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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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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장제스(중국어:蔣介石jiǎng jiè shí)는 중화민국의 제1-5대 총통이다.

개요[편집]

장제스는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공에 대해서는 우선 내정을 안정시키고 후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방침을 세워 군벌을 이용, 오로지 국내통일을 추진하였다. '자유중국' '대륙반공'을 제창하며 중화민국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서 타이완을 지배하였다.

장제스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고 독립을 위해 지원하였으며,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려고 했다. 하지만 한국에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그의 의도는 배제되었다. 195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저서에 《장중정전집(蔣中正全集)》(상·하권) 《장총통언론휘편(蔣總統言論彙編)》(24권) 등이 있다.[1]

장제스의 생애[편집]

장제스(1887년 10월 31일~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인이자,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제스는 자(字)이며 흔히 불린다. 본명은 장중정(蔣中正). 아명은 루이위안(瑞元), 족보명은 저우타이(周泰), 학명은 즈칭(志淸)으로 종교는 불교에서 감리교로 개종했으며, 황푸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사령관,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중화민국 행정원장,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중국국민당 총재,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장제스는 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소금사업을 하였으나 9세때 아버지의 사망으로 집안은 어려움에 처했다.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중국의 사상을 배웠으며 청소년기에는 영어와 과학 등 신교육을 받았다. 1906년 바오딩(保定)군관학교에 입학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911년까지 일본 군대에서 근무하였다.

1906년 바오딩 군관학교에 입학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 갔다. 일본 유학 시기에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였고, 청나라를 타도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데 노력했다. 1918년 쑨원(孫文)의 휘하에 들어가 주로 군사 방면에서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제1차 국공합작 때는 1923년 소련을 방문하여, 적군(赤軍)에 대해 연구하였다. 1926년 중산함사건을 계기로 국민당의 권력을 장악했으며 국민당 내 좌파세력을 척결하면서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장제스가 주도하는 국민당은 중국 북부에 있는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해 북벌을 개시하였다.

1923년 제1차 국공합작 때는 소련으로 군사 시찰을 갔으며, 귀국 후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장제스는 혁명을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24년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벌을 시작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상하이 쿠테타를 일으켜 중국공산당을 축출하고 1928년에 베이징을 점령하여 북벌 완수를 선언했다. 한편으로는 광둥(廣東)·광시(廣西)의 군벌들과 펑위샹(馮玉祥)·옌시산(閻錫山) 등 지방군벌을 누르고, 1930년부터는 5회에 걸쳐 대규모 중국공산당 포위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공에 대해서는 '우선 내정을 안정시키고 후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방침을 세워 군벌을 이용, 오로지 국내통일을 추진하였다. 이후 난징에 수도를 정하고 국민정부를 선포, 국민정부 주석과 육군, 해군, 공군 총사령이 되어 정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930년부터 공산당 토벌에 나섰으며,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는데도 이를 항일전쟁보다 우선시하였다.

1936년 공산당 토벌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갔다가 그의 부하인 장쉐량과 그의 군대에 의해 감금당한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결성하여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쟁(중일전쟁)에 나섰다. 공산당과 대립하면서도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이끌어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중일전쟁에서 중국(당시 중화민국)을 승전국으로 만들고 세계를 이끌어갈 차기 강대국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으나, 1946년부터 다시 공산당과 내전을 벌였으며, 1949년 중국공산당에 밀려 타이완으로 이전하였다. 중화민국의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 장기 집권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편집]

장제스는 쑨원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웠다. 1919년 8월 쑨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는 방침을 밝힘에 따라 장제스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별다른 지원을 보이지 않았다. 국민당 내에는 황푸군관학교와 조선의용단 인맥인 김규식·김원봉의 일파와 관계를 맺는 군부 내 파벌이 존재하였고 장제스는 임시정부나 김규식·김원봉 일파에 대한 특별한 지지입장은 표명하지 않고 있었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사건을 계기로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수시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키던 김구와 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김원봉 등을 설득하여 연합전선 구축을 권고하기도 했다. 카이로 회담 전에 김구 등 임시 정부 요인들을 만난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고 이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의 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이라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또한 1930년대 김구가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쑹칭링[편집]

쑹칭링(宋慶齡)은 중국의 정치가이며 쑨원의 부인이다. 쑨원이 죽은 뒤 국공합작에 노력하다가 모스크바 ·베를린 등에 가서 머물렀다. 1929년 귀국 후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국민당 좌파에 속하여 장제스와 대립하였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에 노력하였다. 언니는 쿵샹시(孔祥熙)의 부인인 쑹아이링(宋靄齡), 여동생은 장제스(蔣介石)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남동생은 재벌인 쑹쯔원(宋子文)이다.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 미국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 난징(南京)임시정부 대총통(大總統) 쑨원의 비서가 되었다. 1913년 제2혁명 실패 후 쑨원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1914년 일본에서 쑨원과 결혼하였다.

1929년 귀국 후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국민당 좌파에 속하여 장제스와 대립하였다. 국민당 정권의 부패를 공공연히 비판하면서, 차이위안페이(蔡元培)·루쉰(魯迅) 등과 함께 민권옹호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에 노력하였다. 항일전쟁 중에는 홍콩(香港)과 충칭(重慶) 등에서 활약하면서 내외의 반(反)파시스트 운동을 지원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국가 부주석 등의 요직을 역임하는 등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950년 스탈린평화상을 받았고, 1952년 이후 소련·인도·미얀마·파키스탄·인도네시아 등에 친선 방문여행을 하였다. 저서에 《쑹칭링선집[宋慶齡選集]》 등이 있다.

쑹메이링[편집]

쑹메이링(宋美齡, 1897년 3월 5일 ~ 2003년 10월 23일)은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의 부인이다. 상하이 출신으로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도 알려진 그녀는 쑹아이링·쑹칭링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중국의 부유한 감리교도인 쑹 자매의 부친 찰스 존스 쑹은 미국에서 수학하였고, 쑹메이링을 조지아 웨슬리언 대학교로 유학을 보내어 그녀는 석사와 함께 1917년 졸업하였다. 장제스는 1927년 그녀에게 청혼하며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자신의 첫 부인과 이혼하였다.

쑹메이링은 중국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신생활 운동을 일으키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과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에 오르면서 쑹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1975년 장제스의 사망 후 그녀는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사망까지 미국에 거주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에 의존할 때 도운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1등)을 수여 받았다.

장제스에 대한 평가[편집]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는 중화민국의 항일 지도자로서 칭송받는 면과 공산주의자를 탄압한 4·12 쿠테타를 일으키고, 타이완에서 2.28 사건의 학살자이자 독재자로서 비판받는 부정적인 평가의 양면이 존재한다.

장제스는 국공 내전에서 패한 이유가 국민당의 부정 부패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공직자들의 부정 부패를 강력한 처벌로 일소하였다. 하지만 국민당 이외의 정당들은 형식적인 정당에 불과한 국민당 일당 독재, 진보적인 정치세력에 대한 백색 테러로 불리는 보수 테러, 독재에 저항하는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늦게 뿌리내리게 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장제스가 이질적으로 반대한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평가는 일제와의 끈질긴 항전, 친일파 처단 등 부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도 내리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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