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
여불위(중국어:吕不韦lǚ bú wéi)는 중국 전국시대의 상인이자 정치가다.
개요[편집]
여불위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정치가이다. 장양왕 때 승상이 되었고 이후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었으나 태후의 간통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하였다.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인 《여씨춘추》를 편찬하였다.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대상인(大商人)이었다. 그는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했으며 이를 통해 거금을 모은 전국시대 대부호였다. 특히 여불위는 수완이 뛰어나고 이재에 밝았다.
여불위는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어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으며 태후(太后:진시황의 모후이자 여불위의 첩)와 밀통관계를 유지하였다. 여불위는 이 관계가 들통날까 두려워 노애라는 사내를 태후에게 보내어 정을 통하게 하였다. 태자 정이 성장하여 이 관계를 눈치채자 노애가 태자를 제거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극형을 당하였다. 여불위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상국에서 파면되어 촉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여불위는 점점 압박해오는 진왕 정의 중압감을 못 이겨 마침내 자살하였다(BC 235).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여불위가 3000여 명의 빈객들의 학식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1]
생애[편집]
여불위는 상인 출신으로 출생지를 두고는 기록이 갈리는데 유향은 위(衛) 복양으로 사마천은 양적(陽翟)으로 기록했다. 여불위는 여러 곳을 오가며 부를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행상인 출신으로 추측되며 이인을 만나기 전부터 천금을 쌓아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상당한 재력가였다.
여불위는 자신의 돈으로 이인이 조의 실력자들의 사교계(社交界)에 접근하도록 하고, 자신은 진으로 들어가 안국군의 총비였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만났다. 화양부인에게 여불위는 이인의 현명함을 말하며 화양부인을 친어머니처럼 사모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화양부인의 언니도 만나 자신의 재물 일부를 주며 포섭, 그 언니를 통해 이인을 화양부인의 양자로 들이고 안국군의 세자로 삼게 할 것을 설득하였다. 화양부인은 안국군의 총애를 받고는 있었지만 그 사이에 자식은 없었기에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참이었고, 여불위의 제안을 따랐다. 안국군도 이 이야기를 승낙했고, 이인을 자신의 세자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조로 돌아온 여불위는 이인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이인은 여불위를 자신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이인은 그 뒤 양어머니 화양부인의 출신을 따서 자신의 이름을 자초(子楚)라 바꾸었고, 훗날 귀국하여 드디어 진의 왕이 되었다(장양왕). 한편 사마천의 《사기》 등에서는 이때 여불위가 자신의 애첩이었던 조희를 마음에 들어 하던 자초에게 바쳤는데, 조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 아이가 바로 훗날 진의 왕으로 즉위하게 될 정(진 시황제)였다고 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기원전 252년에 진에서 소양왕이 재위 55년 만에 훙서하고 차남이 효문왕으로 즉위하면서 자초 또한 진으로 돌아와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효문왕이 얼마 안 되어 훙서하고, 자초가 태자로써 즉위하였다. 여불위는 자초를 지원한 공으로 진의 승상이 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으며, 기원전 246년에 장양왕이 죽고, 왕태자 정이 13세로 왕위에 오르자 상방(相邦)이 되어, 왕의 아버지에 버금가는 지위라는 뜻의 중부(仲父)로 불리며 왕을 도왔다.
권세가 누구와도 비길 데 없었던 여불위였지만, 진왕 정의 생모인 태후와 밀통하고 있었다. 원래 색을 밝혔던 태후는 장양왕 사후에 여불위를 계속해 유혹했고, 여불위로서도 원래 자신의 애인이었던 태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진왕 정이 자라면서 국모(国母)가 된 태후와의 불륜을 지속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여불위는 노애(嫪毐)라는 사나이를 태후에게 소개하고, 그를 환관으로 꾸며 후궁에 들였다. 태후는 노애와 두 아들을 두기까지 했다. 그 뒤 노애는 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장신후(長信侯)로 봉해져 권세를 얻었고, 태후와의 밀통이 발각되자 진왕 정에 대한 모반을 꾀하다 진압당했다. 노애는 거열형에 처해지고 노애의 두 아들도 처형당했다. 이 사건 이후 여불위도 승상직을 잃고 칩거에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공을 감안한 감형이었다.
칩거하게 된 뒤로도 여불위를 찾는 객은 끊이지 않았고, 여러 나라에 이름도 높았다. 기원전 236년, 여불위는 자신을 찾는 객들과 여러 다른 나라와 모의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진왕 정은 여불위에게 "나라를 위해 한 일도 많지 않으면서 무슨 염치로 이제껏 중부로 불리며 호사를 누립니까?"라고 힐문 촉지(蜀地)로 갈 것을 명했고, 자신의 최후를 깨달은 여불위는 절망한 나머지 237년 스스로 독을 마시고 죽었다.
일자천금[편집]
맹상군이나 신릉군 등 전국 시대의 사군자라 불리는 각국의 유력자들이 식객을 모아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가운데, 여불위 또한 자신의 집에 3천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고, 여불위 집안의 소사가 1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그 식객 가운데는 훗날 진의 승상이 되는 이사도 있었는데, 그 재능을 눈여겨보게 된 진왕 정이 그를 발탁해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239년 여불위는 자신의 식객으로 있던 석학들을 모아 《여씨춘추》라는 이름의 저작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제자백가의 책과는 다른 사상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는, 오늘날의 백과사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여불위는 완성된 《여씨춘추》를 진의 수도인 함양성 성벽에 진열해 놓고, "이 책에 적힌 글 가운데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훗날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평가[편집]
여불위는 한(韓)나라의 거상이자 진(秦)나라의 상방이었다.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던 진나라의 떨거지 왕족인 영이인을 우연히 만나 자신이 그동안 장사를 하면서 모은 재산으로 영이인을 지원하여 끝내 그를 진나라의 왕으로 만들었으며, 훗날 시황제로 불리게 되는 영정에게 권력을 빼앗기기 전까지 진나라의 실세로 군림했던 권신이었다. 여불위에 관한 주요 정보는 사마천의 《사기》 여불위전과 유향의 《전국》 그리고 《설원》(說苑)이 있다. 사마천은 여불위를 두고 《논어》 안연편 20장을 인용해 '명성 있는 자'(聞, 즉 실속은 없으면서 소문만 번드르하게 난 인간)라는 것은 여불위를 두고 한 말이라고 평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여불위가 여러 제후국을 통관하며 국력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권을 가지고 있어 진시황의 적통(嫡統)을 유지한 실세라 평했다. 그저 맨손에 아무것도 없었던 떨거지 왕족을 일국의 왕으로 만들고, 자신도 일개 상인에서 한 나라의 실세를 거머쥔 정치 거물로 성장했다는 점을 보면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를 농락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과 명성을 잃고 추락한 끝에 자결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사마천은 《사기》<여불위 열전>에 여불위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의 허무한 몰락을 논하며 "소위 이름만 알려진 자(所謂聞者)"라 평하였다. 이는 그 대단한 명성과 지위와는 대조적으로 그 행동은 올바르지 못 한 간사한 자라는 말 정도로 해석된다. 다만, 이렇게 사후의 평이 박했던 것에 비해 생전의 평판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불위 자신이 권력을 손에 쥔 이후로도 학자나 선비, 도인 등을 후원해주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는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여불위가 무려 진시황을 능멸하는 대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석학들과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여불위를 변호한 덕분에 일단은 관직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불위가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여불위가 킹메이커로 등극하던 시기, 진나라는 소양왕이 도합 40년에 걸친 외척인 위염과 그 세력이었던 백기 등을 쳐낸 여파로 거의 손에 들어왔던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기해야 하는 등, 확장에 제동이 걸리던 시기였다. 거기에 그 뒤를 이은 효문왕은 상을 치른 뒤 3일 만에 죽음을 맞이했고, 여불위 자신이 왕으로 만들었던 장양왕 또한 3년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그 뒤를 이은 게 겨우 12살의 진시황인데, 어린 진시황이 성장하여 친정을 할 시기가 될 때까지의 대략 10년 동안 진나라의 국정을 유지한 게 여불위다. 50년 이상 재위했던 왕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 뒤 왕들이 3일 내지는 3년 만에 줄줄이 줄초상을 맞이하는 가운데, 어린 왕의 섭정이 되어 정부를 혼란 없이 장악하고 무난하게 국정을 이끌어갔다는 사실이 이미 재상으로는 합격임을 증명한며 여불위의 능력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진 시황제[편집]
진 시황제는 강력한 부국 강병책을 추진하여 중국대륙의 군소 국가를 모두 통일했다.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을 정비하고,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문자 ·도량형 ·화폐를 통일하였다. 성 영(嬴). 이름 정(政). 조(趙)나라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의 계략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이며 장양왕이 즉위 3년 만에 죽자 정의 나이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기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奴毐)가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하였다.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尉繚)와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韓) ·위(魏)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였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였다.
진 시황제(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는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제1대 황제로, 세계 최초의 황제이다. 성은 영(嬴), 씨는 조(趙)·진(秦), 이름은 정(政)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진본기(秦本紀)에서 시황제(始皇帝)가 전쟁, 통일, 축조, 국정, 인사를 직접 처리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토착 귀족 세력과 신하의 조언을 판단하는 시각이 뛰어난 완벽한 왕(王)이었다고 평했다.
진 시황제는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 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진 시황제는 상방 여불위마저 제거하면서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여불위(呂不韋,?~BC 235)〉,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여불위(呂不韋,?~BC 235)〉, 《두산백과》
- 〈여불위〉, 《위키백과》
- 〈여불위〉, 《나무위키》
- 혼창통, 〈중국 역사 최초의 황제 진시황(秦始皇)을 탄생시킨, 거상(巨商) "여불위(呂不韋)"〉, 《네이버블로그》, 2022-09-23
- 빛나는 영혼, 〈여불위 - 인재〉, 《네이버블로그》, 2023-06-15
- 오디세이, 〈진시황은 여불위의 자식이 맞을까?〉, 《네이버블로그》, 2023-05-24
- 박기수, 〈진시황과 노애의 반란 여불위의 운명은〉, 《네이버블로그》, 2021-01-16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