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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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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崔竩)는 고려 무신정권의 제8대 집권자로 62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였다.

개요[편집]

최의는 1257년부터 1258년까지 1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그는 고려 시대의 최씨 무신정권에서 마지막으로 권력을 잡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조정 대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혼란스러운 정치를 지속하다가 결국 김인준과 유경 등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본관은 우봉이며, 최씨 무신정권의 3대 집정자인 최항의 아들이다. 최의는 외모가 뛰어나고 성품이 조용하며 말수가 적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노비였으나, 최항의 본처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대를 이을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예기에게 시와 글씨를 배웠고, 권위와 임익에게는 정치, 정세신에게는 예법을 배웠다.

1255년(고종 42)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고, 1257년에 아버지가 죽자 유명(遺命)을 받은 선인열(宣仁烈)·유능(柳能) 등과 전전(殿前)·최양백(崔良伯) 등이 야별초(夜別抄)·신의군(神義軍)·서방삼번(書房三番)을 모아 옹위(擁衛)하여 아버지의 권력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에 왕이 차장군(借將軍)에 제수하고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승계하도록 하니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기민(飢民)을 진휼하였다. 이어 쌀 2,570석을 내장택(內莊宅)에 바치고 또 흉년이 들었으므로 자기 창고를 풀어 권무대정(權務隊正)·근장좌우위(近仗左右衛)·신호위교위(神虎衛校尉) 및 백성들을 진휼하였으며, 이해에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처음에는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천계(賤系) 소생으로 조정대신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집권 초기의 선정(善政)도 오래가지 못했다. 1258년 장군 변식(邊軾), 낭장(郎將) 안홍민(安洪敏) 등을 강화수획사(江華收獲使)로 삼아 약탈하였고, 가노(家奴) 이공주(李公柱)에게 참직(參職)인 낭장을 주는 등 어지러운 정사(政事)를 거듭하였다. 또 현명한 선비를 예우하지 않고 경박(輕薄)한 측근인 최양백(崔良伯)과 유능 등만을 믿었으며, 기근이 들었으나 백성들을 진대(賑貸)하지 않아 민심을 크게 잃었다.

최의의 생애[편집]

최의(1233년 ~ 1258년)의 본관은 우봉(牛峯)이고, 아버지는 최항이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비첩(婢妾)이었다. 진양후(晋陽候) 최항이 승려로 있을 때 송서(宋壻)의 여종과 정을 통해 최의를 낳았다. 아버지 최항은 어려서 승려가 되었으나, 할아버지 최우에게 정실에게서 자식이 없어 승려에서 환속되었다. 그런데 아버지 최항 역시 정실에게 자식이 없어 송서의 여종에게서 얻은 그를 후계자로 삼는다. 최항이 적자가 없어 의를 후사로 삼고 경림사(景淋師) 예기(芮記)가 시와 서예를, 권위(權韙)·임익(任翊) 등이 정치를, 정세신(鄭世臣)이 예절을 가르치게 하였다. 1255년(고종 42) 최의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어 홍정(紅鞓)을 하사받았다. 1257년 윤4월에 아버지 최항이 사망한 후 야별초(夜別抄) · 신의군(神義軍) · 서방(書房) · 도방(都房) 등의 옹위(擁衛)를 받아 차장군(借將軍)이 되고, 다시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교정별감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곧 무신 집권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뒤이어 고종이 추밀원부사 판이병부어사대사(樞密院副使判吏兵部御史臺事)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최의가 이를 사양하였다.

최의는 집권하자마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도와주고, 연안택(延安宅)과 정평궁(靖平宮)을 왕부(王府)에 돌렸으며, 집안의 쌀 2,570석(石)을 왕실 재정을 맡은 내장택(內莊宅)에 바치고, 베 · 비단 · 기름 · 꿀을 대부시(大府寺)에 바쳤다. 또 흉년을 당해서는 창고를 풀어 권무대정(權務隊正)과 좌우위(左右衛) · 신호위(神虎衛)의 교위(校尉) 및 방리인(坊里人)의 진휼에 쓰게 하였다. 최의를 다시 추밀원부사 판어사대사(樞密院副使判御史臺事)에 다시 임명하려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뒤이어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다. 이때 민칭(閔偁)이라는 자가 몽골로부터 도망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제가 몽골에 있을 때 대신들이 비밀리에 의논하는 것을 들었는데, 앞으로는 동쪽을 정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기뻐서 집과 쌀 · 의복을 주고 그를 산원(散員)에 임명하였다.

최의는 강도(江都)의 관리들 내부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였고, 자신의 권력 승계에 도움을 준 일부 측근 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점차 통치 질서를 무시하고 심복들의 기반 확대에 권력을 남용하였다. 1258년 장군 변식(邊軾), 낭장(郎將) 안홍민(安洪敏), 산원 정한규(鄭漢珪) 등을 강화수획사(江華收獲使)로 삼아 대민 수탈을 하는 등 횡포하기 시작하였고, 기근이 들었어도 곡식을 내어 진휼하지 않아 인심을 크게 잃었다. 그리고 노비는 원래 큰 공이 있어도 금전이나 포백(布帛)으로 상을 내리고 관작을 주지 않는 것이 법도였으나, 앞서 아버지 최항이 인심을 얻기 위해 처음으로 가노(家奴) 이공주(李公柱) · 최양백(崔良伯) · 김인준(金仁俊, 金俊으로 개명)에게 벼슬을 주어 별장(別將)을 삼았던 예를 좇아, 다시 이공주의 벼슬을 올려 낭장으로 삼았다. 노비를 참직(參職, 참상직(參上職))에 임명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할아버지 최이와 아버지 최항의 정책을 따르면서도 왕실과 재추(宰樞)들의 집요한 반격으로 차츰 그 세력이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그간 논란이 되었던 국왕의 친조(親朝) 혹은 태자의 입조(入朝) 문제가 몽골에 의해서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고려 측에서도 태자의 입조 문제가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양상이었다. 또한 몽골의 대대적인 6차 침략은 본토에서의 일반 민의 변칙적인 저항과 더불어 강도 정부로서도 대응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던 일련의 세력들은 태자의 입조를 통한 강화를 추진하는 한편, 강화 협상에 걸림돌이 되었던 최씨무신정권의 제거를 시도하였다. 결국 1258년 3월 무오정변으로 최의가 살해되었고, 이로써 4대 60여 년에 걸친 최씨무신정권이 붕괴되어 형식적으로나마 왕정(王政)이 복고되었다.

최의는 최충헌(崔忠獻) · 최이(崔怡) · 최항(崔沆)에 이은 최씨무신정권(崔氏武臣政權)의 제4대 집정자였다. 아버지 최항이 최의를 후계자로 삼은 후, 경림(景琳)과 사예기(師芮起)에게 시와 글씨를, 권위(權韙)와 임익(任翊)에게 정치를, 그리고 정세신(鄭世臣)에게 예(禮)를 배우게 하였다. 1257년(고종 44) 윤4월에 집권했으나 1258년(고종 45) 3월 무오정변(戊午政變) 때 김준(金俊) · 유경(柳璥)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1]

최의의 업적[편집]

최의는 고려의 정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를 통해 국가의 통치를 안정시키고, 효율적인 행정을 구현하고자 했다.

최의는 외교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과 협상에 나섰으며, 이를 통해 고려의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최의의 외교적 전략은 고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최의는 고려 사회의 발전을 위해 문화와 교육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유학과 교육 기관의 발전을 장려하며, 인재 양성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이러한 노력은 고려의 지적 수준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신정권[편집]

무신정권(武臣政權)은 의종 24년(1170)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100년 동안 무신이 수립한 고려 시대 정부를 말하며, 그 시기를 무인시대(武人時代)로 부르기도 한다. 최씨정권이라고 흔히 불리며, 최씨 무신정권으로도 불린다. 집권은 62년간 4대로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가 집권한 때이다. 최씨 정권은 고종과 함께 강화도로 옮겨 가서 몽골에 대항한다. 최충헌으로부터 최우, 최항, 최의에 이어지는 동안 7차에 걸쳐 몽골과 전쟁을 치렀으며, 그 와중에 지도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점차 그 세력을 만회하기 시작한 문신들은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했다.

문신들은 외세를 이용하여 무인세력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는 일부 무신과 결탁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졌다. 문신인 류경과 최의의 수하였던 김준에게 최의가 살해되고 1270년 개경 환도와 더불어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무신정권 내부에서 갈등이 생겨 반발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원종이 폐위된다. 그러나 고려 태자가 원나라 황제에 원군을 요청함으로써 1270년 음력 5월 임유무는 사형당하고 무인정권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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