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
의천(義天, 1055~1101)은 고려 중기의 화엄종 승려로, 불교 개혁과 교장(敎藏) 간행의 업적을 남겼다.
개요[편집]
- 의천은 고려 시대의 왕족 출신 승려, 작가이다. 자는 의천(義天), 속성은 왕(王), 이름은 석후(釋煦) 또는 후(煦)이며, 호는 우세(祐世), 흔히 대각국사(大覺國師)라는 시호로 부르기도 한다. 고려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순종, 선종, 숙종의 친동생이며, 추존왕 양헌왕의 이복 형이다. 대한불교천태종을 세운 한국 천태종의 중흥시조로서, 대한불교천태종에서 3대 종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개경 출신이다. 문종은 자신의 아들들 중 누가 승려가 될 것인가를 묻자, 그가 자원하여 승려가 되었다. 1065년 외삼촌인 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를 스승으로 하여 계를 받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일찍이 요나라와 송나라를 방문, 순례하며 요 도종의 국사가 되고, 송나라를 방문해서는 각처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송나라의 고승들을 만나 강론을 듣고 돌아왔다. 이후 흥왕사, 흥원사(興圓寺), 해인사의 주지를 거쳐 다시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다.[1]
- 의천은 고려 시대의 승려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역설하며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였다. 저서에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석원사림(釋苑詞林)》 등이 있다. 속성(俗姓)은 왕(王), 휘(諱)는 후(煦), 자(字)는 의천(義天)이다. 원래의 법명(法名)은 석후(釋煦)였지만, 송(宋) 철종(哲宗, 재위 1085~1100)의 이름인 조후(趙煦)와 같은 글자를 피해서 자(字)인 의천(義天)으로 법명을 대신하게 되었다.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이다. 1055년 고려의 11대 왕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1092) 이씨(李氏)이다. 문종과 인예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세 명이 고려의 왕이 되었으므로, 의천은 12대 순종(順宗, 재위 1083년), 13대 선종(宣宗, 재위 1083~1094), 15대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의 친동생이며, 14대 헌종(獻宗, 재위 1094~1095)의 숙부이다. 1065년 5월, 11살의 나이로 개성 오관산(五冠山) 자락의 영통사(靈通寺)에서 화엄종(華嚴宗) 승려였던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을 스승으로 삼아 출가하였고, 1065년 10월 개성의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066년 난원이 입적한 뒤에는 창원(昶元)과 이기(理琦)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학문 연구에 힘을 기울여 대승불교만이 아니라 소승불교의 경전까지 섭렵하였으며, 유학(儒學) 경서들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에도 두루 능통했다고 전해진다. [2]
- 의천은 고려 전기 국사, 승통, 국청사 제1대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속명은 왕후(王煦). 호는 우세(祐世). 법명은 의천. 경기도 개성 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이다. 불교 전적을 정비하고 『 교장(敎藏)』을 간행하였으며,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하였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11세에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문종 19)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1065년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경 · 율 · 논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 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섭렵하였다. 스승인 경덕국사가 죽자 그의 강의를 대신 맡았다.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던 그가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 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의 서문만이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하에서 교웅(敎雄), 징엄(澄儼), 수개 등 160여 명의 고승이 배출되었다.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이며, 비는 영통사와 선봉사(僊鳳寺)에 건립되었다.[3]
- 의천은 고려 전기의 승려이다. 고려 제8대 현종의 손자이자 제11대 문종의 4남으로 제12대 순종, 제13대 선종, 제15대 숙종의 동생. 모후는 문종의 제2비 인예왕후다. 원래 이름은 후(煦)지만 당시 북송 황제 송철종의 이름과 겹치는 바람에 피휘하느라 평생 자기 이름을 써본 일은 몇 번 안 된다. 대신 자(字)인 의천을 썼으며 법명은 자와 같다. 어느 날 문종이 아들들을 모아 놓고 출가하여 스님이 될 사람을 찾았는데 이 때 자원하여 11세의 나이로 출가하였다고 한다.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교종의 최고 지위인 승통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문종이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아들을 출가시킨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지방 중심의 선종과 중앙의 교종으로 나뉘어 있었고 교종 또한 왕실의 후원을 받은 화엄종과 귀족 중심의 법상종으로 나뉘어 있었다. 의천은 '교관겸수'를 바탕으로 개성 흥왕사에서 교단통합운동을 하며 천태종을 도입하였고 이후 국청사를 세우면서 선종까지 통합하려 하였다. 천태종 개창은 교종에는 별 영향이 없었지만 선종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는데 이는 천태종으로 개종한 승려들 전원이 선종 승려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4]
의천의 출생과 출가[편집]
- 의천은 1055년 9월 28일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과 그 왕비 인예왕후(仁睿王后)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석후(釋煦), 또는 후(煦)였는데, 그의 이름자 후가 송나라 철종(哲宗)의 본명 후와 같은 글자라 하여, 이름 대신 자(字)인 의천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가 11세되던 해에 부왕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였다 한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였다. 문종은 경덕국사 김난원을 불러서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서 직접 의천을 삭발하게 했다. 일찍이 출가하여 불교승려가 된 경덕국사 난원은 의천의 외할아버지 김은부의 아들로, 의천의 외삼촌이며 원혜왕후, 원성왕후의 친정 오라비가 된다.
- 1065년(문종 19) 왕사(王師) 난원(爛圓)이 의천의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게 하였고, 그 뒤 영통사(靈通寺)에 있었으며, 13세에 우세(祐世)[2]의 호를 받고 승통(僧統)이 되었다. 1065년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승려가 된 이후에도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후에 경덕국사 난원이 입적하면서 그에게 법문(法門)을 계승하였다. 그는 승려이면서 불교학자로 당시 고려의 불교 종파에는 계율종(戒律宗), 법상종(法相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 선적종(禪寂宗)이 있었는데, 의천은 평생 불교 계파와 육종(六宗) 및 신라 시대의 선교양종을 두루 연구하여 불교학연구의 대가가 되었다. 또한 그는 외전(外典)인 육경(六經)과 칠략(七略) 등을 해석하여, 문종으로부터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廣智開宗弘眞祐世僧統)'의 법호를 하사받았다.
의천의 사상[편집]
- 의천은 지눌(知訥, 1158~1210)과 더불어 고려 불교를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속장경을 편찬하고, 송·요(遼)·일본 등과 교류하며 고려 불교의 수준을 국제적으로 높였다. 또한 화엄종(華嚴宗)과 법상종(法相宗)의 '성(性)'과 '상(相)'의 대립,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관(觀)'과 '선(禪)'의 대립을 뛰어넘어 '교관겸수(敎觀兼修)'와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새로운 기풍을 이루려고 하였다. 의천이 활동하던 고려 중기의 불교계는 화엄종의 영통사(靈通寺) 문중과 유식론(唯識論)에 기초한 법상종(法相宗)의 현화사(玄化寺) 문중이 교학(敎學)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다. 또한 신라 하대부터 내려온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대립도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단지 현실의 문제들만이 아니라 불교 이해와 관련된 이론적인 문제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성종(性宗)과 상종(相宗)의 대립이라고도 표현되었는데, 화엄종이나 선종이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마음의 본체를 중심으로 한다면, 법상종의 유식론은 현상의 분류와 분석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 의천은 화쟁(和諍)을 강조한 원효(元曉)를 매우 존경하였다. 의천은 '자은대사(慈恩大師)의 여러 주석은 오직 명(名)과 상(相)에 구애되었으며, 천태대사(天台大師)의 설법은 오직 리(理)와 관(觀)만을 숭상하였다. 비록 본받을 만한 글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여러 방면에 통달한 가르침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직 우리 해동보살만이 성(性)과 상(相)을 두루 밝혔고, 옛날과 오늘을 바로 잡아서 온갖 주장의 단서를 화합하고 일대의 지극히 공정한 논의를 얻었다'며 법상종과 천태종의 개조인 규기(窺基,)와 지의(智顗)가 각각 상(相)과 성(性)만 강조하는 데 비해 원효만이 성(性)과 상(相)을 겸하여 두루 밝혔다고 높이 기렸다. 심지어 원효를 인도 대승불교의 최고 사상가인 마명(馬鳴)이나 용수(龍樹)와 같은 반열로 섬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의천은 원효 사상의 전통을 기반으로 '성(性)'과 '상(相)'의 대립을 뛰어넘으려 하였다. 그는 '근세에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단박 깨달았다고 하여 방편과 소승의 교학을 업신여기다가 성상(性相)을 말하는 데 미치어서는 이따금씩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모두 겸해서 배우지 못한 허물 때문이다'고 하여 '성상(性相)'의 겸학(兼學)을 강조하였다. '상(相)'을 떠나 '성(性)'이, '성(性)'을 떠나 '상(相)'이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겸학(兼學)을 해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데, 당시 불교계는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여 중도(中道)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 의천은 습선(習禪)과 설선(說禪)을 구분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며 교(敎)을 배타시하고 선(禪)만을 강조하는 조계대사(曹溪大師) 혜능(慧能, 638~713) 이후의 남종선(南宗禪)을 비판하였다. 의천은 '옛날의 선은 교를 빌려 선을 닦았고(藉敎習禪), 오늘의 선은 교를 떠나 선을 말하니(離敎說禪), 선을 말하는 자는 그 이름에 집착하여 실제를 잊었고, 선을 익히는 자는 그 사유를 따짐으로 뜻을 얻는다'(別傳心法議靈後序)고 하였다. 곧 의천은 혜능 이후의 남종선을 '말로만 하는 선(說禪)'이라고 비판하며, 교(敎)를 빌려 선(禪)을 닦는 습선(習禪)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관(觀)을 배우지 않고 오직 경(經)만 배우면 성덕(性德)에 도달하지 못하며, 경(經)을 배우지 않고 관(觀)만 배우면 인과(因果)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정원(淨源)의 말을 들어 교관(敎觀)의 겸수(兼修)를 주장하였다.
-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데에는, 그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끼친 정원이 화엄종 법장(法藏)이 세운 5교(五敎)의 교판과 천태종(天台宗)의 지의(智顗)가 확립한 5시 8교(五時八敎)의 교판이 대체로 같다고 하여 화엄과 천태의 교학을 통일적으로 보았던 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화엄종과 법상종의 대립을 화해시켜 교단을 통합하려면 천태종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필요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동의 불법이 전래한 지 7백여 년에 비록 여러 종파가 펼쳐지고 많은 교가 퍼졌지만, 다만 천태의 한 가지가 밝은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新創國淸寺啓講辭)는 점은 오히려 교단을 통합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나아가 천태종은 좌선(坐禪)과 지관(止觀)의 수행을 중시하여 선종을 융화시킬 수도 있었다.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이루어진 의천의 천태종 개창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국청사(國淸寺)의 낙성 법회에는 숙종이 직접 참여했고, 다양한 종파의 고승들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선종의 종파인 법안종(法眼宗)의 승려들도 합류하여 선종 승려 가운데 상당수가 천태종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천태종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계대사 혜능 이래의 전통적인 남종선을 고수한 승려들은 자신들을 조계종(曹溪宗)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12세기 이후 고려의 불교를 5교(敎) 양종(兩宗)이라 부르게 되었다.
의천의 생애[편집]
- 의천은 송나라의 승려와 불교학자들과 서신으로 사상교류를 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숙종 때 주전론(鑄錢論)을 주장하여 사회경제 면에도 많이 공헌한 바 있고, 1098년(숙종 3) 왕자 징엄(澄儼)이 승려가 되자 그 스승이 되었다. 1097년 조카인 징엄을 제자로 받았다. 형인 숙종은 다시 자신의 다섯째 왕자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 1090∼1141)을 손수 삭발시켜 의천의 제자로 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1101년(숙종 6) 국사(國師)로서 활동하던 중 총지사(總持寺)에서 입적하였다. 1101년 10월 3일 고려 숙종으로부터 국사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병세는 깊어져,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7세, 법랍 36세였다. 숙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조회를 파하고 임시 공휴일(公休日)로 정하였으며, 친히 다비식을 한 뒤 영골사리(靈骨舍利)를 영통사 동쪽 산에 석실(石室)을 세워 안치하였다.
- 의천은 오관산(五冠山) 영통사 동쪽에 장례하였으며, 김부식(金副軾)의 명문(銘文)으로 된 비가 세워지고, 또 남숭산(南嵩山) 선봉사(仙鳳寺)에도 임존(林存)의 명문으로 해동 천태 시조 대각국사비가 세워졌다. 서호(西湖)의 승려 혜소(惠素)는 국사의 고제로서 후에 행록(行錄) 10권을 선집하였으며, 태백산인(太白山人) 융응(戎膺)은 국사의 적사(嫡嗣)로 법해(法海)의 용문(龍門)이라 호하였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 의천의 사후 그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23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3권,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실전, 없어지고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 등이 현전하여오고 있다.
의천에 대한 평가[편집]
- 의천이 활동하던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종과 교종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의천은 각 교단을 통합하여 고려 불교의 파벌갈등과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흉흉해진 민심을 다잡고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로는 불교전적을 정비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평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의천〉, 《나무위키》
- 〈의천〉, 《위키백과》
- 〈의천(義天,1055~1101)〉, 《두산백과》
- 〈의천(義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북큐레이터, 〈인물생생 우리 역사 고려 불교를 빛낸 의천〉, 《네이버블로그》, 2023-08-25
- 어헌경 기자, 〈의천스님 ‘교장(敎藏)’ 재결집한 고려대장경연구소〉, 《불교신문》, 2017-01-16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