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악
왕산악(王山岳)은 고구려의 음악가로 거문고를 제작하였으며 또한 거문고 연주의 대가이다.[1]
개요[편집]
왕산악은 고구려의 거문고 연주자로 우륵, 박연과 함께 한국 삼대 악성(樂聖)의 한 사람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롯한 일부 문헌에서는 왕산악이 거문고를 만든 정확한 시기(양원왕 시대)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양원왕 이전에 건립된 안악 3호분, 무용총과 같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거문고 원형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왕산악을 예전부터 존재했던 거문고의 원형을 개조한 연구가·작곡가로 추측하기도 한다.[2]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晉)나라에서 보낸 칠현금을 개량하여 새로운 현악기를 만들었는데, 그 개량된 악기가 바로 오늘날의 거문고(玄琴)이다. 357년에 축조된 안악(安岳) 제3호분 벽화에 그려진 거문고의 연주모습이나, 집안(集安)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거문고의 연주 모습이 그러한 추정의 근거가 되는 고고학자료들이다. 그리고 고구려에 칠현금을 보낸 진나라는 서진(西晉, 265∼316)이 아니라 동진(東晉, 316∼419)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거문고[편집]
거문고는 낮고 중후한 소리부터 높은 소리까지 넓은 옥타브의 소리를 내는 한국의 전통 현악기이다. 현학금(玄鶴琴),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한 악기 분류법 중 사부(絲部)에 속한다. 통나무 통에 명주실 여섯을 매어 술대로 뜯는 악기로, 줄풍류를 비롯하여 가곡반주·산조에 쓰인다. 소리는 깊고 꿋꿋하며 장중하고 남성적이어서 예로부터 백악지수(百樂之首)라 하여 선비들이 음악의 도를 닦는 그릇으로 소중히 여겨 왔다. 본래 4현 17괘였으나 지금은 6현 16괘로 바뀌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산악(王山岳)이 중국 악기인 칠현금(七絃琴)을 개조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다. 칠현금은 있으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왕이 슬퍼하자, 왕산악이 그 주법을 바꾸고 100여 곡을 작곡하여 바치며 왕 앞에서 연주하니, 이윽고 검은 학이 날아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현학금(玄鶴琴)'이라 부르다가, '검은(학)고', '거문고'로 불린다고 한다.
진나라 이전 고구려 고분벽화에 거문고 원형으로 보이는 악기가 있으므로 거문고는 그 이전부터 원형이 고구려에 있던 것 같다고 하는 설도 있다. 거문고는 신라에 전해져서 신라인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에서 50년 동안 수련한 끝에 30곡을 지어 속명득(續明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선생에게, 귀금선생은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에게, 안장은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극종은 7곡을 짓고, 극종 뒤에는 세상에서 거문고를 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왕산악이 지은 백여곡은 곡명도 전해지지 않으며, 옥보고가 지은 상원곡(上院曲)·중원곡(中院曲)·하원곡(下院曲)·남해곡(南海曲) 등 30곡은 이름만 전한다.
거문고 명칭이 현학금에서 나왔다는 《삼국사기》 기록과는 별도로, '거문고'는 '검은고'로 고구려금(高句麗琴)이라고 해석하는 설도 있다. 고구려의 옛 이름인 '검', ‘곰’과 현악기를 뜻하는 '고'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로서 '고구려의 현악기'라는 뜻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밤나무(뒷판)를, 대추나무(괘) 붙여서 만든 울림통 위에 명주실을 소나무(지름 약10센치 정도로 둥글게 만든 막대모양)에 감아서 쩌서내 만든 6줄(絃-문현, 유현, 대현, 괘상청, 괘하청, 무현)을 맨다
칠현금[편집]
<<신라고기(新羅古記)>>에 따르면,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이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지만, 연주하는 법을 몰랐다고 한다. 이에 나라에서는 칠현금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구하였는데, 당시 제이상(第二相)으로 있던 왕산악이 칠현금을 개량하여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100여 곡을 지어 연주하였다. 이때, 현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으므로 이 악기를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고, 이후에는 현금(玄琴)이라고도 불렀다.(<<삼국사기(三國史記) 권 32) 고구려에 칠현금을 보낸 진(晉) 나라를 동진(東晉 316~419)으로 볼 경우 왕산악의 연대는 약 4세기 경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안악3호분· 무용총·장천1호분 등의 벽화에서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이는 악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왕산악과 거문고[편집]
한 악기가 있다. 그의 나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육백 살 이상이다. 온갖 영욕을 지켜보며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악기의 모양이나 소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온갖 고초를 겪었어도 변치 않는 사람과 같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 악기의 모양이나 소리를 함부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 악기는 거문고이다.
거문고는 고구려의 왕산악이 만들었다. 당시 고구려의 제2상 벼슬을 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왕산악이 거문고를 만든 이야기는 『삼국사기』 「악지」에 전한다. 중요한 것은 왕산악의 역할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진나라에서 악기를 보내왔다고 했지만 왕산악이 살던 시기 이전에 이미 우리 땅에는 거문고와 유사한 모양의 '고'라는 악기가 있었다. 왕산악은 그 악기를 개량해서 거문고를 만들었다. 고구려인들의 정서에 적합한 악기로 꾸몄을 것임에 분명했기에 거문고에는 왕산악의 고민의 흔적이 묻어 있다.
왕산악이 만든 거문고의 구조와 모양은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통구 무용총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신선인 듯한 이가 사뿐하게 앉아 무릎 위에 악기를 올려놓고, 오른손으로는 방금 현을 내려친 듯, 왼손으로는 날렵하게 괘를 짚고 있는 그림이다. 네 줄과 열 네개의 괘로 되어 있는 악기이다. 이후 어느 무렵 거기에 두 줄이 더 얹어져 여섯 줄이 되고, 괘 또한 두 개가 더 추가되어 현재의 거문고 모양으로 발전하였다.
왕산악이 만든 거문고에 고구려인들의 성정이 담겨있다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가 고구려인의 웅혼한 기상을 그 악기에 담고자 했을까. 광활한 대륙을 누볐던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투영시키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거문고의 소리는 꿋꿋하기 그지없다. 술대로 명주실을 내려칠 때 나는 둔탁한 소리에서는 그 악기를 통해 고구려를 노래하고자 했던 왕산악의 정신이 살아나는 듯하다. 이후 거문고는 일본으로도 전해졌다. '군후' 또는 '백제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거문고는 백악지장(百樂之丈)으로 자리하고 있다.
3대 악성[편집]
'악성(樂聖)'은 '악지성인(樂之聖人)'의 줄임말이다. 음악의 성인이라 이를 만한 뛰어난 음악가라는 뜻이다.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 조선의 박연, 이 세 사람을 한국의 3대 악성(樂聖)이라 부른다. 언제, 누가 이들에게 '악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이 그러한 호칭에 걸맞은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왕산악은 거문고를 만들었고, 우륵은 가실왕이 만든 가야금의 음악을 만들고 지켜냈으며, 박연은 세종 때 음악을 정비하여 조선 전기의 음악을 일정한 수위에 올려놓았다. 세 사람 모두가 시대를 달리하고 태어났지만 음악 분야에 정통한 인물, 프로페셔널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들이 악성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문가’라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투철함 때문이었다.
우륵은 가야 말기 가실왕의 명을 받고 12월을 상징하는 12현의 가야금을 만들었으며, 가야금 연주곡인 '가야 12곡'을 지었다. 또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이후 신라에 가야금을 전수하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의 음악가로 진나라의 악기인 칠현금에 능했던 왕산악은 1백여 악곡을 짓고 칠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다. 박연(1378~1458)은 조선 세종 때의 음악가로 악기를 개량하고 음계를 조정하였으며 향악 대신 아악을 사용하게 하는 등 궁중음악을 정비하여 한국 고대음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왕산악(王山岳,?~?)〉, 《두산백과》
- ↑ 〈왕산악〉,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왕산악(王山岳,?~?)〉, 《두산백과》
- 〈왕산악〉, 《위키백과》
- 〈왕산악 (王山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왕산악〉, 《나무위키》
- 어이무사10, 〈왕산악과 거문고〉, 《네이버블로그》, 2018-03-27
- 국악이, 〈(국악알기) 우리나라 3대 악성 2번째 이야기, 고구려의 왕산악에 대하여〉, 《네이버블로그》, 2020-04-16
- 국보, 〈삼국 시대의 향가, 시가 및 왕산악, 우륵 등 음악의 발전〉, 《네이버블로그》, 2024-07-12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