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김원봉(金元鳳)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개요[편집]
- 김원봉은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에 나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광복군 부사령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여 북한의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이 되었다가 숙청되었다. 김원봉은 1898년 음력 3월 13일 경상남도 밀양(密陽)에서 아버지 김주익(金周益)과 어머니 이경념(李京念)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약산(若山)이며, 최림(崔林)· 김약산(金若山) 등 다양한 이명(異名)을 사용하였다. 어릴 때 한문을 배웠으며, 11세에 밀양공립보통학교(密陽公立普通學校)에 편입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이 발생하자 교내에서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리는 등 반일 활동을 벌이다가 학교를 자퇴하고 전홍표(全鴻杓)가 교장으로 있는 동화중학(同和中學)에 편입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홍표를 위험인물로 지목하여 동화중학은 곧 폐쇄되었고, 김원봉은 1913년 서울 중앙중학(中央中學)으로 옮겼다. 이 무렵부터 김원봉은 강력한 무장을 통해서만 일본을 몰아내고 자주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곧 군사학과 외국어를 배우기 위하여 1916년 중국 톈진(天津)의 덕화학당(德華學堂), 1918년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유학하였다. 이후 만주 일대를 돌아다녔는데, 이때의 답사를 통하여 군대 양성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끊임없는 폭력 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노선을 바꾸었다. 곧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였고, 중국인으로부터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1]
- 김원봉(1898년 9월 28일 ~ 1958년 11월)은 일제강점기의 의열단장을 역임했다. 호는 약산(若山),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경남 밀양에 의열 기념관이 있다. 1919년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고, 황푸 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공동의장, 6월 인민공화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국가검열상,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2]
-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시절 좌익 계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이다. 독립운동가로서는 3.1 운동 이후인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등 많은 단원들의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통치기관 파괴 활동을 이끌었고,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진영 통합 운동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로 활동하였으며,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이 되어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부 대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 노선에 있어서 그는 무장투쟁 이외의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비판하면서 독립운동의 주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를 앞장서서 주장했고 때문에 우익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또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혁명가 최창익, 김두봉 등과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을 벌였다. 초기에는 좌익 독립운동 단체에서 의열단 활동을 한 김원봉이 압도적인 위세를 과시했으나 1940년 이후 공산주의자 최창익과 김두봉이 주도권을 잡으며 연안파가 탄생했고, 김원봉은 연안파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말았다. 연안파에서 배제된 김원봉은 한때 반목했던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광복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결국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좌익 계열의 인민공화당을 이끄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남한 내의 좌익 계열 인사들과 단체들이 미군정과 우익 세력에 의해 와해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1948년에 월북했다. 이후 북한 정권 수립과정에서 북로당 계열로부터 '남조선 출신 비공산주의자'라는 지분으로 배려를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의 초대 국가검열상이 되었으며 1952년 5월 8일, 국가검열성이 인민검열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국가검열상에서 해임, 로동상으로 이임하였다. 후임 인민검열위원장으로는 1953년 1월 23일, 리기석이 임명되었다. 6.25 전쟁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노력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또다시 로력훈장을 수여받았으나, 1958년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3]
-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원봉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약산(若山)이다. 1898년 3월 14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아버지 김주익(金周益)과 어머니 이경념(李京念)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이경념은 김원봉이 네 살 되던 해 동생 김경봉을 낳다가 사망하였다. 아버지 김주익은 천연이(千蓮伊)와 재혼하여 8남 2녀를 두었고, 서모 박순남에게서는 3명의 이복 동생이 태어났다. 김원봉의 아들로 김중근과 김철근이 있다. 김원봉의 이칭으로는 최림(崔林), 진국빈(陳國斌), 왕세덕(王世德), 김암일(金岩一), 이충(李冲), 왕석(王石), 김설봉(金雲峰), 김국빈(金國斌), 진충(陳冲), 김약삼(金若三), 김세량(金世樑)이 있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12월에는 한국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계속하여 화북의 조선의용군과 재통합을 시도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12월 초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하여 각 정파의 통합에 힘썼다. 1946년 2월 좌익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였다가 잔류하여 9월 국가검열상에 취임하였다.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랐고, 1958년 9월 모든 공직을 사임하였다. 김원봉은 1958년 11월 세상을 떠났다.[4]
김원봉의 생애[편집]
- 1919년 11월 김원봉은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鐘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권준(權俊)과 함께 13명의 인원으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독립을 위하여 조속히 직접 행동, 즉 암살과 파괴, 폭파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김원봉이 단장을 맡았고, '공약 10조'와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 목표를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김원봉은 베이징(北京), 난징 일대를 오가며 단원 모집과 무기 입수에 힘썼다. 이러한 노력으로 의열단은 밀양, 부산, 종로경찰서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도쿄(東京) 니주바시(二重橋) 등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수행할 수 있었다.
- 1926년 김원봉은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입교하여 군사 및 정치 교육을 수료하였고,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의 초급 장교로 임관하여 북벌에 참가하였다. 김원봉은 이곳에서 공산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소극적인 항일 노선을 취하던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 대신 적극적인 항일 운동을 펼치던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과 가까워졌다. 1927년 4월 중국국민당이 대대적인 중국공산당 토벌에 나서자 김원봉은 중국공산당의 난창폭동(南昌暴動)에 참여하였다. 김원봉은 중국국민당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지만, 탈출하여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후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책임비서 안광천(安光泉)과의 만남을 통하여 의열단을 대중투쟁에 역점을 둔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1929년 베이징으로 옮겨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운영하며 《레닌주의》를 발간하였다.
-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생하며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자 의열단은 10월에 항일투쟁 전략을 재검토하였다. 1932년 봄 난징으로 이동하여 다시 중국국민당과 제휴하였고, 이들의 도움으로 같은 해 10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김원봉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1월에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환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등 여러 단체가 참여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에 참여하였다. 이후 1935년 6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설하여 서기장이 되었고, 지청천(池靑天) 계파와의 경쟁 끝에 승리하여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으로 바꾸고 총서기에 취임하였다. 아울러 1937년 12월에는 좌익과 중도파 정당이 결성한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원봉은 중국국민당을 도와 연합 항일전선을 구축하였다. 그 일환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들을 중국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켰고, 1938년 6월 최창익(崔昌益) 등 교조적인 공산주의자들이 탈당하여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을 조직하자, 중국국민당의 지원으로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의 총대장이 되었고, 대일 선전 활동과 일본군의 배후 공략 및 포로 귀순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의용대는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잠식되어 1941년부터 김원봉이 이끄는 본대를 제외하고는 이탈하여 모두 북상하였고, 이들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칭하며 중국공산당에 참여하였다. 김원봉이 조선의용대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한 것이다.
-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던 김원봉은 1939년 5월 김구(金九)와 공동명의로 전민족적 역량을 집중한 통일조직의 창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합당은 험난하였고,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1941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와 1942년 4월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통합이 결정되었다. 김원봉은 한국광복군의 부사령관이 되었고,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다. 1944년 4월에는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원봉은 지청천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갈등을 빚었고, 별다른 활동에 나서지 못하였다.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김원봉은 12월 군산비행장으로 귀국하였다. 여운형(呂運亨)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군사부장이 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김원봉은 민족협동전선운동에 따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움직였다. 그러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갈라서 신탁통치에 찬성하였고, 1946년 2월 남한 내 좌익 단체가 결집한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에 참여하여 중앙위원 및 공동의장이 되었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人民共和黨)으로 바꾸고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 및 무상분배 등을 주요 정치노선으로 내세웠다.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에 여운형 등과 같이 좌파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좌우의 갈등은 골이 깊어져만 갔고, 8월 미군정이 좌파 인물에 대한 검거를 결정하며 정치적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8년 4월 김원봉은 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南北協商)에 남한 대표로 참석하여 평양을 방문한 후 귀국하지 않고 북한에 머물렀다.
- 월북한 김원봉은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자 국가검열상이 되었고, 1952년 5월 노동상, 1956년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8년 3월 노력훈장을 받았다. 6·25전쟁 때는 남한 정치가 포섭 및 북한 체제 선전 등을 맡았고, 월북한 인민공화당 당원들을 지속적으로 남한에 침투시켜 대한민국 정부 전복 및 남한 내 인민공화당 재건 등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1958년 12월 무렵에 김일성(金日成) 중심체제 수립의 일환으로 반국가적 및 반혁명 책동 혐의가 적용되어 숙청되었다.
조선의용대[편집]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는 김원봉(金元鳳)이 1938년 중국의 임시수도 한커우(漢口)에서 창설한 한국 독립무장부대이다. 당시 200여 명에 달하는 조선독립군이 한커우에 집결해 있던 중, 일본군과 대적하던 중국군이 패전을 거듭하자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민족혁명당 동지들이 중국 정부 당국과 협의하여 조선독립군을 참전시키기로 하고 조선의용대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처음 2개 구대로 구성되었는데, 제1구대는 박효삼(朴孝三)이 지휘하여 후난(湖南)과 장시(江西) 등지에서, 제2구대는 이익봉(李益鳳)의 지휘로 안후이(安徽)와 뤄양(洛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 조선의용대 본부는 광시성(廣西省) 구이린수(桂林水)에 두었는데 나중에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병력이 미미하였으므로 전선에 직접 투입되지 않고 후방에서의 적진 교란, 첩보 및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처음에 200명에 불과하던 병력이 1940년 초에는 300명을 넘어서기도 했으나, 동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에 광복군이 조직된 뒤로 점점 이탈자가 늘어났다. 이렇게 되자 1942년 4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하기로 결의하였고, 동년 5월 총대장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과 제1지대장을 겸하고, 의용대는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우리 민족으로 구성된 독자적 부대로 중 ·일간의 국제전에 처음 참전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편집]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는 독립운동가 김원봉(金元鳳)이 이끈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이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여 세운 군사정치학교이다. 의열단은 1922년 9월에 열린 정기대회에서 '한·중 합작으로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의 혁명조직에 필요한 전위투사를 양성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김원봉 등이 중국의 황푸(黃埔)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후 만주사변이 끝나자 다시 학교설립 문제를 국민당에 제기하여 승낙을 받은 후 1932년 10월 난징(南京)에 학교를 설립, 1기생 26명의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겉으로는 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지대로 되어 있었으나 이는 중국의 군사교육기관인 것처럼 위장을 한 것이고, 실제로는 김원봉이 교장, 박건웅 ·이동화 등 의열단원이 교관을 맡은 순수 한국인 군사학교였다. '중국이 한인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한 편법이었다. 1935년까지 125명의 학생이 이 학교를 졸업한 후 국내와 만주로 파견되어 항일투쟁을 벌였다. 의열단이 해체될 때 이 학교도 함께 없어졌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김원봉〉, 《위키백과》
- 〈김원봉〉, 《나무위키》
- 〈김원봉/일생〉, 《나무위키》
- 〈김원봉〉, 《향토문화전자대전》
- 〈김원봉(金元鳳,1898.3.13. 음력 ~1958)〉, 《두산백과》
- 유석재 기자, 〈김구·조소앙·신익희·김원봉… 한때 그들의 목표는 같았다〉, 《조선일보》, 2024-06-22
- 이계환 기자, 〈“윤 정부에서 ‘김원봉과 함께’ 창립 자체가 역사적 의미”〉, 《통일뉴스》, 2023-11-11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