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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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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승(慶大升)은 고려 무신정권의 세 번째 집권자이다. 고려 무신정권의 수립으로 혼란스러워진 조정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였고, 문신과 무신을 골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한 개혁 정책을 많이 실시하였다. 경대승은 아버지 경진이 권세를 이용해 빼앗은 토지를 백성들에게 돌려주었고, 항상 청렴결백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30세의 젊은 나이로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경대승 사후에 이의민이 집권하여 무신정권의 네 번째 집권자가 되었다.

개요[편집]

  • 경대승은 고려의 교위, 사심관, 장군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경대승은 1179년 정중부(鄭仲夫)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도방(都房)을 설치하고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고루 등용하여 무신정변으로 와해된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1183년 30살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본관(本貫)은 청주(淸州)이며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경진(慶珍)의 아들이다. 15세에 음서(蔭敍)로 교위(校尉)가 되고, 뒤에 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아버지인 경진(慶珍)이 권세를 이용해 남의 전지(田地)를 많이 빼앗았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부정한 재산이라며 전지 문서를 모두 선군도감(選軍都監)에 헌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 그가 죽은 뒤 도방(都房)은 해체되고 경주로 내려가 있던 이의민(李義旼)이 개경으로 올라와 실권을 장악하였다.[1]
  • 경대승(1154년~1183년)은 고려의 무관, 장군, 정치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경대승은 완력이 남보다 뛰어났고,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서 집안의 살림살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1179년(명종 9년), 정중부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1183년(명종 13년) 30세의 나이로 의문의 돌연사 하게 된다. 1179년(명종 9년) 26세에 당시는 무신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는데, 명종이 정중부(鄭仲夫) 일파의 무단 정치를 싫어함을 알고 그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을 결심을 하였다. 허승(許升), 김희조(金希祖)와 함께 거사를 일으켜,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鄭筠), 사위 송유인(宋有仁)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기존의 최고 권력기구인 중방을 무력화 시키고, 새로운 권력 집단인 도방을 신설하였다. 관리등용에 있어 문신과 무신을 고루 기용하고자 하였지만, 반란에 참가한 무신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같이 거사를 일으켰던 허승과 김광립이 제거되었다. 1181년(명종 11년) 28세에는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등의 무인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잦은 민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웠다. 신변 보호를 위해 도방을 창설하여 사병 100명을 거느렸지만, 1183년(명종 13년) 8월 4일 새벽, 술을 먹고 나서 취침하던 중 30세의 나이로 의문을 남긴 채 돌연사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다.[2]
  • 경대승은 고려의 무신. 무신정권의 제3대 집권자이나,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당시 지역에서 유서 깊은 군반 가문이었다. 부친인 경진은 무신정권의 제2대 집권자였던 정중부의 편에 서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다. 그 시절 경대승은 완력이 남보다 뛰어났고,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서 집안의 살림살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다. 1178년, 청주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 원래 청주 주민으로 수도 개경에 호적을 두고 살다가 청주로 이동한 사람들과 청주 토착민들 사이에 심한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격한 몸싸움으로 번져 100여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청주의 사심관으로서 대장군 박순필과 함께 파견되어 있던 경대승은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말았다. 경대승은 집권 4년 차인 1183년 불과 30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는 비운을 맞는다. 사망 원인에 대해선 주로 정신적 문제가 병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설이 많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이의민 세력이나 혹은 부하에 의해 암살당한 것 아니냐는 설도 제기하지만 일단 고려사에는 정중부의 꿈을 꾸고 병을 얻어 이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3]
  • 경대승은 본관은 청주(淸州).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경진(慶珍)의 아들이다. 일찍이 큰 뜻을 품고 가산을 돌보지 않았으며, 아버지 경진(慶珍)이 불법으로 탈취한 토지의 전안(田案)을 선군(選軍)에 바치고 하나도 취하지 않아 청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5세에 음서(蔭敍)로 교위(校尉)에 임명된 뒤 차차 벼슬이 올라 장군이 되었다. 1178년(명종 8)에 개경에서 살다가 낙향한 청주 출신 사람들과 원래 청주인(원주민) 사이에 분쟁이 생겨 100여 명이 죽게 되자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사심관(事審官)으로 파견되었으나, 그 일을 해결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1179년 평소 불만이 많던 집권 무신 정중부(鄭仲夫) 일파를 제거하고자 결심하고, 견룡(牽龍) 허승(許升) 등과 모의하여 정중부와 그의 아들인 정균(鄭筠)과 송유인(宋有仁)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집권 무신이 된 뒤에는 종전의 최고권력기구 기능을 하던 중방(重房)의 존재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사적 집단인 도방(都房)을 두어 정권유지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했으나 관리 등용에는 문무신을 고루 기용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아 여러 무신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여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경대승을 도와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는 데 공이 컸던 허승과 김광립(金光立)을 제거하였으며, 1181년에는 대정(隊正)을 지낸 한신충(韓信忠) · 채인정(蔡仁靖) · 박돈순(朴敦純)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섬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다. 경대승은 유언비어라 할지라도 잡아가두고 국문(鞠問)하는 등 형벌이 무자비했다. 집권 동안 도방의 무리라 일컫는 도둑이 횡행하고, 잦은 민란이 발생하는 등 사회가 어지러웠으며, 1183년 집권 5년여 만에 30세로 죽었다.[4]

경대승의 생애[편집]

  • 경대승은 1154년(의종 8년), 중서시랑평장사 경진(慶珍, 1125 ~ 1177)의 아들로 태어났다. 1168년(의종 22년) 15세에 음서제도로 교위(校尉)가 되었고, 뒤에 장군이 되어 아버지 경진이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군대에 바치고 청렴하게 지냈다. 1170년(의종 24년) 그의 나이 17세에는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추대하는 《무신정변》이 일어난다.
  • 경대승은 충주(忠州) 사람으로 개경(開京)에 적(籍)을 두고 살다가 청주(淸州)로 내려온 사람과 청주(淸州) 토착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하자, 청주(淸州)의 사심관(事審官)으로 그 일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책임으로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파면되기도 하였다.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무신(武臣)들의 횡포와 비리에 분개하여 정중부(鄭仲夫)와 그의 아들인 정균(鄭筠)을 제거하려 했다. 1179년(명종 9) 9월 허승(許升), 김광립(金光立) 등 무사 30여 명과 함께 정중부(鄭仲夫)와 그의 아들 정균(鄭筠), 사위인 송유인(宋有仁) 등을 죽이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 명종(明宗, 1131~1202)은 정균(鄭筠)이 차지하고 있던 승선(承宣)의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경대승(慶大升)은 문관(文官)이 맡아야 한다며 이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무신정변 세력을 제거하여 중방(重房)을 무력화시키고, 무신정변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고루 등용하였다. 신변 보호를 위해 도방(都房)을 설치하였고, 무신(武臣)의 동정을 감시하고,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엄격히 단속하였다. 정중부(鄭仲夫) 일당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허승(許升)과 김광립(金光立)이 폐단을 일으키자 1180년 이들을 제거하였고,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가리지 않고 비리를 저지르는 자를 처벌하며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1183년 30살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경대승과 이의민[편집]

  • 이의민(李義旼)은 고려 시대의 무신이다. 정중부의 난에 가담했고 의종 복위음모와 조위총의 난을 평정했다. 경대승이 죽은 후 무신 최고 집권자가 되었다. 본관 정선. 아버지는 소금장수, 어머니는 옥령사(玉靈寺)의 노비였다. 천민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하여 안찰사(按察使) 김자양(金子陽)에게 발탁되어 경군(京軍)에 편입되었다. 수박(手搏)을 잘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別將)이 되었다. 1170(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이어 장군에 승진하였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장순석(張純錫) 등의 의종 복위음모를 평정한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1174년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상장군에 올랐다. 1179년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죽이자 그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 경주에 은거해 있었다. 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이의민이 경주에서 난을 일으킬까 도읍으로 불러들였다. 공부상서(工部尙書)·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거쳐, 1190년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에 이르렀다. 참위설(讖緯說)을 믿고 역모(逆謀)할 뜻으로 명사들을 포섭하고 적도(賊徒)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 등과 은밀히 결탁하였으며, 벼슬을 팔고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였다. 아들들도 아버지의 권세에 의지하여 탐학을 자행했다. 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은 것이 계기가 되어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최충헌(崔忠獻)에게 살해되었다.
  • 경대승은 거사를 성공시킨 직후에도 이의민을 겨냥하여 '왕을 시해한 자'라고 하며 그를 제거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의민은 경주의 천민 출신으로 8척의 키에 탁월한 완력으로 경군에 선발되었다가 무신정변 때에 많은 사람을 죽여 출세한 인물이었다. 경대승의 거사 당시 이의민은 크게 겁을 먹고 군사들을 자기 집에 모아 대비하고 있었다. 곧이어 병마사로서 북쪽 변경에 나가 있을 때에는 경대승이 처형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접하고서, '내가 경대승을 죽이려고 했으나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누가 먼저 손을 써서 이렇게 한 것인가'라고 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경대승이 더욱 앙심을 품게 되자 이의민은 불안한 나머지 병을 핑계로 고향인 경주로 낙향해버렸다. 경대승 사망 직후, 그가 이끌었던 도방은 금세 해체되고 말았다. 원래 도방을 이끌었던 김자격(金子格)이 먼저 손을 써서 이들이 난을 일으키고자 모여 다닌다고 무고했던 것이다. 결국 모진 고문 끝에 도방의 무리들은 죽거나 멀리 귀양가게 되었다. 이로써 경대승의 세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경대승이 뜻밖에 일찍 사망한 후, 명종은 이의민이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킬까 겁을 먹고서는, 사자를 보내 그를 달래어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결국 이의민은 경대승의 뒤를 이어 무신집정자가 되었다. 같은 시기를 살면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두 라이벌의 운명이 엇갈렸던 것이다.

경대승에 대한 평가[편집]

  • 경대승은 고려 의종(毅宗) 8년(1154년)부터 명종(明宗) 13년(1183년)까지 생존한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무신정권의 세 번째 집권자이다. 그는 명종 9년(1179년) 26세의 나이로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중부(鄭仲夫)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약 4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집권하면서, 앞뒤 시기의 무신집정자들과는 차별되는 행보를 보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이의방(李義方), 정중부, 이의민(李義旼)을 비롯하여 최씨무신정권의 집권자들, 그리고 마지막 집권자였던 김준(金俊), 임연(林衍)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려사』 반역열전에 올라있는 것과 달리 경대승은 일반 열전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 『고려사절요』에서는 경대승의 죽음에 부쳐 그의 인물평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항상 무인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복고할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들이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 또 의종을 시해한 자를 치고자 하였으나 그 일이 어렵고 크기 때문에 은인자중하여 드러내지 않았다. 정중부, 송유인 등을 죽이자 왕이 속으로는 꺼리면서도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보여서 모든 주청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붙었으나 학식이나 용기, 지략이 있는 자가 아니면 문득 거절하니 무관들이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여기서는 경대승에게 복고의 뜻이 있었다고 평하고 있다. 그의 시대에 복고란 무신정변 이전의 상황으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무신정변 이후 10년 동안 고려의 정치와 사회를 무신들의 무분별한 권력투쟁과 탐욕스러움으로, 그리고 그에 맞선 지방민들의 반란으로 점철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불법으로 축재한 토지를 모두 돌려놓으며 스스로 복고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또한 화엄회(華嚴會)를 열어 무신정변과 김보당(金甫當)의 난 때에 희생된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문신들이 그를 중하게 여기며 의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당대의 평가가 후대에 『고려사』를 편찬할 때까지 이어져 그의 전기를 반역전이 아닌 일반 열전에 싣게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경대승은 뒷받침해줄 정치세력의 부재, 무신들의 집단적인 반발과 위협 등으로 권력을 강하게 행사하지 못한 채 요절함으로써 결국 짧은 집권 기간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경대승(慶大升,1154~1183)〉, 《두산백과》
  2. 경대승〉, 《위키백과》
  3. 경대승〉, 《나무위키》
  4. 경대승(慶大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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