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정선(鄭敾)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개요[편집]
정선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났고,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저서에 《도설경해(圖說經解)》가 있고 그림 작품으로는 《입암도(立巖圖)》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노송영지(老松靈芝)》 등이 있다.
정선은 심사정·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양반으로서 중인(中人)들이 일하는 도화서 화원이 되었을 리 없으며, 41세 때인 1716년(숙종 42) 종6품의 관상감(觀象監) 천문학겸교수(天文學兼敎授)로 첫 관직에 올랐다는 것이 통설이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단절되었다.[1]
정선의 생애[편집]
정선(1676년 ~ 1759년)은 조선의 화가,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1]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관직에 나갔다.
20세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고 이후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여행을 즐겨 금강산 등 전국 명승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과 함께 삼재(三齋)라고 불렀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하여 암벽(岩壁)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당대에 그쳤다. 문재(文才)가 없었던 탓으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落款)만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는 것이 이채롭다. 정선의 그림에는 다채로운 숨은 그림들이 아주 많았다.
정선의 화적[편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입암도(立巖圖)>, <혼혼해색도(混混海色圖)>,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선인도해도(仙人渡海圖)>, <산창유죽도(山窓幽竹圖)>, <의송관란도(倚松觀瀾圖:扇面)>, <노산폭포도(盧山瀑布圖)>,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청풍계도(淸風溪圖), <청하읍성도(淸河邑成圖)〉 또 개인 소장의 <금강산 정양사도(金剛山正陽寺圖)>, <해금강도(海金剛圖)>, <노산초당도(盧山草堂圖)>, <통천 문암도(通川門巖圖)>, <봉래산 불정대도(蓬萊山 佛頂臺圖)>, <석굴암도(石窟庵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전도(金剛全圖)>, <송하노승도> 외에 다수가 있다.
정선의 작품세계[편집]
회화 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水墨畫法)이나 채색화(彩色畫)의 맥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筆墨法)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예를 들면, 삼성미술관(三星美術館) 소장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는 인왕산의 둥근 바위 봉우리 형태를 전연 새로운 기법으로 나타내었다. 즉, 바위의 중량감을 널찍한 쉬운 붓으로 여러 번 짙은 먹을 칠하여 표현한다.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의 「통천문암도(通川門巖圖)」에서는 동해안 바위 구조를 굵직한 수직선으로 처리하여 세밀한 붓놀림이나 채색 · 명암 등 효과를 무시하면서도 물체의 외형적 특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두드러진 붓 쓰임의 한 예는 서울 근교나 해금강은 물론 한국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의 묘사법이다. 몇 개의 짧은 횡선과 하나의 굵게 내려긋는 사선(斜線)으로 소나무의 생김새를 간략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린다.
삼성미술관 소장의 1734년 작 「금강전도(金剛全圖)」(130.7×95㎝)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을 하나의 큰 원형 구도로 묶어서 그렸다. 이는 기법상 천하도(天下圖)라는 전통적인 지도 제작 기법에 근거하며, 금강내산을 한 떨기 연꽃 또는 한 묶음의 보석 다발로 보는 종래의 자연 묘사시에서 조형적 원리(造形的原理)를 따오는 기발한 착상이다. 우선, 원형을 대강 오른쪽의 골산(骨山: 금강내산의 화강암 바위로 된 삐쭉삐쭉한 모습)과 왼쪽의 토산(土山: 금강내산의 수림이 자라는 둥근 멧부리)으로 구분하되, 골산은 예리한 윤곽선으로, 토산은 그의 독특한 침엽수법(針葉樹法)과 미점(米點)으로 묘사한다. 그다음 이 원형 외곽을 엷은 청색으로 둘러 여타 공간을 생략함으로써 산 자체만을 돋보이게 한다.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은 원의 중심이 되는 만폭동(萬瀑洞)에 일단 모이게 하여 구도상의 중심을 이룬 다음, 화면의 앞쪽으로 흘러 장안사(長安寺) 비홍교(飛虹橋)를 지난다. 이 그림은 실제의 자연을 새로 해석하여 조형화한 좋은 예이며, 오른편 위쪽에 쓴 제시(題詩)의 내용과 형태가 일치한다.
정선의 회화 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아주 다양하여 정밀 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寫意畫: 묘사 대상의 생긴 모습을 창작가의 의도에 따라 느낌을 강조하여 그린 그림)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 준다. 이 가운데 특히, 우리 주위에서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구체적 자연을 특징짓는 기법이 독창적인 면이다.
정선의 창의력은 그가 즐겨 하였다는 역(易)의 변화에 대한 이해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림의 소재 · 기법 어느 것에나 구애됨이 없이 소화하였으며, 심지어 지두화(指頭畫)까지도 실험하고 있다. 또한 문인들과의 가까운 교류와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 등 중국 고전 문학과 사상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을 조형 세계에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미 청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시화첩(詩畫帖) 같은 것은 선비들 간에 시 짓고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 놀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실경 산수화를 다루는 경우에는 시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이루어질 때도 있다.
정선은 노론의 명문인 안동 김씨네와의 관계에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상과 우수한 수장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김창흡(金昌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파벌에만 치우치지 않은 매우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노송영지[편집]
노송영지(老松靈芝)는 조선 시대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수묵화이다. 힘찬 위용의 노송과 그 아래에서 자라는 분홍빛 영지를 소재로 삼아 그린 작품이다. 1755년에 제작되었다. 겸재 정선이 80세의 나이에 그린 대작으로, 제작연도가 확실한 정선의 세 작품 중 하나이다. 작품에 '乙亥秋日 謙齋八十歲作(을해추일 겸재팔십세작)'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박연폭포[편집]
박연폭포(朴淵瀑布)는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鄭敾:1676∼1759)의 작품. 작품의 크기는 세로 119.4㎝, 가로 51.9㎝이며,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작품이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실경을 즉물적으로 사생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임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금강전도》《인왕제색도》와 함께 겸재의 3대 명작으로 손꼽힌다.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박연폭포의 물줄기가 힘차게 그려져 있다. 폭포는 화면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곳에 그려졌으며, 그 오른쪽에는 육중한 바위 절벽이 자리 잡고 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흰 물줄기를 강조하기 위하여 양옆 벼랑은 짙은 먹으로 겹쳐 칠하여 강약의 대비가 한층 고조된다. 폭포 아래쪽에는 정자와 그 옆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그려져 있고 폭포 위 절벽 위에는 성문이 그려져 있어, 화면 아래위 전체적으로 역동성이 느껴진다.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켜 단순한 사실성을 뛰어넘는 겸재의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구학첩[편집]
구학첩(邱壑帖)은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의 화첩. 겸재 정선(鄭敾)의 나이 62세 또는 63세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화첩이다. 정선의 화첩은 그동안 36세 때부터 74세 때까지 제작한 총 12권이 알려져 왔는데, 이 가운데 3권만 발견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남아 있다. 《구학첩》은 이 12권에는 들어가지 않는 새로운 화첩으로, 13권째 화첩에 해당한다. 2003년 11월 고서화 전문화랑인 학고재에서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충청북도 단양 지역의 진경산수를 그린 화첩으로, 공개된 그림은 단양삼경 3폭이다. 3폭은 단양 읍내의 정자를 그린 〈봉서정(鳳樓亭)〉, 도담삼봉을 그린 〈삼도담(三嶋潭)〉, 단양팔경 가운데 하나를 그린 〈하선암(下仙岩)〉이다. 그림 옆면에는 정선이 자필로 적은 제목이 있다. 정선의 그림 가운데 충청도의 실경산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구학'은 언덕과 골짜기라는 뜻으로, 자연 또는 산수를 일컫는다.
정선에 대한 평가[편집]
정선은 선비나 직업 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겸재파 화법(謙齋派畫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을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이어가게 하였다. 이들 중에는 강희언(姜熙彦) · 김윤겸(金允謙) · 최북(崔北) · 김응환(金應煥) · 김홍도(金弘道) · 정수영(鄭遂榮) · 김석신(金碩臣)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고 있다.
정선에 관한 기록은 어느 화가보다 많으며 작품 수도 가장 많다. 그러나 그가 지었다는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책과 유고(遺稿) 수십 권은 전하지 않으며, 자작시나 화론(畫論)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를 더 깊이 연구하는 데 아쉬움을 주고 있다. 또한 초년기의 작품이 거의 밝혀지지 않아 화가로서의 생애를 전부 조명하는 데 공백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정선(鄭敾,1676~1759)〉,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정선(鄭敾,1676~1759)〉, 《두산백과》
- 〈정선 (화가)〉, 《위키백과》
- 〈정선 (鄭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아트, 〈(그림이야기)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다채롭게 담아냈던 화가 정선의 <노재상한취도>〉, 《네이버블로그》, 2020-04-29
- 임기상 기자, 〈전재국이 갖고 있다는 진경산수화의 화가 '겸재 정선'은 누구?〉, 《노컷뉴스》, 2013-08-21
- 〈정선(화가)〉, 《나무위키》
- 팅커벨, 〈조선의 천재 화가 겸재 정선도 반한 철원의 삼부연폭포〉, 《네이버블로그》, 2024-07-27
- 부산소이치, 〈겸재정선미술관 :: 강서구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을 말하다!(강서구 가볼만한 곳)〉, 《네이버블로그》, 2024-03-04
- 김종혁 기자, 〈국가유산청, 겸재 정선의 초기작 '정선 필 북원수회도첩' 보물 지정〉, 《매일뉴스》, 2024-06-28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