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정몽주(鄭夢周)는 고려 후기에, 문하찬성사, 예문관제학, 인물추변도감 제조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개요[편집]
- 정몽주는 고려 말의 문신, 외교관, 유학자이다. 본관은 연일,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삼은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 경상도 우항리와 고려 경상도 영천현을 거쳐 고려 개경에 거주하였던 그는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출사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 예의판서, 예문관제학, 수원군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개혁을 선택하였으며, 명나라에 외교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관직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과 익양군충의백에 이르렀다. 역성혁명파의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공양왕 4년) 4월 이성계의 문병차 돌아가던 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경상북도 우항리 출신이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는 사림파의 비조가 되었고 권우는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손녀는 정종의 서자 선성군의 부인 오천군부인이 되었고, 서손녀는 한명회의 첩이 되었다. 삼봉 정도전의 오랜 친구였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 놓고 갈등하던 중 정적으로 돌변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성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방원 일파에 피살되었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 1년) 태종의 손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追贈)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1]
- 정몽주는 고려 말의 학자이자 관료. 호인 포은(圃隱)으로 유명하다. 조선 건국 직전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다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학문·외교·경제·군사·정치·인품 모든 면에서 특출난 고려 말기의, 고려 최후의 보루. 선비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던 글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고려삼은(또는 여말 3은) 중 한 사람이다. 보통 여말 3은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꼽는다. 여말 3은에는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숭인 또한 정몽주의 제자다. 야은 길재는 이색과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길재는 조선 왕조를 섬기지 않았으나 영남학파의 영수인 김종직이 맥을 이어 조선 왕조의 후반기 정치사조를 지배한 사림파가 나왔다. 한마디로 조선 시대의 강력한 정치사조는 고려 최후의 충신을 학문적 비조로 삼았다. 살아서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 죽어서는 조선 성리학의 시조격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며 대학자로서의 학문적 완결성과 관료로서의 실무적 역량을 모두 갖춘 고려 말기의 명재상이다. 고려 말의 유능한 관리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며 성리학의 입장에서 고려를 개혁해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스승인 이색이 이르기를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 고려 시대 수도인 개성에 5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웠는데 이런 교육체제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했다. 주자가례를 실천한 최초의 인물이라고도 한다.[2]
- 정몽주는 고려 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정몽주(鄭夢周)의 본관은 영일.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며, 1337년 12월 영천군(永川郡) 치소 동쪽에 있는 우항리(愚巷里)에서 태어났다. 고조는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 정림(鄭林)이며, 증조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정인수(鄭仁壽), 조부는 직장동정(直長同正) 정유(鄭裕)이다. 아버지는 성균복응재생(成均服膺齋生) 정운관(鄭云瓘)이며, 어머니는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선관서승(膳官署丞) 이약(李約)의 딸이다. 부인은 경순택주(敬順宅主)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판사(判事) 이사빈(李士贇)의 딸이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니 아들은 참의(參議) 정종본(鄭宗本)과 성균사예(成均司藝) 정종선(鄭宗善)이며, 사위는 이장득(李長得)과 한승안(韓承顔), 성익지(成翼之)이다. 1401년에 태종이 명하여 정몽주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관대제학 겸예문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館大提學 兼藝文春秋館事) 익양부원군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432년 세종이 명하여 삼강행실도를 지었는데 공을 충신전에 넣었으며, 1452년에 문종이 명하여 정몽주를 마전(麻田)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였다. 1517년에 중종이 태학생 권전(權磌) 등의 상소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들에게 의논하고 명하여 정몽주를 문묘(文廟)에 종사하니, 실로 9월 17일 이었다. 또 예관(禮官)에 내려 분묘를 수리하고 초목을 금지하고 비를 세웠다. 1554년 영천에 사는 선비 노수(盧遂)·정윤량(鄭允良)·김응생(金應生)·정거(鄭琚) 등이 부래산(浮來山) 아래에 서원을 세우니, 곧 정몽주의 구거(舊居)이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매 명종이 편액을 내려 임고 서원(臨皐書院)이라 하고 사서·오경·통감·송감(宋鑑)을 내리고, 이어서 위전(位田)을 두어 봄가을로 사사(祀事)를 닦게 하였다. 묘소 아래에 묘재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또한 정몽주는 문묘(文廟)에 종사되고,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의 임고 서원(臨皐書院) 등 전국 20여 개 원사(院祠)에서 제향하고 있다.[3]
- 정몽주는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본관 영일(옛 연일).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 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4]
정몽주의 출생과 가계[편집]
- 포은 정몽주는 1338년 1월 13일(1337년 음력 12월 22일) 경상북도 영일현에서 영일 정씨(迎日鄭氏) 정운관(鄭云瓘, 다른 이름은 정거민(鄭居敏))과 영천이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는데, 얼마 후 청림동으로 이주하였다. 의종 때의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형양(滎陽)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진현관제학을 지낸 정종흥(鄭宗興)의 5대손이며, 그의 고조부 정림(鄭林)은 판도판서에 이르렀고, 증조부 정인수는 검교군기감을 지냈고 증 개성부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는 직장과 동정(同正) 등을 지냈으나 아버지 정운관은 성균관 재생(유생과 같은 의미)에 불과하였다.
- 정몽주는 고려말 등장한 중소지주 기반의 신진 사대부로써 여말 조선초 성리학의 시조격인 안향(경북 영주)의 출생지인 경북 중부 내륙 지방은 지방 향리 출신이자 중소 지주의 경제적 기반을 둔 신진사대부들의 요람(포은 정몽주-경북 여천야은 길재-경북 구미, 목은 이색-경북 영덕, 도은 이숭인- 경북 성주, 삼봉 정도전-경북 영주)격으로 학문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된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영천 이씨는 품에 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름을 몽란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부친 정운관이 꿈에서 중국의 주공(주나라 문왕의 아들, 정치가)을 만나는 꿈을 꾸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이름을 고칠 때 몽주라 하게 된다.
- 정몽주의 아버지는 성균관 재생이었으나 그의 가계는 대대로 관료 생활을 한 양반 가문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태종은 정도전, 남은을 제거한 후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피살당한 그를 의도적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격상시켰으며, 이는 사림파가 집권한 후에도 그의 문하생이라서 그에 대한 현창과 성인화가 계속되었다. 그 뒤 1990년대에 와서 성인화된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
정몽주의 생애[편집]
-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 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1387년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정몽주는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도모했다. 그리고 성리학에도 밝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회 윤리의 기반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에는 고려의 기존 법률 체계와 원나라의 법률, 1367년에 새로 제정된 《대명률(大明律)》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신율(新律)》을 편찬해 고려의 법률 체계를 재정비하려 했다. 나아가 외교와 군사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정몽주의 사후[편집]
- 1517년(조선 중종 12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중종에게 청원하여 정몽주의 비석을 세울 때 묘비문의 앞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암각하였다. 동생 정과는 1392년 4월 이성계의 반정세력에 의해 정몽주가 죽을 때 함께 화를 당했고, 동생 정도는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아들들에게까지 연좌시키지는 않았다. 정몽주가 죽은 지 9년 후인 1401년 태종은 권근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겸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했다. 자기가 죽인 사람을 영의정에 추증함으로써 자신의 포용력을 대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그의 문하생 중 길재와 이숭인은 많은 문하생을 길러냈는데, 이들은 지방의 유력 인사로 성장하여 후일 사림파의 기원이 된다.
- 조선 건국 초까지만 해도 정몽주는 간신(姦臣)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녀 중 한 명은 정종의 다섯째 서자와 결혼했고, 그의 제자 길재는 김숙자-김종직을 거쳐 사림파로 이어지고, 다른 제자 권우는 세종대왕과 정인지의 스승이 된다. 태종은 왕조가 확립된 후 왕실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규탄하면서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충성심을 유도할 목적으로 정몽주를 충절의 표상으로 끌어올렸다.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에게서 학문을 배운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서 그는 성자로 인식되었다. 정몽주의 사후 태종은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는 그에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하였다. 세종대왕은 왕자시절 정몽주의 문하생 권우에게서 수학하기도 하였으며, 세종대왕 즉위 후, 편찬한 《삼강행실도》 충신편에 정몽주가 수록되었다. 세종대왕은 부왕 태종 이방원에 이어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시켰다.
- 성종이 훈구파(공신 세력)의 견제를 위해 정몽주의 후신인 사림파를 발탁하면서 그를 성균관 문묘에 모시려는 운동이 나타나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고, 1555년(명종 10년) 정몽주의 고향인 경북 영천에 임고서원이 창건되고, 1573년 개성 숭양서원, 1576년 용인 충렬서원, 1588년 영일 오천서원 및 상주 도남서원, 울산 구강서원, 언양 반구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 1611년 참찬관 이자가 정몽주의 묘를 수리할 것을 건의했다. 중종은 예조 정랑 이순(李純)을 보내어 정몽주의 무덤에 치제를 했다. 퇴계 이황의 주도하에 영천 지역 퇴계 이황의 문인들인 김응생, 정윤량, 노수 등을 중심으로 부래산에 임고서원이 창건되었다. 퇴계 이황은 임고서원의 제문과 상향 축문을 지어 정몽주의 학문과 충절을 극찬했다. 그 뒤 임고서원은 1584년 '영천구각본', 1607년 '영천중간본' 등 3종의 '포은집'을 간행하여 발표하였으며, 임고서원 입구엔 포은의 어머니 영천 이씨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시조 '백로가'와 정몽주의 시조 ‘단심가’가 나란히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정몽주 선생 묘[편집]
- 정몽주 선생 묘(鄭夢周 先生 墓)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 있는 고려시대 문신 정몽주의 묘이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정몽주가 고려 왕실을 지키려 하다가 개성 선죽교에서 타살된 뒤 1406년(태종 6) 3월, 풍덕군(豊德郡)에 추장하였던 묘소를 지금의 자리에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묘소는 단분(單墳)으로 상석, 혼유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종전부터 있었으며 곡담과 둘레돌 등은 1970년에 추가 설치한 것이다. 1980년에는 묘역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신도비각, 재실(齋室) 등 대대적으로 정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가 있다. 묘표는 1517년(중종 12)에 태학들이 정몽주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에 세웠는데 앞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비문을 썼고, 글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으며, 전액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정몽주〉, 《위키백과》
- 〈정몽주〉, 《나무위키》
- 〈정몽주/생애〉, 《나무위키》
- 〈정몽주〉, 《향토문화전자대전》
- 〈정몽주(鄭夢周,1337~1392)〉, 《두산백과》
- 〈정몽주(鄭夢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명수 기자, 〈제20회 포은문화제 성료… 충절과 선비 정신 기리다〉, 《디스커버리뉴스》, 2024-10-06
- 송상호 기자, 〈포은 정몽주의 이야기, 선죽교 트릭아트로 만난다〉, 《경기일보》, 2024-10-03
- 심용훈 기자, 〈세종대왕 시절 과거 답안지 찾았다…주인공은 정몽주 집안 사람〉, 《머니투데이》, 2023-12-18
- 박상현 기자, 〈"정몽주 선죽교 사망설은 거짓…충절 인물로 신화화"〉, 《연합뉴스》, 2019-04-14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