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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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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이동녕(李東寧)은 조선 후기의 개화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개요[편집]

이동녕은 독립운동가로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 등과 상동(尙洞)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대동신문(大東新聞)》,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議政院) 의장·내무총장,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여운형(呂運亨)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단결을 촉진하였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軍務總長)을 겸직하고 이어 대통령대리가 되었으며, 1926년 국무령(國務領), 1927년 주석(主席)이 되었다.

이동녕은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이사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재차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 주석은 계속 역임하였다. 1935년 양우조(楊宇朝) 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에 가담하여 항일전을 구상하며, 1939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였다. 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장례가 거행되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

생애[편집]

이동녕(1869년 10월 6일 ~ 1940년 3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언론인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다. 본관은 연안, 자(字)는 봉소(鳳所), 호(號)는 석오(石吾)·암산(巖山). 1926년부터 192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고, 1933년부터 1940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대통령 직무대리·주석·국무위원, 임시 의정원 의장 등으로 활동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동녕은 의성군수 등을 지낸 이병옥의 장남으로 충청도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났다. 충청도 청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이동녕이 17세이던 1885년 일가가 서울 종로 봉익동으로 이주하였다. 1892년 24세에 응제진사(應製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1893년 원산에서 아버지 이병옥의 육영사업을 도왔다. 이동녕은 28살 되던 해에(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 간사원에 선출되었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 그는 이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897년 경성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상동교회의 청년지사들과 함께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승만(李承晩) · 이준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승만과는 이때 이후 친숙한 동지가 되었다. 1898년 30세에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그는 옥파 이종일이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입사,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하였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 등과 상동(尙洞)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05년 북간도로 가서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교포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총무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 소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힘썼다. 동지들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립,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에 취임했다.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대동신문》(大東新聞),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하는데 참여하였다.

1915년 이동녕의 나이 47세 때 이상설 ·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를 조직, 대동신문과 해조신문을 발행 보급하였다 그가 49세 되던 1917년에는 노령 니콜라에프스크에서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 포교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독립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 성에서 대종교 김교헌 외에 조소앙 · 조완구·김좌진·여준 등과 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국내에서 3·1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4월 10일 임시 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26년에는 국무령에 지목된 양기탁, 안창호가 거절하면서 의정원 의장으로 국무령이 되었다. 이때 58세인 이동녕은 법무총장도 겸임 2차 개헌에 따른 국무령 지도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1927년 3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1927년 그는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약화된 임정을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27년 8월 19일 임시정부에서 임시약헌을 발표할 때 의정원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주석과 국무위원 겸 법무장을 겸임하였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의장이 되어 임정의 존폐위기를 겨우 극복하고, 두 번째의 임정 주석이 됨으로써 중책을 짊어졌다. 1930년 1월 김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 그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며, 당 기관지 한보·한성을 발행하였다. 1930년 11월 6일 임시정부 주석과 국무위원 겸 재무장에 재선출되었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겸임하였다.

1932년에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김구·이유필 등과 지도, 쾌거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민필호 등의 주선에 따라 임정 요인과 같이 절강성 가흥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10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다. 193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1939년 9월까지 재임했다. 11월 한국국민당의 초대 당수로 선출되었다.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을 구축하고 그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10월 25일의 임정 국무회의에서 그는 임정의 네 번째 주석이 됨으로써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에 대한국사단을 파견하였다.

이동녕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중 1940년 3월 13일 사천성 기강에서 급성폐렴 후 과로로 72세에 영면하였다.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동녕 선생 생가지[편집]

이동녕 선생 생가지(李東寧先生生家址)는 독립운동가인 석오 이동녕(1869∼1940)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으며, 1989년 4월 20일 대한민국의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9칸 반의 크기의 'ㄱ'자형 안채와 사랑방이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바뀐 것이다.[2]

건물의 배치 구조는 ㅁ자형의 안채와 조금 떨어져 있는 일자형의 대문간채가 어울려 ㄷ자형을 이룬다. 안채는 각주를 사용한 납도리의 5량가구 구조이며,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깔았고 양쪽으로 한 칸씩의 방이 있는데, 안채의 좌우로 3칸씩을 내어 방과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문간채는 서향으로 3량 가구 구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모두 5칸인데, 가운데 2칸은 마루를 깔았고 양쪽으로 한 칸씩의 방을 두었다. 안채에서 보아 북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대문이 있다.

평가[편집]

이동녕의 삶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헌신과 희생으로 가득했으며, 그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이동녕 선생이 남긴 휘호 '산류천석(山流穿石)', 즉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은 그의 굳건한 독립 의지를 잘 보여준다. 이 문구는 이동녕 선생의 끈기와 인내, 그리고 독립을 향한 확고한 신념을 상징하며, 그의 삶의 철학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동녕 선생의 유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토대가 되었으며, 그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의 삶은 독립운동의 길을 개척하고, 민족의 자주와 자유를 위해 헌신한 한 인간의 고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동녕 선생은 개인적인 안위나 명예를 초월하여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그의 노력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삶은 끊임없는 도전과 자기희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며,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이동녕의 희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노력은 한국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정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이동녕(李東寧,1869.2.17.~1940.3.13)〉, 《두산백과》
  2. 이동녕 선생 생가지〉,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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