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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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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유비(중국어:劉備liú bèi)는 중국 후한 말의 군웅이자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재위 221∼223)이다.

개요[편집]

유비는 관우 ·장비와 결의형제 하였으며,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맞아들였다. 220년 조비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를 받아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유비는 탁군 탁현(지금의 허베이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이 고향인 사람으로, '한나라의 황손'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표현이지만, 그는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은 부처의 귀와 그 밖에 특이한 모습을 조합하여 삼국시대 이후 기나긴 세월 동안 민중의 바람이 만들어낸 영웅의 모습이다.

222년 장비가 그의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되어 그의 목을 가지고 오나라로 달아나자 유비는 형주의 탈환과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 손권을 공격하였다. 이릉(夷陵)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白帝城)에서 후사를 제갈량에게 위탁하고 223년 4월 6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1]

유비의 생애[편집]

유비는 자 현덕(玄德). 묘호 소열제(昭烈帝). 전한(前漢) 경제의 황자(皇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盧植)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公孫瓚)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 하지 않고 호협(豪俠)들과 교유했으며, 이때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인연을 맺어 《삼국지연의》에서는 도원결의라는 고사로 이들의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군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적으로 안희현위라는 벼슬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지위는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고 적군에게 패해 달아났다가 그 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원소(袁紹)와의 대전에서 승리하여 공을 세웠다. 조조(曹操)와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하지만 여포(呂布)의 공격으로 서주(徐州)를 빼앗기고 그와 대립하게 되며 조조의 도움으로 여포를 물리친다.

유비는 196년 원술(袁術)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鎭東將軍宜城亭侯)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하였다. 원소와 조조가 관도대전(官渡對戰)에서 전쟁을 시작하자 원소와 동맹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하게 되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로 가서 객장(客將)이되었다. 이 무렵 삼고초려로 제갈량(諸葛亮)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조조 휘하의 하후돈과 우금이 유표를 공격해오자 이를 물리친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는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유비는 오나라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전투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漢中) 침입을 기도하자, 두려움을 느낀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제갈량, 장비, 조운, 방통 등과 함께 익주(益州)로 갔다. 하지만 유장이 군수물자를 내어주지 않고 배신하자 그를 항복시키고 촉(蜀)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유비의 백말을 바꿔탄 방통이 낙봉파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유비 대신 사망하였다. 215년 형주 땅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게 넘기게 된다. 219년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으나 손권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된다.

손권은 위나라의 침공을 맞이해 백제성에 머물고 있는 유비가 다시 공격할 것을 우려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고 이에 유비가 응답하였다. 223년 4월 관우, 장비의 사망과 이릉전쟁으로 인해 병이 심해진 유비는 제갈공명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을 보좌로 삼고 영안궁에서 63살의 나이에 붕어(崩御)하였고,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되었다.

유비의 후손[편집]

263년 촉한은 멸망했다. 그와 함께 유선과 그의 일곱 후손들은 모두 위나라 내지(內地)로 옮겨졌다. 그 후, 유선의 6남인 유순(劉恂)이 안락공직을 이었으나 영가의 난에 휘말려들어 유비의 적자손들은 절멸당하였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동진(東晉)의 장수 환온(桓溫)은 성한을 공략, 멸망시켰는데 도중에 환온을 따라온 역사가 손성은 유비의 증손자이자 마지막 후예인 유현을 만났다고 한다. 그 후 유현의 소식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손은 중국 각지에 퍼져 촉한 소열황제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유비 숭배[편집]

유비는 사후 여러 정치적 이유로 유교적인 가치관에 따라 낭만화되었다. 북중국을 정복한 전조의 건국자이자 흉노인 유연이 자신의 미약한 정당성을 보강하기 위해 유씨를 근거로 내세우면서 첫 씨앗이 뿌려졌다. 그러나 육조에서 수, 당나라를 거쳐 북송 대까지 낭만화는 비교적 미비하였다.

북송이 멸망하고, 한족 정권이 전통적인 중화의 영역인 북중국에서 밀려나 남부로 쫓겨난 남송대에 이르러 눈에 띄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지식인과 대중 양쪽에서 "우리는 악한 적에 의해 밀려났으나, 여전히 천하의 적법한 통치자다."라는 정통성 관념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정통성'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유비와 촉한은 주요한 역사적 설명들이 왜곡될 정도로 강하게 미화되었다. 원나라 대에 삼국지평화와 같은 초기 소설이 출현하였고, 명 초기 인물인 나관중이 소설 <삼국지연의>를 저술하며 유비를 주인공으로 삼아 유교적 덕목인 인의의 화신으로 묘사하였다. 이런 묘사가 일반화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비의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현대 동아시아에서 유비와 그의 충직한 신하들은 중요한 문화적 상징이다. 21세기 현재에도 이들을 다루는 문화 상품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으며, 주요 행적지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현대 사학계에서는 긴 시간 동안 낭만적인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유비라는 인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이 어려워진 점도 지적되고 있다.

촉한 건립[편집]

220년(위나라 황초 원년) 위왕 겸 대장군 대 승상 조비(曹丕)가 한 헌제에게 강제로 선양 받아 황제가 되었다. 여기서 촉서 선주전과 화양국지에 따르면 헌제가 선위한 후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촉에 전해졌다고 한다. 촉은 와전된 소문을 바탕으로 220년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헌제에게 올렸다. 그러나 실제로 헌제는 234년까지 생존한 뒤 자연사한 바가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갈량은 유비에게 황제로 즉위하도록 권했고, 221년 4월 마침내 유비는 황제로 즉위했다. 연호를 장무(章武)로 하고,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세웠다.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해한 것에 분노하여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었고, 장비마저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당한다. 결국 유비는 황제에 오른 이후 직접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를 강하게 의식한 여러 신하들이 간했으나 유비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222년(장무 2년) 2월,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무릉에 다다른다. 유비는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여 오계 소수민족을 회유하고, 진북장군 황권(黃權)에게 장강 북쪽의 제군을 통솔하게 하여, 이릉에서 오군과 맞선다. 연의에서 유비는 75만 대군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정사의 기록으로 추정하여 볼 때, 당시 유비가 이끌었던 촉한의 군세는 4만 ~ 8만 명 규모의 익주 본대와 형주 유랑군, 이민족의 연합군(총합 10~12만가량)으로 추정된다.

222년 6월, 육손은 병사들에게 띠풀을 소지하도록 하여 화공으로써 유비군을 공격하고, 형세를 갖춘 뒤 동시에 공격하여 장남(張南), 풍습 등의 촉장의 머리를 베고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마인산에 포진된 유비의 군대를 포위, 공격해 유비군의 진영을 붕괴시키는데 촉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죽은 군사가 8만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벌에 실패한 유비는 겨우 달아나 백제성으로 들어간다. 육손은 군사들을 이끌고 촉군을 계속 추격하였지만, 조비가 이를 알아채고, 오나라 강동 땅이 비어있는 틈을 타 오나라 본국을 공격하였기에 육손은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8월, 유비는 군사를 거두어 무현으로 돌아온다. 10월, 손권은 위나라의 침공을 맞이해 백제성에 머물고 있는 유비가 다시 공격할 것을 우려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고 이에 유비가 응답하였다.

삼고초려[편집]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인재(人材)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노력하거나 마음을 쓴다는 뜻으로, 후한 말, 삼국 시대에 촉한의 유비가 융중에 기거하던 제갈량을 얻기 위해 몸소 제갈량의 초가집으로 세 번이나 찾아갔던 일화에서 유래하였다. 삼고지례, 초려삼고(草廬三顧)라고도 한다.

서서는 제갈량을 추천하였는데, 이에 유비가 그를 세 번 찾아간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제갈량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천하삼분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유비에게 피력하였는데, 이를 들은 유비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제갈량을 시험해보고자 그가 형주를 취할 때 그에게 군수물자 조달 임무를 맡겼는데, 공명은 이를 훌륭하게 해내었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가 제갈량과 가까워지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으나,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에 비유하며, 그들을 달랬다. 이것이 곧 수어지교라는 고사의 유래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큰 차이는 없으나, 위략과 구주춘추와 같은 사서의 내용을 보면 제갈량이 유비를 직접 찾아갔다고 써져있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고자 진수는 출사표를 인용하여 본전에 실었다. 제갈량은 소설인 삼국지연의와는 다르게 지략가의 면모보다 정치가로서의 역할수행을 하였다.

유비에 대한 평가[편집]

삼국지는 진나라에서 저술되었고 당시 진나라의 공식 입장은 "후한의 헌제가 조조의 공을 인정해 그 아들인 조비에게 국체를 선양했고, 그 조위가 진나라 사마씨에게 선양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비는 진나라의 그 정통성 계보와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칭제한 반역자에 불과하다. 유비가 나름의 정통성과 인덕도 있고, 조조에 비견될만한 능력까지 있었던 영웅이었다고 서술한건 정치적 부담을 감내하고 매우 소신있게 고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초세지걸이라 불리며 당대에 최고로 칭송받던 조조와 비교 대상으로 서술된 것만으로도 유비도 매우 대단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유비(劉備,161~223)〉,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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