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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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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김삿갓은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이다.

개요[편집]

김삿갓은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에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1]

김삿갓의 생애[편집]

김삿갓은 순조 7년에 태어나 철종 14년까지 산 인물이다.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고 호는 지상이다. 김삿갓은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삿갓을 쓰고 다니며 방랑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807년(순조 7) 3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 가문인 김안근(金安根)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막내아우 김병두(金炳浢, 1809년~1810년)는 두 살 때에 질병으로 일찍 죽었으며,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그의 조부(祖父)이자, 갓 전보 신임 발령받은 평안도 선천부사 겸 방어사(平安道 宣川府事 兼 防禦使)였던 김익순은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

김익순은 당시까지 함경도 함흥(咸鏡道 咸興)의 관아(관청)의 중군(中軍: 정3품 관직)으로 있다가, 평안도 선천 부사 겸 방어사로 전관 조처되어 온지도 아직 불과 서너 달이 지난 상태였다. 신임지에 와서 어수선한 일을 정돈한 후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수일간 다괏상과 술안주가 함께 놓여진 연회(잔치)를 열었는데, 다과연회(잔치)가 끝난 익일 새벽에 반란군이 쳐들어와 술에 취해 있는, 당시 신임 평안도 선천부사 겸 방어사(防禦使)였던 김익순을 결박하고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김익순은 그로 인해 1812년 조정으로부터 참수에 처해졌으나, 그 가족은 살려주기로 하였고 김삿갓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후 가문에서 종 노릇을 하던 이(김성수)의 고향인 황해도 곡산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이 과정에서는 아우 김병호(金炳浩, 1808년~1819년)도 질병으로 죽었으나,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남은 두 형제를 키워내었다. 그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1826년 3월,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과거에 응시했을 때,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에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써 급제한 것이었다.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름도 '병연'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유랑 도중 집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절 취하지 않았다. 한때 그의 둘째 아들 김익균(金翼均)이 3차례 정도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차라리 모두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 사실상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도 동복현에 들렀던 중, 1863년 3월 25일(철종 14년)에 전라도 동복 사는 어느 선비 안(安) 참봉 사갓댁의 사랑방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뒤늦게도 둘째 아들 김익균이 늦게 선친의 부고(訃告)를 전해 듣고 전라도 동복으로 달려가 1864년 3월 29일(고종 1), 1주기가 나흘 넘어 지난 당시의 아버지의 유골(시신)을 강원도 영월로 이장 및 운구하여, 재차 안장되었다. 김병연의 시신이 묻힌 곳은 훗날 지금의 강원 영월의 김삿갓면이 되었다.

김삿갓의 가계[편집]

속칭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병연 그는 한자로써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그의 선대 조상을 살펴보면, 9대 조부는 1636년 당시의 병자호란 때 척화대신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사촌 종형이 되는 이이자 형조참판 등을 지낸 김상준이며, 5대조는 황해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낸 김시태, 고조부는 충청도 전의현감 등을 지낸 김관행, 증조부는 함경도 경원부사 등을 지낸 김이환이다.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金益淳, 1764년생~1812년졸)이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평안도의 선천의 부사로 있다가, 홍경래가 이끄는 반란군한테 전격 투항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시로써 장원한 것을 수치로 여겨, 결국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죽장(竹杖, 대나무 지팡이)이라는 단장(單杖) 한 토막으로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그렇게 그는 일평생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2]

김삿갓의 저술[편집]

김삿갓의 삶과 시작품에서 '시선(詩仙)'으로 일컬어진 이백(李白)의 기상이 느껴지는 점을 들어 김병연을 '시선(詩仙)'으로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김병연의 시작품에 투영된 작가 의식과 세계관은 속세를 초탈하여 절대 자유를 노래했던 시선(詩仙)과는 거리가 있다.

김병연의 시 세계는 방랑을 떠난 뒤 10년간 창작한 작품과 그 이후에 창작한 작품으로 구분할 수 있다. 김병연이 방랑길에 오른 뒤 10년간 창작한 작품에서는 그가 벌열 가문 출신이지만 방랑하며 걸식할 수밖에 없었던 참담한 현실을 읊은 한스러운 심정과 비애,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폐족 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유복한 가정을 재건하고 싶은 바람과 좌절 등 방랑하는 삶 속에서 느꼈던 고뇌와 좌절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방랑을 떠난 지 10년의 세월이 지난 이후에 창작한 작품에서는 고뇌와 좌절감으로 점철되었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풍자와 해학을 구사하고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파격을 추구하는 면모가 드러난다. 이는 김병연이 지극히 힘든 방랑 생활에서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며 느낀 좌절감을 오히려 초탈함으로써 진정한 시선(詩仙)의 풍모가 드러난 결과로 보인다. 1941년에 그의 시작품을 엮어 편찬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김삿갓 유적지[편집]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조성된 난고 김병연(金炳淵)의 유적지이다. 별호인 김삿갓으로 불리는 난고 김병연(1807~1863)을 기념하는 유적지와 부대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김삿갓 연구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난고문학관과 많은 돌탑이 조성되어 있는 묘, 작은 성황당, 마대산을 따라 김삿갓이 살던 집터 등이 있다.

방랑시인이었던 김삿갓은 1863년 전남 화순군 동북면 구암리 정시룡 댁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3년 뒤 아들 익균이 화순의 초분지를 찾아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 기슭으로 이장했다. 김병연의 묘소는 116년이 지나 1982년 확인되었으며, 묘소 주변으로 시비공원을 지었다. 유적지 중 집터의 주거지 건물 또한 1982년에 발견되었는데, 2002년에 새로 복원해 지었다. 매년 10월 중순 김삿갓 묘역이 있는 김삿갓면 노루목 마을에서는 추모제, 추모살풀이춤, 백일장 등의 문화행사와 관광객들이 참여하는 체험행사가 열린다. 와석리의 기타 관광지로는 조선민화박물관, 묵산미술관, 김삿갓 묘역이 알려지기 전에는 와석계곡이라고 불렸던 김삿갓 계곡이 있다.

김삿갓묘[편집]

김삿갓묘는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병연의 묘이다.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으로 김삿갓이라는 속칭으로 더 잘 알려진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묘로,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마을에 있다. 태백산과 소백산이 이어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 잡고 있는 김삿갓묘는 마대산 줄기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흘러내리는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의 명당이다.

작은 봉분을 갖춘 묘 앞으로는 자연석으로 만든 상석과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비석에는 '시선 난고 김병연지묘(詩仙蘭皐金炳淵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묘역 앞에는 시비(詩碑)가 서 있다. 김삿갓묘 아래쪽 평지에는 2003년 10월 개관한 난고김삿갓문학관이 있으며, 이곳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는 김병연의 생가터가 있다.

김삿갓계곡[편집]

김삿갓계곡은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는 계곡이다. 선달산(1,236m)에서 발원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지나 와석리로 흘러 계류를 이루며 옥동천을 지나 단양·충주·여주로 흐른다. 인근에 방랑시인 김립(속칭 김삿갓)의 묘가 있어 유명해졌다. 김립이 생전에 무릉계라 불렀을 만큼 경치가 빼어나며 오염이 안된 청정지역이다. 이 일대는 크낙새(내리계곡), 딱따구리(법흥사), 수달(동강과 서강) 등이 사는 생태보고이기 때문에 영월군에서는 이 계곡과 내리계곡을 해마다 번갈아가며 한 곳씩만 개방하고 있다. 주변에 장릉·청령포·영월고씨굴(천연기념물 219)·김삿갓묘·조선민화박물관 등 관광명소가 많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김병연(金炳淵,1807~1863)〉, 《두산백과》
  2. 김병연〉,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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