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김유신(金庾信)은 삼국 시대 경산 지역에 부임한 신라의 유명한 무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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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김유신은 신라의 장군으로 삼국통일에 공을 세웠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이며,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의 증손이다. 조부인 김무력(金武力)은 구해왕의 막내아들로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으며, 백제의 동북지역을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4)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부친은 소판(蘇判)의 벼슬을 지낸 김서현(金舒玄)으로 그도 대량주(大梁州) 도독(都督) 등을 지내며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때에 백제·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모친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손녀 만명(萬明)이다. 김유신은 673년(문무왕 13)에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채색 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석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고 한다. 그는 금산원(金山原, 지금의 경주시 송화산으로 추정)에 매장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죽기 전에 군복을 입고 병기를 든 수십 명이 유신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으며, 김유신이 자신을 보호하던 음병(陰兵)이 떠난 것이라며 죽음을 예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의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은 712년(성덕왕 11) 김유신의 아내인 지조를 부인(夫人)으로 봉했으며, 해마다 1천석의 곡식을 주었다. 그리고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은 835년(흥덕왕 10)에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이 그를 흥호대왕(興虎大王)으로 추존했으며, 그의 묘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의 북동쪽 봉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은 조선 시대에도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높이 숭배되어 명종(明宗) 때인 1563년(명종 18)에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과 함께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에 배향되었다.[1]
- 김유신은 신라의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太大角干)이었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하고 당나라도 격퇴시켜 삼국 통일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주도하였으며, 진평왕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신하로서 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를 포함하여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관창, 사다함과 함께 신라의 3대 화랑이다.[2]
- 김유신은 신라를 상징하는 명장(名將)이다. 진평왕부터 문무왕까지 8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살며 5명의 신라 왕을 섬겼다. 옛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 김구해의 증손자이며 조부는 김무력, 부는 김서현이다. 골품은 진골이다. 성골 왕통의 단절로 인한 극도의 정치 불안정 속에서 약화된 신라군을 이끌고 재앙에 가까웠던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한 대규모 양면전쟁에서 몇 번이나 두 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가 하면 꾸준히 일어났던 서라벌 귀족들의 반란을 연거푸 진압하는 등 신라를 지켜내는데 큰 기여를 했고 무엇보다 군 사령관으로써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신라의 대영웅. 김유신이 활동한 시기의 신라는 진흥왕의 전성기가 끝나고 반복되는 실정, 외교적 고립, 신라 내부의 반대 세력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그런 신라를 존속시킨 핵심 인물로 넓게 보면 향후 수천 년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으로 이 사람의 존재가 없었다면 한반도 통일 국가의 성립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장수의 이미지가 강해서 묻히기는 하지만 정치가로서의 영향력도 상대등 직을 맡았을 정도로 매우 높았던 인물이다. 혈통이 확인된 인물들에 한해 상대등 역시 역대 3번째로 신라 왕가 외에서 맡은 인물이다. 더불어 조선시대 이전 한국사 인물 중 군주, 왕족이거나, 이에 준하는 국가 지도자급 인물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매우 드물게 한중일 정사 역사서에 모두 등장한다. 이는 장보고와 더불어 단둘 밖에 없다.[3]
- 김유신은 금관가야(金官加耶) 왕실의 후손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642년 백제군이 지금의 합천군(陜川郡)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켰을 때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어 수도인 경주 방어의 주역이 되었다. 현재 경산 지역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명소가 산재해 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한 구해왕(仇亥王)이다.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은 신주도 행군 총관(新州道行軍摠管)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聖王)을 죽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으로 소판(蘇判)·대량주 도독(大梁州都督) 안무 대량주 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으로 신라 왕실의 주요 인물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이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고 하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김유신조에는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이 추봉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561년(명종 16) 서악서원(西嶽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에 제향되었다. 한편, 경산 지역에는 압량군 군주를 지낸 인연으로 김유신과 관련된 명소가 산재해 있다. 홍주암(紅珠庵,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산55-10)은 소년 시절 중악(中嶽)에서 수련하던 김유신이 삼국 통일의 염원을 기도했던 곳이라고 한다. 경산 병영유적(慶山 兵營遺蹟)은 압량군 군주로 있던 김유신이 병사들을 훈련시킨 유적이고, 경산시 압량읍에 위치한 마위지(馬爲池)는 김유신이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만든 못이라고 한다.[4]
김유신의 가계[편집]
-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김유신이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등 일곱 별의 정기를 타고 태어나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출생과 관련해서 수미산(須彌山)의 꼭대기 33천의 천인(天人)이 신라에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억울하게 죽은 고구려의 점장이 추남(楸南)이 환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김유신(金庾信)이 655년(무열왕 2)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셋째딸인 지조(智照)와 결혼해 김삼광(金三光), 김원술(金元述), 김원정(金元貞), 김장이(金長耳), 김원망(金元望) 등 5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낳았으며, 이들 이외에 김군승(金軍勝)이라는 서자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지조(지소부인)와 결혼했을 때 김유신의 나이는 이미 61살에 이르렀으며, 그녀가 김유신이 죽은 지 40년 가까이 되는 712년(성덕왕 11)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이 모두 무열왕의 딸인 지조의 소생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밖에 삼국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김흠순(金欽純)이 그의 동생이며, 누이동생은 태종무열왕의 왕비인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곧 김유신은 문명왕후의 소생인 문무왕(文武王, 661~681)과 김인문(金仁問)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김유신의 생애[편집]
-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金庾信)은 15세 때인 609년(진평왕 31)에 화랑(花郞)이 되어 낭도를 이끌었는데 그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그리고 17세 때인 611년(진평왕 33)부터 중악(中嶽, 지금의 경주 단석산으로 추정]과 인박산(咽薄山, 지금의 경주 백운산으로 추정)에 홀로 들어가 수련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중악에서 수련을 할 때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에게서 삼국을 병합할 비법(秘法)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 김유신은 629년(진평왕 51)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큰 공을 세우면서 무용을 떨치기 시작했다. 당시 아버지인 김서현을 따라서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전했던 김유신은 신라군이 패전의 위기에 몰리자 적진으로 용감히 쳐들어가 적장을 죽여 신라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가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점령하며 신라를 압박해오자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軍主)로 임명되었으며, 644년(선덕여왕 13)에는 소판(蘇判)으로 벼슬이 오르고, 644년 가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등 7개 성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에는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을 공격해오자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임명되어 다시 출정하여 백제군을 패퇴시켰다. 647년(선덕여왕 16)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진압에 공을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왕이 머물던 월성(月城)에 큰 별이 떨어져 병사들이 동요하자 김유신이 한밤에 불붙인 연을 하늘로 띄워 별이 다시 하늘로 오른 것처럼 꾸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은 뒤에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해 겨울에는 백제가 무산(茂山)·감물(甘勿)·동잠(桐岑) 3개 성을 공격해오자 방어에 나서 수하인 비녕자(丕寧子)의 활약으로 백제군을 물리쳤다.
-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신라는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金春秋)를 당(唐)나라로 보내 원병을 요청했는데, 당나라 태종(太宗, 재위 626~649)은 파병을 약속했다. 압량주 군주로 있던 김유신은 648년에 대야성 수복에 나서 옥문곡(玉門谷)에서 대승을 거두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들을 642년에 대야성에서 죽은 김춘추의 사위와 딸인 품석(品釋)과 고타소(古陁炤)의 유해와 교환했으며, 다시 백제의 경내로 쳐들어가 악성(嶽城) 등 12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이찬(伊湌)의 벼슬에 오르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임명되었다. 김유신은 이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백제의 진례(進禮) 등 9개의 성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649년(진덕여왕 3)에는 좌평(佐平) 은상(殷相)이 이끄는 백제군이 신라의 석토(石吐) 등 7개 성을 공격해오자 도살성(道薩城) 아래에서 이들을 대파하였다.
강릉 화부산사 흥무왕 기적비[편집]
- 강릉 화부산사 흥무왕 기적비(江陵花浮山祠興武王紀績碑)는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교동의 화부산사 경내에 있는 김유신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흥무왕(興武王) 김유신(金庾信)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교동의 화부산사 경내에 있다. 비석은 1910년에 명주(강릉)지역에 잦은 말갈족이 침입하던 것을 막아준 김유신 장군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건립하였다. 비문은 후손 김영호(金榮灝)가 지었고, 김만배(金萬培)·김용배(金鎔培)·김장배(金墻培) 등이 글씨를 새겼다. 비석은 비좌(碑座), 비신(碑身), 비두(碑頭)로 이루어져 있다. 비좌와 비두는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비신은 청석(靑石)을 사용하였다. 전체높이는 239㎝이고, 비신은 높이 200㎝, 두께 21㎝, 너비 79㎝의 크기이다.
진천 길상사[편집]
- 진천 길상사(鎭川 吉祥祠)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사당이다. 1975년 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김유신(金庾信:595~673)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신라시대부터 김유신의 태(胎)가 묻힌 태령산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나라에서 제를 지내오다가 1408년(태종 8)부터 관행제(官行祭)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당이 소실되자 1851년(철종 2)에 정재경, 박명순(朴命淳) 등이 백곡면 가죽리에 죽계사(竹溪祠)라는 이름으로 사당을 재건하여 조감과 함께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죽계사가 철거된 이후 진천읍 벽암리 소흘산(所訖山) 아래 서발한(舒發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당을 짓고 계속 제향하였으나 1922년 홍수로 유실되었다.
장열사[편집]
- 장열사(壯烈詞)는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에 있는 사당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본래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 김일손(金馹孫, 1464~1498)과 인조 때 안주목사와 황주목사를 지낸 망헌(望軒) 김광립(金光立)도 함께 배향(配享)하고 있었으나, 김일손과 김광립은 두암사(斗岩祠)로 옮겨지고 현재는 김유신만을 배향하고 있다. 1850년 지역 유림들이 우치동 죽방촌에 사우를 건립하여 향사해 오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으며, 1906년 복원하였다. 1975년부터 사우(祠宇) 정화사업을 추진하여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사당과 내삼문, 화랑원을 완공하였고 1981년 전라남도와 광주시 지원으로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해마다 음력 9월 20일에 김유신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태흥사[편집]
- 태흥사(泰興祠)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591번지에 있는 김유신의 사당이다.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영정을 봉안하고 봄, 가을에 향사를 올리는 사당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591번지에 있다. 태인면에 거주하는 김해김씨 문중에서 1930년 음력 3월 3일 건립하였고, 1954년 김유신의 영정을 모셨다.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과 측면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김유신에게 향사를 올리는 사당은 태흥사 외에도 경주 서악서원, 진천 길상사, 강릉 화부사, 광주 장렬사, 고창 백양사, 무안 연계사 등 전국에 걸쳐 약 20곳이 있다.
경주 김유신묘[편집]
- 경주 김유신묘(慶州 金庾信墓)는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묘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674년(문무왕 14) 축조되었으며 넓이는 1만 4143㎡이다. 신라의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왔으며 《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문무왕은 채백(彩帛) 1,000필, 벼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내어 장사지내게 했으며, 비를 세워 공적을 새겨두고 수묘(守墓)하는 백성을 배정해주는 등 최고의 예를 베풀었음을 보아 그 무덤의 양식이 왕릉이나 다름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흥덕왕(興德王) 대에 이르러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봉하였다. 묘를 지키는 호석(護石)으로 12방위(十二方位) 주석(柱石)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했는데 머리 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 부분은 인상(人像)이며 모두 무기를 잡고 서 있는 모습들이다. 경주 왕릉에는 몇 군데 지신상(支神像) 조각이 보이나 조각의 우수함이나 상의 거대함에 있어 이 묘를 따를 수 없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김유신〉, 《위키백과》
- 〈김유신〉, 《나무위키》
- 〈김유신/평가〉, 《나무위키》
- 〈김유신〉, 《향토문화전자대전》
- 〈김유신(金庾信,595~673)〉, 《두산백과》
- 강시일 기자, 〈신라사람들 81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들〉, 《대구일보》, 2023-12-03
- 선애경 기자, 〈신라 ‘김유신 장군’, 문화 콘텐츠로 적극 현창하고 활용해야〉, 《경북신문》, 2023-01-26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