 있다.[3]
  • 문익점은 여말선초의 유학자, 정치인, 관료이다. 하지만 학자보다는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사람'으로 더 유명하다. 그의 시대는 바야흐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려던 시점이었는데 목화의 보급으로 조선의 의복 문화는 물론 상거래 관행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원 간섭기 와중인 1329년(충숙왕 16년) 경상도 진주목 강성군(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과 어머니 함안 조씨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곡(李穀)의 제자가 되어 이색 등과 함께 공부했고 1360년(공민왕 9년) 경덕재생(經德齋生)으로서 경자방(庚子榜) 문과에 응시하였는데 이때 병과 4위로 급제하면서 벼슬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본래 목화의 원산지는 인도인지라 사철 온난한 열대 기후에서 잘 자라는 관계로 한국에서는 잘 자라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동북아시아 기후에 적응한 개량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익점 이전에는 재배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삼국사기 색복지를 봐도 통일신라 중기 사람들의 복식으로 견직물, 삼베, 소가죽 등이 주로 나오지 면직물은 언급되지 않으므로 백제 때부터 면직물이 존재했다 쳐도 대중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재래종의 수량이 극히 희소했던 것으로 보이기에 그 공로가 깎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목화 보급 100년 만에 조선 전체로 펴져나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익점은 목화의 대중화에는 상당 부분 기여했으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공로다.[4]

문익점의 생애[편집]

  • 문익점은 1329년 2월 경상남도 산청의 강성현(江城縣)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익점의 생몰년은 다소 불확실하며 태어난 해는 1331년, 사망한 해는 1400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의 첫 이름은 익첨(益瞻)이었다가 뒤에 익점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아버지 문숙선은 과거 시험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은 극구 사양했다.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2살 때부터 당대의 학자 이곡의 제자가 되어 그 아들 이색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 문익점은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한 후 김해부사록과 순유박사 등을 거쳐 1363년 사간원좌정언으로 재직 중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덕흥군을 지지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목화를 재배하다가 우왕 즉위 후 전의감주부와 좌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는 이성계(李成桂), 정도전, 조준 일파가 추진하였던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을 증직하였고, 세종 때인 1440년(세종 22)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가증하였다.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목면(木緜) 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왔다.
  •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점은 1364년 고향인 진주(晉州)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鄭天益)과 씨앗을 나누어 목면나무의 재배를 시험하였다. 그가 심은 것은 모두 재배에 실패했지만,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 개의 씨앗을 얻었다.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鄕里)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였다. 그리고 정천익은 호승(胡僧)인 홍원(弘願)에게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10년이 되지 않아서 나라 전체에 목면(木棉) 재배와 무명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문익점은 고려 우왕 때인 1375년(우왕 1)에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었으며, 1389년에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정사품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가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때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1398년(조선 태조 7)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생전에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가 유배지였던 중국에서 면화를 가져와 민간에 보급한 것, 직조(織造)를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했다며 조선시대 들어 매우 높이 평가되고 숭배되었다. 또한 그의 치적은 성리학의 초기 인사인 이곡의 직제자의 한사람이자 이색, 정몽주의 동문이었으므로 성리학 이념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문익점의 업적[편집]

  •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면(木綿)을 가져와 직조(織造)를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했다며 매우 높이 숭앙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태조는 그에게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의 직위와 강성군(江城君)의 봉호(封號)를 추증하였으며, 태종 때에는 그의 아들인 문중용(文中庸)에게 사헌감찰(司憲監察)의 벼슬을 내렸다. 세조 때에는 그의 관향(貫鄕)에 사당을 세워 해마다 두 차례씩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그를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뜻에서 '부민후(富民候)'로 추봉하는 한편 '충선(忠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정조 때인 1785년에는 그의 위패를 안치한 서원에 임금이 직접 도천서원(道川書院)이라는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액자를 보냈다.
  • 백제 시대의 유적지인 부여 능산리 절터의 출토 유물에서 목면으로 된 직물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도 면직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14세기 후반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면직이 시작되었다는 기존의 인식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양서(梁書)≫, ≪한원(翰苑)≫ 등의 기록을 근거로 품종은 다르지만 삼국시대 이전부터 모, 마, 면 등을 직조해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들로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면서 면직물 생산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은 비판되고 있지만, 문익점과 정천익의 목면 재배와 보급이 면직물 생산을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하여 백성들의 옷감이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문익점 부조묘[편집]

  • 문익점 부조묘(文益漸不祧廟)는 전라남도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528-1번지에 있는 고려 말기의 문신 문익점의 사당이다. '삼우당충선공강성군부민후문익점부조묘(三憂堂忠宣公江城君富民侯文益漸不祧廟)'라고도 한다. 부조묘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제사 지내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문익점은 고려 말기에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가져와 국가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성리학을 크게 일으켜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이에 조선 태종이 문익점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부조묘를 세웠으며 이후부터 그의 기일마다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본래 경상도 산청군 단성면에 있었으나 1854년(철종 5)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세웠다. 이곳에는 문익점 부조묘와 관련된 조선 후기(18세기 말∼19세기 말)의 각종 증명서 15점이 보존되어 있는데, 모두 지방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산청 문익점 묘[편집]

  • 산청 문익점 묘(山淸 文益漸 墓)는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는 문익점의 묘이다. 1983년 8월 24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문익점은 1331년(고려 충혜왕 2) 강성현(江城縣:지금의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360년(공민왕 9) 과거에 급제하였다. 1363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있다가 계품사(啓稟使) 이공수(李公遂)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갔다. 이때 원에서는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德興君)이 왕위에 오를 음모를 꾸며 원 순제(順帝)의 허락까지 얻어놓고 있었다. 그들 일파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문익점이 동조하지 않자 그들의 위계에 의해 그는 윈난[雲南] 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 목화 재배와 면직물 가공을 목격하였다. 귀양에서 풀려나 귀국하면서 목화씨를 숨겨와 고향에서 이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자 목화 재배를 널리 전파시켜 국민의 의생활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으며 세조 때에는 사당인 노산정사(蘆山精舍)가 건립되었다. 묘의 형태는 사각형의 분묘로 주위는 상석·비·문인석·망주석·석등이 갖추어지고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삼우당실기[편집]

  •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는 고려 말기의 문신인 문익점(文益漸)의 실기(實記)를 모은 책이다. 목활자본. 6권 3책.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이 책은 한꺼번에 편집된 것이 아니라 1464년(세조 10)에 문치창(文致昌)이 편찬한 《사실본기(事實本記)》, 박사휘(朴思徽)가 편찬한 《행적기(行蹟記)》 등을 1819년(순조 19) 후손 계항(桂恒) 등이 편집·간행한 것을 후손 재표(載豹) 등이 1900년(광무 4)에 중간(重刊)하였다. 권1은 문익점 자저(自著)의 시문집, 권2∼5는 제가(諸家)의 만사(輓詞)·제문(祭文)·전지(傳誌) 등이고, 권6은 세계(世系)·연보(年譜) 등을 수록하였다. 이 책은 문익점 연구와 고려 말의 원(元)나라·명(明)나라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이다.

목화시배지전시관[편집]

  • 목화시배지전시관(木花始培地展示館)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문익점 선생이 면화를 처음 심었던 곳에 세워진 기념 전시관이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위치하며 1997년 6월 10일에 개관하였다. 전시관에는 무명옷을 짜는 과정과 당시의 생활풍습을 전시하고 있다. 1전시관에는 무명옷을 짜는 베틀과 기구들이 전시되고 2전시관에는 조선시대 의류가 전시되고 있다.

도천서원[편집]

  • 도천서원(道川書院)은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는 문익점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고려 때의 문신으로 한국에 목화를 들여와 보급한 충선공 문익점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서 1461년(세조 7)에 나라에서 사당(祠堂)을 세웠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1787년(정조 11)에는 '도천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나 1891년(고종 28) 단성(丹城) 사림(士林)들이 노산정사(蘆山精舍)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 후 1975년 사당인 삼우사(三憂寺)를 새로 건립하고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공간배치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인 강당, 유생들이 기숙하는 동재·서재가 앞쪽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삼우사가 뒤쪽에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문익점(文益漸,1329~1398?)〉, 《두산백과》
  2. 문익점〉, 《위키백과》
  3. 문익점(文益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문익점〉,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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