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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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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김구(金九)는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이다.

개요[편집]

  •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였으나 구(九)로 개명,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1894년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1895년에 귀국하여 안악으로 돌아가던 길에 치하포(鴟河浦)에 머무르다가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가 조선인으로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강에 버렸다. 김구는 고향으로 돌아가 머무르고 있다가 해주 감영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인천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됐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1899년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인천에서 항만 건설 공사 노역을 하였으며, 감형으로 1915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 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1]
  • 김구는 김구(1876년 8월 29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 정치인으로 자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백범이라는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었으며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6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내륙으로 피난했던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7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 생활을 하였으며,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2]
  • 김구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광복 후에는 1세대 민족주의 중도 우파의 1세대 정치인으로 보수파의 대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몇 번이나 해산위기를 겪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낸 큰 공로가 있으며. 그 덕분에 안창호, 이승만, 여운형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동학군의 병사로서 처음 민족운동에 뛰어들었고, 동학 전쟁의 패전 이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교육계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에는 중화민국령의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임시정부의 항일전시내각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자신의 이념보다 민족을 중시하는 성향 때문에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정부수립에는 반대하면서 단일조국을 형성하자는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알 수 없는 배후를 둔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논란과 격하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임시정부를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처지나 이념 혹은 필요에 따라서 임시정부를 해산하려고 시도하거나 떠난 후에 나중에 돌아온 것에 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켜낸 독립운동가였기에 그 자체로 정통성이 매우 높고 조금 과장하면 임시정부 정통성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우파든 좌파든 근대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인정받는다. 이름 있는 정치인이자 비극적인 죽음,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광복 이후에는 반탁 운동 및 남북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는 확고하다.[3]
  • 김구는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주석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신민회, 한국광복군 등에서 활동한 정치인 ·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김구는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 · 10 제헌국회 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 · 김규식 · 김일성 · 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4 · 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남겼다.[4]

김구의 생애[편집]

  • 김구는 어려운 가운데도 글 공부를 했지만 과거 시험에 낙방해 떨어졌고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 자체가 폐지되어 사라졌다. 김구는 원래 이름은 아니었다. 원래 이름은 김창암(金昌巖)이었는데, 1893년(18세) 동학에 입교하면서 김창수(金昌洙)로 바꿨고, 1912년(37세)에 김구(金龜)로 개명했다. '구' 자도 임시정부 시절 거북 구(龜)에서 아홉 구(九)로 바꿨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반기를 이끌던 지도자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개조파와 창조파가 모두 이탈, 독자세력화 하면서 규모와 정통성이 공히 크게 약화 된 임정을 이끌었고, 과감한 항일 활동으로 세계에 존재감을 알렸다. 광복 이후에는 귀국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 등과 대립하였으며, 우익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과 라이벌 관계를 이뤘다.
  • 김구는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김구는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다.
  • 김구는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우익 진영을 대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러지자 정치와 거리를 두고 건국실천원양성소 등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9년 6월 26일에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고 7월 5일 자신이 순국선역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하며 조성하였던 용산구 효창동 애국선열묘역에 모셔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구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편집]

  • 김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일종의 독재체제로 이해하였다.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김구는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이하 중략)...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며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또한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위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좌파와의 연대는 극히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의 존재를 좌파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역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 1938년 이후 장제스가 국공합작 분위기에 편승하기 위해 김구와 김규식, 김원봉을 소환하여 합작, 협력하라고 하자 좌파의 임정입각을 수용하게 된다.
  • 1922년 초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지원받았으나 임시정부에는 상납하지 않은 김립을 사살한 것도 그였다. 그는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을 보내 1922년 2월 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를 사적으로 유용했다며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으며,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라며 비판을 하였다. 김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외세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도 생각했다. 1919년 임시정부 경무국장 당시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혁명에 동참해달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는 소련 등 외국 세력에 기대는 것이라며 참여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김구(金九,1876.8.29.~1949.6.26)〉, 《두산백과》
  2. 김구〉, 《위키백과》
  3. 김구〉, 《나무위키》
  4. 김구(金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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