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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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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는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개요[편집]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는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가 지어준 이름이다. 영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인도의 영국 식민지 기간(1859~1948) 중 대부분을 영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다.

1890년 영국 런던 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그는 이후 1916년 영국 런던 대학교 법학과에서 명예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반영 인도 독립운동과 무료 변호, 사티아그라하 등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인도의 작은 소공국인 포르밴더의 총리를 지냈던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종교는 부모의 영향으로 힌두교이다. 인도의 화폐인 루피의 초상화에도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실 간디는 가난하지 않은 풍족한 삶을 대학교까지 즐겼다. 간디의 생일인 10월 2일은 인도에서 국경일인 '간디 자얀티'로, 전 세계적으로는 '국제 비폭력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간디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인도의 아버지'라고 여겨지고, 보통 바푸(구자라티어: 아버지의 사랑)라고 불렸다.[1]

생애[편집]

마하트마 간디(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또는 수다마푸리 Sudamapuri)에서 태어났다. 간디의 집안은 상인계급(Bania Caste)에 속했고 식료품상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우탐찬드 간디(Uttamchand Gandhi)는 포르반다르에서 관리로 근무했다. 그는 아들 6명을 두었는데 그중 5번째 아들 카바 간디(Kaba Gandhi)가 마하트마 간디의 아버지이다. 카바 간디는 부인이 매번 사망하여 네 번이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아내였던 푸틀리바이(Putlibai) 사이에서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가 마하트마 간디였다. 카바 간디가 라지코트의 관리로 봉직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이주하여 초급학교를 다녔다. 조혼 풍습에 따라 13세에 동갑인 카스투르바이(Kasturbai)와 결혼했다. 당시 결혼은 형, 삼촌과 동시에 치뤄진 합동결혼식이었다. 16세에 아이를 낳았으나 4일 만에 죽었고 그해 아버지도 치루염으로 사망하였다. 훗날 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어린시절 결혼생활에 죄책감을 느꼈고 인도의 조혼 풍습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1887년 18세 때 아메다바드(Ahmedabad)에서 치러진 대학 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학비가 싼 사말다스(Samaldas)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수업 내용이 어려워 첫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돌아오면 좋은 일자리와 수익이 보장된다는 권유에 영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집안에서는 종교에 반대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반대를 하지만 간디는 종교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를 하고 9월 4일 뭄바이를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영국에 도착하여 채식과 관습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런던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1891년 6월 10일 간디는 변호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11일에 고등법원에 등록하였고 12일 인도 귀국길에 올랐다. 간디는 당시 런던 시험에 통과하여 변호사의 자격을 취득하는 과정이 쉬웠고 그 시험조차 가치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면허는 취득했지만 그것으로 어떻게 법정에 서고 직업으로서 밥을 먹고 살 수 있을지 의심과 걱정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다고 술회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귀국하여 뭄바이와 라지코트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지만 변호사로서 자질이 부족하여 실패하였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1년간의 계약으로 남(南)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거기에 사는 인도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 1914년까지 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하였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 아힘사(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를 중심으로 하는 간디주의를 형성하였다. 간디 자신이 전개한 인종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satyagraha) 및 자기실현을 위한 인격의 도야와 수양(修養)의 노력은 어느 것이나 훗날 간디가 인도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모형이 되었고, 또한 아슈라마(修道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도인의 정신개조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최초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1906년 아시아인 등록법을 제정한 트란스발주(州)에서 일어났다. 이 투쟁은 그로부터 약 8년 동안 인두세(人頭稅)를 비롯한 여러 차별법에 반대하기 위하여 계속되었으며, 남아프리카의 여러 주로 퍼져나갔다. 이 투쟁으로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간디에서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명을 다한 간디는 1915년에 귀국하였는데, 정치운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토지분쟁의 해결 등에 노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전쟁 후 영국의 배신과 1919년의 롤라트 법안(Rowlatt Act)과 같은 반란진압조령(條令)의 시행 때문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인도 여러 곳을 두루 순회하였고 수방(手紡)운동을 장려하였다. 1919년 인도국민회의파의 연차대회에서는 간디의 지도하에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 방침이 채택, 납세거부·취업거부·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을 실시하였다. 이듬해에 반영·비협력 운동이 선언되고 외국제 직물의 불매운동은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1924년부터 1년간 인도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수방운동으로써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소금세 신설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구금되었으며, 1931년 석방 후, 어윈 총독과 절충한 결과, 간디어윈 협정을 체결하여 반영(反英) 불복종운동을 중지하였다. 간디어윈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한 인도는 완전독립의 약속을 얻어 내려고 노력하였으나, 상반된 이해관계로 타결을 보지 못하고, 1942년의 봄베이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영국세력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여 공전의 대규모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전쟁 후에는 인도를 하나의 감옥으로 보고 전화(戰禍)와 굶주림으로 거칠어진 인심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하여 인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힌두 ·이슬람의 화해에 따른 인도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주권을 넘겨줌에 있어서 인도의 대정당인 국민회의파와 전인도(全印度) 이슬람 연맹이 인도를 둘로 분할 독립할 것을 협정한 결과 오히려 격렬한 힌두 ·이슬람의 대립소동이 벌어졌다.

1947년 7월 인도가 이러한 분란 속에서 분할 독립했을 때, 간디의 나이는 78세였으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동이 가장 격화되어 있던 벵갈에서 힌두·이슬람의 융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8년 1월, 이 활동의 행선지를 뉴델리로 연장, 뉴델리의 소요를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1월 30일 반(反)이슬람 극우파인 한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R.타고르의 방문을 받아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고,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의 위대한 영혼은 인도민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단디 행진[편집]

단디 행진(Dandi Salt March)은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에서 1930년 3월 12일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인들을 인솔하여 소금세의 폐지를 주장하며 아쉬람(Ashram)에서 단디(Dandi)까지 행진한 사건이다. "소금행진"이라고도 한다. 1930년 당시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통제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여하였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인도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가 1930년 3월 12일 사바르마티 아쉬람에서 70명의 동지와 함께 출발, 24일을 걸어서 구자라트주의 단디에 도착하여 바닷가의 소금을 집어 드는 행동을 하였다. 이는 영국 국왕의 전매 사업인 소금에 대하여 인도 바닷가의 소금을 인도인에게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묵시적 비폭력적 행동이었다. 행진이 계속되면서 계속 행진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 6만 명이 넘는 인도인들이 투옥되었다.

간디주의[편집]

간디주의(Gandhiism)는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사상과 실천철학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에 맞서 식민지 해방투쟁을 벌였을 때 주장했던 시민불복종·비협력·비폭력 저항운동을 가리킨다. 베옷을 입고 염소젖을 마시며, 직접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천을 짜면서 민중을 지도한 간디의 모습은 이러한 독특한 사상의 실천이었다. 이후 간디주의는 인도 민족 해방운동의 실천이념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폭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나, 인도에 있어서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디의 주저 《인도의 자치(自治)》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서구사상(反西歐思想)은 그의 단편적인 편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평화 사상과 평화에 바친 업적은 실천 면에서 볼 때 민주적 민족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며, 특히 비폭력·무저항주의는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간디 슴리티[편집]

간디 슴리티(Gandhi Smriti)는 인도 뉴델리에 소재하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박물관이다. 본래 인도 비즈니스의 거물인 비를라(Birla) 가문의 집으로, 비를라 하우스라고 불렸던 건축물이다. 간디가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생애 144일을 보낸 장소이자 1948년 1월 30일 암살당한 장소이다. 1971년에 인도 정부가 매수해 1973년에 조성하여 간디 기념관으로 개관했다가, 2005년에 간디 박물관으로 재정비해 일반에 공개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련한 기록물을 비롯해 그의 개인 소지품과 사진 등의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당시 간디가 머물렀던 방의 레플리카가 꾸며져 있으며, 도서관과 멀티미디어센터가 구비되어 있다. 박물관 정원에 간디가 이슬람 극우파에게 암살된 장소는 그를 추모하여 ‘순교자의 기둥’이라는 기념비로 자리한다.

비폭력 불복종 운동[편집]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주창한 식민 정부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비협조하는 방식의 독립운동이다. 인도 전역에는 라우라트 법안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제국입법의회의 인도인 의원들은 라우라트 법안의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통과되었다. 이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사티아그라하, Satyāgraha) 본부를 설립하고 반대 세력을 이끌어 나갔다. 각지의 시위는 경찰과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간디가 의도한 비폭력·불복종 정신에 맞지 않았다. 간디는 곧 반대 운동을 멈추었고, 비폭력·불복종 정신을 대중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인도의 민족주의 및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국민회의에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채택을 요청하였다.

국민회의의 구성원들은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 효과적이지 않으며, 인도에 무정부 상태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반대하였다. 간디는 정부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이므로 정부가 국민을 수탈한다면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임을 강조하였다. 정부에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은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며, 국민의 사기를 저하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많은 논의 끝에 결국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국민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후 간디는 명예직 사임, 정부의 공식 행사 불참, 국립 학교에서의 자퇴, 영국 법정의 배제, 해외 파견 근무 거부, 입법의회 선거의 입후보 및 투표 거부, 외국 제품 불매 등을 제안하였다. 국립 학교에서의 자퇴, 영국 법정의 배제와 국민회의의 중재소 활용은 비교적 성공적이었지만, 명예직 사임은 개인의 이익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참여율이 저조하였다. 반면 입법의회 선거의 입후보 및 투표 거부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영국이 인도 국민이 선출한 입법의회를 통해 인도를 평화적으로 통치하였다는 명분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아울러 간디는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인도에서 생산된 직물의 소비를 권장하였고, 직접 물레를 돌려 옷감을 만들기도 하였다.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열기를 더해 갔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리고 영국 식민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며 많은 국민회의의 구성원이 체포되었다. 정치적 입장과 종파에 따른 국민회의 내부의 분열도 일어났다. 결국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국민회의에서 실각하게 되었다.

평가[편집]

마하트마 간디의 종교 사상의 근본은 아힘사(무상해)였고, 인류애에 의한 폭력 부정만이 최후의 승리임을 확신하고 이를 그대로 정치 활동에 실천하였다. 육체적 욕망을 극도로 제한하고, 때로는 금식에 의해 속죄하였다. 또한 인도 인습인 사회적 계급 제도의 타파에 노력하였으며 불가촉천민의 해방을 실천하였다. 진실을 사랑하고 기만을 증오하였으며, 사회악에의 철저한 반항이 정치 활동의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일생 동안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폭력을 거부했는데, 그의 비폭력주의는 나라 안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을 전후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간디는 인도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또 그때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로 불리게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종교적으로 너그러워서 힌두교 이외의 종교인들과도 교류하였다. 그의 친구 중에는 감리교 선교사인 스탠리 존스가 있었다. 스탠리 존스가 간디에게 기독교가 민중들에게 다가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지혜를 구하자, 간디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삶"을 제안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거룩하고 활발한 사회운동을 했지만, 노동자들에게 간디는 자본가들을 위해 봉사하는 지식인에 불과한 측면도 있다. 그는 1917년 파업권이 없는 노동조합결성 지원을 자본가들에게 제의해서 구자라트 주의 노동운동을 침체시켰는데, 이는 활발한 노동운동으로 노동인권을 쟁취해 간 봄베이의 노동자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1935년 가족임금제도(가족 중 한 명이 실직 시 다른 가족의 임금을 인상하는 제도)를 받아들여, 힘없는 여성과 노인노동자들이 해고당하게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전쟁에 협력하면 인도를 독립시켜주겠다는 영국의 회유에 현혹되어 인도의 전쟁가담에 관여했는데, 이는 그의 비폭력주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분노했지만 결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카스트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힌두교를 옹호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마하트마 간디〉,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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