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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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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義慈王)은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641∼660)이다.

개요[편집]

  • 의자왕은 성은 부여(扶餘)이며, 이름(諱)은 의자(義慈)이다. 백제의 제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왕비에 관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기》에는 657년(의자왕 17)에 왕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佐平)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식읍(食邑)을 지급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자녀가 무척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의 왕자로 효(孝), 태(泰), 융(隆), 연(演), 풍(豐), 궁(躬), 충승(忠勝), 충지(忠志)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풍'의 이름이 '풍장(豐璋)'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충승'이 그의 형제가 아니라 숙부라고 되어 있다. 의자왕(義慈王)은 632년(무왕 33) 태자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용감하고 대담했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에게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641년(무왕 42) 봄에 부왕인 무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의자왕의 출생연도는 확인되지 않지만 1920년 중국 뤄양[洛陽]의 북망(北邙)에서 발견된 '부여융묘지석(扶餘隆墓誌石)'에는 그의 넷째 아들인 융이 682년에 6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추산하면 의자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적어도 40세는 넘은 나이였을 것으로 보인다.[1]
  • 의자왕은 백제의 제31대, 마지막 국왕이다. 이름은 부여의자(扶餘義慈)며 망국의 군주이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 방탕과 실정으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초대 온조왕으로부터 이어진 백제는 멸망하였고,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들과 수많은 백성들은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갔다. 무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 33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641년에 무왕이 죽자 뒤를 이었고, 당으로부터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우애가 깊어서 중앙귀족에게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 하고, 그의 아들 부여융의 묘에도 의자왕을 가리켜 '과단성이 있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있었다.'라고 적혀져 있다. 그러나 즉위 전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즉위 후에는 실정을 거듭하면서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의자왕을 '타락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2]
  • 의자왕은 백제의 제31대이자 마지막 건길지. 무왕의 장자로, 《삼국유사》<서동요> 설화의 기록을 따른다면 신라 선덕여왕의 조카이자 태종 무열왕의 이종사촌이다. 632년 태자가 되었으며 641년 즉위했다.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벌인 군주로 군림했다. 3천 궁녀를 들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평가가 심히 엇갈렸던 군주로 재위 중반기까지만 해도 숙적인 신라를 몰아붙이며, 무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으나 재위 15년(655년)에 접어들어서는 주색을 탐하는 암군으로 전락하여 백제를 망하게 하였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라는 나라를 시기한 타국들에 의해서 의자왕의 업적이 곡해된 것으로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매우 엇갈린 평가를 받는 군주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삼천궁녀 설화처럼 확인되지 않은 일들로 그가 과도하게 격하당했다는 동정 섞인 평가도 있다. 의자왕은 왕권 강화와 대외 정벌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정치를 했던 인물이다. 이는 백제 내부에 자신감을 불어 넣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부친 무왕 때까지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 것을 끊어낸 말년의 외교 판단으로 대당(對唐) 관계를 파탄내서 당과 신라의 양면 협공을 초래했다는 점도 있어서 이는 명백히 비판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무리한 왕권 강화로도 마찬가지로 비판을 받는데,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의자왕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앉히는 등의 무리한 왕권 강화 때문에 백제 귀족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결국 예식진 같은 매국노에게 붙잡혀 백제 멸망을 지켜보게 되는 비참한 몰락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3]
  • 의자왕은 백제의 제31대 왕이다. 태자 때부터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어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다. 재위 기간 초기에 개혁정치를 펼쳐 국정을 쇄신하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함으로써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된 비운의 군주이다. 무왕(武王)의 맏아들로 태어나 무왕 33년(632)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이 615년 태어난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의자왕은 적어도 590년대 중반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641년 무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따라서 왕에 즉위할 당시 나이는 적어도 40대 중반이 넘은 완숙한 나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642년 왕의 어머니가 죽자 아우 왕자의 자식인 교기(翹岐)를 비롯해 어머니 자매의 딸[母妹女子] 4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였다. 의자왕의 친모(親母)와 태자 임명, 사택씨와의 관련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의자왕 초기 정변이 친정체제(親政體制)를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친고구려정책(親高句麗政策)으로 전환하는 기폭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이 즉위하자 당 태종(太宗)은 사부랑중(祠部郞中) 정문표(鄭文表)를 보내 책봉하여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柱國 帶方郡王 百濟王)'으로 삼았다. 왕이 병들어 죽자 당 고종은 '금자광록대부 위위경(金紫光祿大夫 衛尉卿)'으로 추증하고 옛 백제 신하들이 장사지내도록 허락하였다. 당 고종은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의자왕의 시신을 묻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4]

의자왕의 생애[편집]

  •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642년에 직접 각 주와 군을 돌아보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수들을 대규모로 사면했다. 그리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 공격에 나서 미후성(獼猴城)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고,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남 합천)을 공격하게 해서 성주 품석(品釋)을 죽이고 성을 함락시켰다. 643년(의자왕 3) 겨울에도 의자왕은 신라의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군대를 철수시켰다.
  • 의자왕의 재위 기간에 백제는 끊임없이 신라와 대립했다. 644년(의자왕 4) 가을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등 7개 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그러자 의자왕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신라의 병력을 징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신라 공격에 나서 7개의 성을 빼앗았고, 신라는 김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임명해 반격해왔다. 647년(의자왕 7)에는 신라에서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이 일어나자 장군 의직(義直)을 보내 무산성(茂山城)과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을 공격했다. 그러나 백제군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에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648년(의자왕 8) 봄에도 의직이 이끄는 백제군은 신라를 공격해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개의 성을 점령하고 옥문곡(玉門谷)까지 진군했으나,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에 크게 패해 진례(進禮) 등 9개의 성을 빼앗겼다. 649년(의자왕 9) 가을에는 좌장(左將) 은상(殷相)이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7개의 성을 빼앗았으나, 도살성(道薩城) 아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신라군에 패했다.
  • 중국에서는 통일왕조인 수(隋)와 당(唐)이 들어선 뒤에 주변 국가들로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이 커지고 있었다. 이에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뒤 중국의 영토 확장을 사전에 막고 신라를 압박할 목적으로 거의 해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대외적인 화친과는 달리 백제와 당나라는 때에 따라 서로를 견제하기도 했다.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해 당나라의 압박을 극복하려 했고, 당나라는 노골적으로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시키려고 했다. 신라가 648년(의자왕 8)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로 보내 백제를 공격할 병력의 파견을 요청해 오자 당나라 태종(太宗)은 출병을 약속했다. 당나라 고종(高宗)도 651년(의자왕 11)에 빼앗은 성들을 신라에 돌려주지 않으면 백제를 공격하겠다고 직접 사신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러한 당나라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653년(의자왕 13) 왜국(倭國)과 우호관계를 맺고, 655년(의자왕 15) 가을에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해 3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사치스럽게 생활하며 향락에 빠져 나라에 변고가 잇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자왕은 657년(의자왕 17)에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했다. 이는 왕자들을 중심으로 친위체제를 구축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656년(의자왕 16)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투옥되어 목숨을 잃었고, 660년에는 좌평 흥수(興首)가 귀양을 살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귀족사회의 반발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644년(의자왕 4)에 넷째 아들인 융(隆)을 태자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660년(의자왕 20)의 기록에서는 태자의 이름이 효(孝)라고 되어 있다. 태자의 교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뒷날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을 포위했을 때 의자왕의 둘째 아들인 태에 반발해 태자 효의 아들인 문사(文思)가 왕자 융과 함께 성을 빠져나가 당나라에 항복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왕자들 간의 갈등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서 백제를 공격해오자 의자왕은 장군 계백(堦伯)에게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黃山)으로 가서 신라군과 싸우게 했다. 당나라의 침공 소식을 듣고 대책을 논의할 때 귀양을 살고 있던 좌평 흥수는 백강(白江, 지금의 백마강) 하구의 기벌포(伎伐浦)와 사비성 동쪽의 내륙 통로인 탄현(炭峴)이 요충지이므로 그것을 지켜 당나라와 신라 군대의 진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의자왕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당나라와 신라 군대가 백강과 탄현을 지난 뒤에야 뒤늦게 계백 장군의 결사대를 보내 싸우게 했으나 병력 부족으로 패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으로 사비성(泗泌城)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피신했다. 의자왕의 둘째 아들인 태가 사비성에 남아 성을 지켰으나 넷째 아들인 융이 성을 나가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사비성은 함락되었다. 웅진성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서던 의자왕도 전투에 패하면서 항복했다.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과 장병 88명, 주민 12,807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백제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 등 5개의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좌위낭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으며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사비성을 지키게 했다.
  • 당나라로 압송된 의자왕은 그해에 사망했다. 《삼국사기》에는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죽음의 정확한 원인은 확인되지 않는다. 의자왕이 죽자 당나라 고종은 그를 금자광록대부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으로 추봉하고 옛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했다. 그리고 뤄양에 있는 오(吳)와 진(陳)의 마지막 왕들인 손호(孫皓, 재위 264~280)와 진숙보(陳叔寶, 재위 582~589)의 무덤 곁에 의자왕을 묻게 하고 비석도 세웠다. 그러나 의자왕 무덤의 자세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유물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황산벌싸움[편집]

  • 황산벌싸움은 660년(의자왕 20) 나당(羅唐)연합군이 쳐들어올 때 황산벌(논산시 연산면)에서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다. 7세기 중반 백제는 고구려와 화친하여 신라에 압력을 가하였다. 백제는 642년(의자왕 2)에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였으며, 643년(의자왕 3)에는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공격하였다. 계속되는 백제의 공격에 신라는 당(唐)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660년 당 소정방은 13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산둥(山東) 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였다. 당(唐)나라와 신라의 대군이 동서로부터 침입하여 당군은 백마강(白馬江) 북안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을 넘어 황산으로 밀려왔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도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의 험조(險阻)한 곳을 택하여 진을 치고 신라군을 맞았다. 이때 계백은 백제가 위태로움을 미리 알아차리고 출전에 앞서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이고 싸움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가 3방면으로 나누어 네 번의 치열한 공격을 가했으나 번번이 막아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계백도 전사하였다. 이때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이 용감히 전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전사함으로써 전군의 사기를 북돋운 이야기는 유명하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의자왕(義慈王,?~660)〉, 《두산백과》
  2. 의자왕〉, 《위키백과》
  3. 의자왕〉, 《나무위키》
  4. 의자왕(義慈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9-06-25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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