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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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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주시경(周時經)은 국어학자(1876~1914)이다. 호는 한힌샘. 초명은 상호(相鎬). 국문 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한글 기사체의 통일과 연구에 힘썼다.

개요[편집]

  • 주시경은 개화기의 국어학자로, 한글의 전문적 이론 연구와 후진 양성으로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황해도 봉산 출생으로 아버지는 주면석(周冕錫)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본관은 상주이다. 둘째 아들로 태어나 둘째 작은아버지 주면진(周冕鎭) 앞으로 양자(養子) 입양되었다. 어려서 처음에는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양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1887. 6) 후에도 한문학을 배웠다. 그러나 서울에서 신학문에 흥미를 느끼고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1894. 9). 도중에 인천의 관립이운학교(官立利運學校)에 들어가 속성과를 졸업하였으나 정치적 혼란으로 해운계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들어갔다(1896. 4). 때마침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있던 터에, 독립신문사 회계사 겸 교보원(校補員 교정보는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하였다. 그의 저술인 《국문문법》(1905),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말》(1908?), 《국문연구》(1909), 《고등국어문전》(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등은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고, 국어에서의 독특한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다. 국어의 체계화, 표의주의 철자법,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혁신적 주장을 한 국어학의 선봉자였다. 그는 학교 및 강습소에서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특히 한글학의 후진으로 최현배(崔鉉培), 김두봉(金枓奉), 장지영(張志暎) 등 수많은 학자가 있다. 그의 개척자적 노력으로 오늘날의 국어학이 넓게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1]
  • 주시경은 조선말 개화기에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국문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전문적인 이론 연구를 통해 한글 표준화를 추진하였고, 후진양성과 더불어 민족자주 차원에서 한글 보급운동을 펼치며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노력한 개척자이자 선각자다. 본관은 상주, 초명은 상호(相鎬), 자는 경재(經宰), 호는 한힌샘, 백천(白泉)이다. 독립협회 활동 중 한글 표기법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국어 문법을 정리하였다. 독립신문 발행과 각종 토론회, 만민공동회의 자료를 민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글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홀대 받던 우리글 훈민정음을 '으뜸가는 글, 하나밖에 없는 글'이란 뜻을 지닌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현대 한글체계를 정립하고 보급하였으며, 한국어 연구에 공헌하였다. 민족주의 사상을 지녀 한글 교육에도 힘썼으며, 개신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한 것 또한 민족적인 정체성 추구 때문이었을 거라 추측된다. 주시경은 "나무가 자라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요, 그 나무를 가꾸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말을 다듬어서 바르게 말하고 적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2]
  • 주시경은 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 · 백천(白泉).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학원(周鶴苑)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이다. 둘째 아들로 둘째아버지 주학만(周鶴萬)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887년 6월에 상경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계속 배우면서 신학문에 눈뜨자 1894년 9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도중에 인천부 관립이운학교(官立利運學校) 속성과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졸업하였으나, 정계의 격변으로 해운계로의 진출이 무산되고, 1896년 4월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마침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 회계사무 겸 교보원(校補員)이 되었다. 순한글 신문제작에 종사하게 되자, 그 표기통일을 해결하기 위한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그 연구에 진력하였다. 동시에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 ·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가 그의 추방과 함께 물러나서 『제국신문』 기재(記載), 영국 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 W. B.)의 한어교사,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강사를 지내면서 1900년 6월에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3]
  • 주시경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국어학자이다. 20세기 초의 한국어 최고 권위자로서 현대 한국인이 사용하고 있는 현대 한글 표준화, 철자법, 어휘는 주시경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제자들이 이어받아 완성된 것이다. 주시경이 국어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한문 강독법에 의문을 품은 데서 비롯된다. 당시 한문 강독법은 한문 원문에 구결로 조사나 어미를 붙여 그대로 음독하여 달달 외우게 한 뒤에야 우리말로 무슨 뜻인지 풀어 주는 방식이었다. 이를테면 '學而時習之,不亦說乎' →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와 같은 식이었다. 주시경은 마지막 한국말 단계에서야 애들이 말귀를 알아듣는 것을 보고 한문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달아 국어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고 이때부터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이때 본인이 근대화에 열린 사고를 가져 가족과 의절하며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나서서 머리를 깎았단 얘기가 있다. 1914년 7월 27일에 급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다가 사망하였다. 사인이 정확히 표기되지 않지만 대부분은 급체로 인해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39세라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요절이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국어학계는 아까운 인재를 보내야 했다. 제자인 한글학자 열운 장지영은 주시경 선생 50주기 추도식에서 통곡하며 스승의 요절을 애석해 했으며 장지영이 쓴 <주시경 회고록>은 199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가난했던 주시경 이야기를 안타깝게 언급했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인 (새문밖 ) 수색 고택골(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가 1960년 한글학회의 주선으로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로 이장하였고 1981년 12월 12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 묘역으로 재이장하였다. 남양주에 묻혔을 때의 묘비는 서울 동대문구의 세종대왕기념관에 남아 있다.[4]

주시경의 업적[편집]

  •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에서 서당 훈장 주학원(周鶴苑)과 연안 이씨의 4남 2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상주 주씨 시조 주이(周頤)의 17세손. 어린 시절 이름은 상호(相鎬)이고 관명(冠名)은 시경(時經)이다. 할아버지 방렬(方烈) 대에 황해도 평산군 차돌개에 와 살다가 아버지 대에 봉산군 무릉골로 옮겼다. 정승 주세붕(周世鵬)의 후예이다. 국어운동은 특히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무릇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 주시경이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奏任委員),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다. 그의 연구는 새받침을 처음으로 주장한 1897년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 그 방향이 시사된 바와 같이 우리말을 핵심으로 한 국어문법의 체계화였다. 주된 업적은 필사본 『국문문법』(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 (國文講義, 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1907∼1908), 『국어문전음학』(1908), 필사본 『말』(1908년 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1909년 경) 등이며, 학문적 축적을 거쳐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1910)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국어문법의 하나로서 국어의 특성에 입각한 음운 · 품사 · 구문 · 어휘의 4부를 갖추고 있다. 특히, 그 구문론은 직소분석(IC분석)의 원리가 엿보이는 구문도해를 최초로 이룩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 주시경은 거듭된 그 수정판(1911 · 1913), 유인본 『소리갈』(1913년 경)을 거치는 동안에 순우리말로 서술하기에 그 나름대로 성공한 『말의 소리』(1914)를 저술하였다. 마지막 저술인 이 책은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즉, 음운론에서 음소(音素, phoneme)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으로 어소(語素, morpheme)에 해당하는 '늣씨'의 발견은 서구언어학에 수십 년 앞선 큰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구성으로 심화시켜 이러한 학문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공로로 인정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이 형성된 후 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졌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주시경의 후진양성에 관해서는 새로 나타난 「한글모죽보기」(1917년 경)에서 최현배(崔鉉培) · 신명균(申明均) · 김두봉(金枓奉) · 권덕규(權悳奎) · 정열모(鄭烈模) · 이규영(李奎榮) · 장지영(張志暎) · 정국채(鄭國采) · 김원우(金元祐) · 안동수(安東洙) 등 550여 명의 강습생 명단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국어문법 원고[편집]

  • 국어문법 원고(國語文法 原稿)는 1909년 주시경(周時經)이 지은 문법서(文法書)이다. 2012년 12월 24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활자본. 1책. 내용은 소리갈(音聲論) ·기난갈(씨갈:品詞論) ·짬듬갈(월갈:構文論) 등 3가지로 크게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는 현대 문법의 종합적인 체계를 개척하여 오늘날 정서법의 자리를 굳힌 '한글맞춤법통일안'의 기본이론을 세운 저술이다. 그중에서도 국어의 품사를 9개로 가른 품사분류 방법은 특색 있는 것이다. 곧, 임(名詞) ·엇(形容詞) ·움(動詞) ·겻(助詞) ·잇(接續詞) ·언(冠形詞) ·억(副詞) ·놀(感歎詞) ·끗(終止詞)이 그것이며, 문법용어를 순 한글로 표기한 점도 국어문법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다. 1911년 12월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 《조선어문법》으로 개제(改題)하였다.

국어문전음학[편집]

  •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은 1908년 주시경(周時經)이 지은 어학서이다. 활자본. 1권 1책. 현대 문법의 체계를 세운 저자의 《국어문법》이 나오기에 앞서 말본[文典:문법]의 음성론·품사론·문장론 중에서 음성론(소리갈) 부분만 뽑아 그의 제자들이 간행한 책으로, 현대 문법을 논한 고전(古典)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주시경(周時經,1876.11.7.~1914.7.27)〉, 《두산백과》
  2. 주시경〉, 《위키백과》
  3. 주시경 (周時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주시경〉,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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