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
지눌(知訥)은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은 정씨(鄭氏), 호는 목우자(牧牛者),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개요[편집]
- 지눌은 고려의 승려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해 불교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추구했다. 저술에 <진심직설>, <수심결> 등이 있다. 속성(俗性)은 정(鄭), 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다. 1158년(의종 12년) 동주(洞州, 지금의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鄭光遇),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지금의 황해도 연백) 출신의 조씨(趙氏)이다. 1165년(의종 19년), 8세의 나이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사굴산파(闍崛山派)의 종휘(宗暉)를 스승으로 삼아 출가하였고, 1173년(명종 3년)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지눌은 1210년(희종 6년) 3월 27일 53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다. 희종은 그에게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그의 묘탑에도 감로(甘露)라는 이름을 내렸다. 저술로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수심결(修心訣)>,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진심직설(眞心直說)>,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염불요문(念佛要門)>, <육조혜능대사법보단경발(六祖慧能大師法寶壇經跋)>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법어가송(法語歌頌)>, <상당록(上堂錄)>, <선각명(禪覺銘)> 등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제자로는 '유불일치설(儒彿一致說)'을 주장한 혜심(慧諶, 1178~1234) 등이 있다. 지눌은 고려 후기 혜능의 남종선(南宗禪) 전통을 계승한 조계종(曹溪宗)을 중흥(中興)시켜 이른바 '조계종의 개조(開祖)'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종파로서의 조계종의 명칭은 지눌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눌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불교의 최대 종파인 '대한불교 조계종'은 8세기 신라에 선종(禪宗)을 들여와 가지산파(迦智山派)을 개창한 도의(道義)를 개조로 하고 있으며, 지눌은 중천조(中闡祖), 고려 말기의 임제종(臨濟宗) 승려인 보우(普愚, 1301~1382)를 중흥조(中興祖)로 받들고 있다.[1]
- 지눌은 고려 중기 ~ 후기의 승려이다. 속성이 정(鄭)이고, 자호가 목우자(牧牛子)이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며, 탑호는 감로(甘露)이다. 동주(洞州: 서흥) 출생이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도의(道義)국사를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여기며, 보조국사 지눌을 조계종의 중천조(中闡祖: 분명하게 밝힌 조사)로 여기며, 태고국사 보우(普愚: 1301~1382)를 중흥조(中興祖: 중흥시킨 조사)로 여긴다. 1210년 4월 22일 승도를 소집하여 법복을 입고 당(堂)에 올라가 설법하다가 주장(柱杖)을 잡은 채 입적하였다. 희종은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와 감로(甘露)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왕이 문신 김군수(金君綬)에게 비문을 찬수케 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병화에 없어지고 귀부(龜趺)만 남은 것을 1678년(조선 숙종 4년)에 백암(栢菴) · 성총(惺聰) 등이 중건하였다.[2]
- 지눌은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은 정씨(鄭氏), 호는 목우자(牧牛者),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종래의 9산 선문을 조계종에 통합하는 등 교종을 중심으로 교선일치를 시도한 의천의 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한 인물이다. 의천의 천태종이 실패로 끝난데 반해 지눌의 법통은 현재 한국 불교에서 조계종이 주류로 자리 잡을 정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결사 운동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희종은 즉위하자 송광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현 송광사)라 고쳐 제방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를 내렸다. 이에 대해서는 이 시기 무신정권이 기존의 귀족 중심 교종을 밀어내고 선종 위주의 조계종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는 해석도 많다. 이후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해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입적하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라 하고 국사에 추증하였다. 지눌의 뒤는 유불일치설로 유명한 혜심이 이었다.[3]
- 지눌은 고려시대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성은 정씨(鄭氏)이고,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법명은 지눌이고, 시호는 보조국사이다. 지눌은 황해도 서흥(瑞興) 출신으로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이고,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의 조씨(趙氏)이다. 지눌의 부도(浮屠)인 감로탑(甘露塔)은 송광사 설법전의 오른쪽, 지금의 관음전 뒤뜰 언덕에 있다. 입적 7일 후 다비를 하였는데, 사리를 수습하니 큰 것은 30과이고, 작은 것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지눌의 탑비 비문은 고려시대 문신인 김군수(金君綏)가 1210년(희종 6) 공주지사(公州知事) 재임 당시에 찬한 것이다. 탑비는 3년 뒤 1213년(강종 2)에 건립되고 1678년(숙종 4) 10월에 중건하였다. 감로탑은 그동안 송광사 경내에서 몇 차례 자리가 옮겨졌으나 지금은 원래 위치에 있다. 1926년 해체 복원되면서 입구에 30개 돌계단을 축조하였고, 1927년에 감로탑 개수비(甘露塔改修碑)를 세웠다. 지눌은 1210년(희종 6) 음력 3월 27일, 세수 53세, 법랍(세속에서 나이와는 달리 승려가 된 뒤로부터 치는 나이) 46세로 입적하였다. 7일 후 다비를 하여 오색사리 수백 과를 거두어 수선사 북쪽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희종이 지눌을 국사(國師)로 추증하였으며,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甘露)라 하였다. 지눌의 진영은 보물 제1639호로 지정되어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다.[4]
수심결[편집]
- 수심결(修心訣)은 마음 수행에 관해 논한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저술을 말한다. 고려 시대 선승(禪僧)으로 이름 높았던 보조국사 지눌의 주요 저술로, 당시에 책이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으므로 간행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41세에 열람했던 《대혜어록 大慧語錄》이 인용되고 있고 그의 주요 이론인 경절문(徑截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최초의 저술인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과 경절문이 제창된 《법집별행록절요 法集別行錄節要》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지눌은 《결사문》을 통해 최초로 수행 이론을 제창하였는데, 그 이후의 수행 경험을 통해 《결사문》의 내용을 보완하고 이론적으로 발전시켜 만든 것이 바로 《수심결 修心訣》이라 할 수 있다. 《수심결》에서는 지눌의 고유한 사상인 돈오점수와 정혜쌍수 사상이 본격적으로 제시되고 있어, 그의 수행 이론의 발전 양상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
- 저술의 구성은 수행의 근본이 마음에 있다는 원칙을 밝힌 서론과 9개의 수행에 관한 문답으로 이루어진 본론, 그리고 부지런한 수행의 공덕과 그에 대한 당부를 담은 결론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론을 이루는 9가지의 질문은 ① 불성(佛性)의 소재, ② 수행자의 견성(見性) 공부와 신통지혜(神通智慧), ③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의미, ④ 자성(自性)을 깨닫는 방편, ⑤ 근기(根機)가 낮은 자의 견성(見性) 방편, ⑥ 공적령지(空寂靈知)의 마음(心), ⑦ 깨달음 이후에 점수(漸修)해야 하는 이유, ⑧ 정혜등지(定慧等持)의 의미, ⑨ 선오후수(先悟後修)로서의 수상문(隨相門)과 자성문(自性門) 수행의 선후문제 등이다.
- 돈오점수를 근본으로 하는 정혜쌍수의 수행 원칙이 체계적인 이론을 통해 제시되어 있다. 이전의 저술에서는 깨달은 이후의 수행에 관해 설명하면서 신해후수(信解後修)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수심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돈오점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한 번에 깨달은 뒤에 점차적인 수행을 통해 보완하여 온전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는 특유의 수행론 원칙을 세웠다. 또한 돈오점수라는 깨달음과 수행에 관한 기본 원칙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라는 두 가지 수행 방식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도 《수심결》의 독창적인 부분이다. 그는 선종의 선정(禪定) 수행과 교종의 지혜(智慧) 수행 방식을 돈오점수 과정과 연결시켜 각각 깨달음과 점진적 수행에서 고유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종파적 차원이 아닌 이론적 차원에서 진행된 보조국사 지눌의 독특한 선교일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지눌의 생애[편집]
- 지눌은 1158년 국자감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와 부인 조(趙)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에 사굴산파의 종휘(宗暉)를 은사로 하여 승려가 되어 구계(具戒)를 받고 일정한 스승 없이 도를 구하였다. 1182년(명종 12년)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승려로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많은 선배를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개경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해 10여 명의 동료들과 뒷날 결사(結社)를 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창평(지금의 담양) 청원사(淸願寺)에서 《육조단경》을 읽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은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지눌은 이를 계기로 혜능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 지눌은 1185년 속세를 피하고 도를 구하기 위하여 하가산(下柯山, 지금의 예천 학가산)의 보문사(普門寺)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대장경》을 열독하며 불도에 전력하던 중,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의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다'라는 구절과 이통현(李通玄)이 쓴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의 '몸은 지혜의 그림자'라는 구절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고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 지눌은 1188년 득재(得才)·몽선(夢船) 등과 팔공산 거조사(居組寺)로 거처를 옮겨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했다. 1190년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선포하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1197년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도하던 중, 시비를 일으키는 무리를 교화하지 못하자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가, 홀로 선정(禪定)을 닦았다. 그때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현실참여적인 보살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지눌의 사상[편집]
- 지눌은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며 선교합일(禪敎合一)의 이론을 세워 한국 불교의 독특한 전통을 닦았다. 그는 중국 불교와 구분되는 독창적인 선(禪) 사상을 체계화했으며,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눌은 무신정변으로 사회에 큰 혼란에 나타났던 시기에 살았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반란으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 지배층의 내분은 지속되었고, 각지에서 민란(民亂)도 끊이지 않았다. 왕실이나 문벌귀족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불교 사찰들도 정치적 갈등에 휩싸여 수행(修行)과 교화(敎化)라는 본연의 역할을 소홀히 하였고,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오랜 대립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결사운동을 일으켜 불교의 개혁을 추진하였고, 나아가 선종과 교종의 극단적인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사상의 체계화를 추구하였다.
- 지눌은 교(敎)의 입장에서 선(禪)을 포용하려 했던 의천(義天)과는 달리, 선(禪)의 입장에서 교(敎)를 융합하려 했다. 그는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라는 선종의 교의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바로 불성(佛性)의 드러남이라는 화엄(華嚴) 사상의 성기설(性起說)이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보았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고, 마음이 바로 부처이므로 깨달음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처인 본성이 바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부처의 말씀은 교(敎)가 되고, 조사(祖師)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선(禪)이 되었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그 근원을 궁구(窮究)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만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켜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가'라며 선(禪)과 교(敎)가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 지눌은 수행에서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여 선(禪)과 교(敎) 어느 하나에만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는 정(定)과 혜(慧)는 일심(一心) 위에 통일되어 늘 균형을 지녀야 된다고 보았는데, 교(敎)만을 강조하는 것을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라고 비판하였고, 선(禪)만을 강조하는 것을 '헛되게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라고 비판하였다. 교학(敎學)은 이것저것 가리는 분별지(分別智)에 사로잡혀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깨달음을 알지 못해 굴하기 쉽고, 선학(禪學)은 밀의상전(密義相傳)이라 해서 자칫하면 헛되이 앉아 졸기만 하거나 약간의 깨달음을 얻더라도 그 깊고 얕음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교(敎)와 선(禪)을 따로 나누어 보지 말고, 부처와 조사의 말씀과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여 참선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가 필요하며, 계율의 실천 또한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 지눌은 '마음이 곧 부처'라며 마음을 닦는 '수심(修心)'을 강조했다. 마음을 닦으면 바른 이치도 구현되고, 세상의 온갖 시비와 교(敎)와 선(禪)의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심(修心)에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중요하다. 먼저 마음의 바탕을 분명히 깨치고 나서 그 깨침에 의지해 꾸준히 닦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홀연히 나타난다. 깨달음 이후에는 모든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므로 이를 '돈오(頓悟)'라 한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었다고 해도 오랜 기간 지녀온 습관과 버릇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오랜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있듯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꾸준히 닦고 공을 쌓아야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이를 점수(漸修)라고 한다. 그러나 지눌은 점수(漸修)는 돈오(頓悟)를 바탕으로 하여야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닦음은 단순한 억압일 뿐이고, 처음부터 진 싸움이라는 것이다.
- 지눌의 사상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의 3문(門)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원돈신해문'은 이통현의 <신화엄경론>을 기초로 화엄(華嚴)의 교학(敎學)과 선(禪)이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곧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성적등지문'은 혜능의 <육조단경>을 기초로 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수행 방법을 제창한 것이다. 그리고 '간화경절문'은 종고의 <대혜어록>을 기초로 간화선(看話禪)의 수행을 나타낸 것이다. 곧 화두(話頭)를 참구하여 언어를 떠나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다. 이처럼 지눌은 간화선(看話禪)의 수행을 본격적으로 수용했으면서도 그것만을 강조하지 않고, 선교일치(禪敎一致)에 기초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였다.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지눌진영[편집]
-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지눌진영(大邱桐華寺普照國師知訥眞影)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보조국사 지눌의 초상화로, 대구 동화사에 있다. 2010년 2월 24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1780년(정조 4) 조성된 순천 송광사의 보조국사 진영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보아 두 작품이 동일한 초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섬세한 필치의 인물 묘사, 무채색에 가까운 색채 표현 등의 제작기법을 볼 때 송광사 그림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 시기는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반으로 추정한다.
- 초상화는 비단 두 폭을 잇대 만든 화폭에 그린 채색화로, 크기는 가로 77cm, 세로 146cm이다. 그림 속 지눌은 긴 지팡이를 쥐고 몸을 오른쪽으로 약간 튼 채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다. 흰색 장삼과 가사를 입고 얼굴은 뼈대가 드러날 만큼 마른 모습으로 표현하여 검소함을 강조하였다. 짙은 갈색 배경과 무늬 없는 백의로 화면은 전체적으로 차분한 느낌이지만 가사의 녹색 띠와 금빛 고리, 녹색 신발과 붉은 발받침이 화면에 생기를 주고, 모란문·당초문·귀갑문으로 세밀하게 장식된 나전칠기 의자가 특징적이다. 필선은 유연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화면 좌측 상단에 '願力受生海東佛日普照國師(원력수생해동불일보조국사)'라는 제목이 쓰여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고승 진영들은 대부분 18~19세기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그보다 앞선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여러 고승 진영 가운데 작품성도 뛰어나 보존가치가 높다. 2010년 2월 24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지눌〉, 《위키백과》
- 〈지눌〉, 《나무위키》
- 〈지눌〉, 《향토문화전자대전》
- 〈지눌(知訥,1158~1210)〉, 《두산백과》
- 책방상궁, 〈지눌은 수선사 결사운동을 했다고〉, 《네이버블로그》, 2024-08-22
- 박성천 기자,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 국보 지정〉, 《광주일보》, 2024-05-27
- 이지윤 기자, 〈보조 지눌 간행한 고려 목판본 ‘정법안장’ 찾았다〉, 《법보신문》, 2023-12-07
- 북극성, 〈지눌 대사의 말씀 : 부처는 곧 마음〉, 《네이버블로그》, 2022-09-16
- 김형찬 기자, 〈(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 송광사와 지눌〉, 《동아일보》, 2009-09-18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