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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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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최치원(崔致遠)은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다.

개요[편집]

  • 최치원은 중국 당나라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유ㆍ불ㆍ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다.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겨 한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자(字)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인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이 즉위한 뒤,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경주의 남산(南山),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淸凉寺), 하동의 쌍계사(雙磎寺)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부산의 해운대(海雲臺)라는 지명도 최치원의 자(字)인 '해운(海雲)'에서 비롯되었다.[1]
  •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86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의 관료로 생활하였다. 신라 말 삼최(三崔)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6두품 출신으로서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承務郞侍御史)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귀국 직후 당에서 쓴 글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던 《계원필경(桂苑筆耕)》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꼽히며,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난랑비서(鸞郎碑序)》는 신라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을 말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받는다.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리고 이어 아찬(阿飡)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산림과 각지를 유랑하다가 경주 남산, 강주(현, 영주시)의 빙산,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의 별서 등에서 은거하다가 마지막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2]
  • 최치원은 통일신라의 6두품 출신 문인이다.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신라삼최 중 하나로, 한국 유학과 문학에 큰 족적을 남겨 후대 고려, 조선 시대까지 숭앙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난랑비>의 서문에 유-불-도의 핵심 가르침이 이미 한국의 고유정신인 풍류(화랑도)에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문성왕 19년(857년) 통일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견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원성왕의 원찰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는 행적이 전한다. 최씨의 시조는 신라 건국기의 인물 소벌도리지만, 사실상의 시조는 최치원으로 여긴다. 다른 최씨의 시조도 경주 최씨에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한민국의 대부분 최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다. 최치원은 뛰어난 천재로서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 해외 유학을 가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을 실현한 후 나라를 살리기 위해 돌아왔지만 다시 한번 신분의 벽에 막혀 좌절한 사람의 대표격으로 알려져 있다. [3]
  • 최치원은 남북국 시대 부산 지역의 해운대(海雲臺)를 명명한 신라의 학자 겸 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아버지는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鵠寺)의 중창 사업에 참여한 최견일(崔肩逸)이고, 형은 해인사 승려 현준(賢俊)이다. 당제(堂弟)는 헌강왕(憲康王) 대 견당 사절단의 녹사(錄事)였던 최서원(崔栖遠)이다. 최치원은 경주 사량부(沙梁部)에서 태어나 12살 때인 경문왕 8년(868)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때인 874년 외국인 대상의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선주(宣州) 율수현(溧水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다. 황소(黃巢)의 난(875~884)이 일어나자 회남 절도사 고병(高騈)의 종사관으로 나가 「격황소서(檄黃巢書)」[토황소 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최치원은 당에서 익힌 학술과 식견을 바탕으로 큰 뜻을 펼치려 했으나 번번이 좌절되자,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의 산천을 노닐며 책 읽고 시 짓는 일로 소일하였다. 최치원이 전국을 방랑할 때 부산의 바닷가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동백섬 인근 바위에 자신의 자(字)를 따서 '海雲臺'라는 글씨를 새겼다. 해운대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고려 현종 14년(1022)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받았고, 국자감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되었다. 부산에서는 동래 향교에서 배향하고 있다.[4]

최치원의 출신과 가계[편집]

  • 최치원은 신라 말에 활동한 대문장가이자 학자, 관료이다. 그는 12세의 나이로 당(唐)에 유학을 가 7년 만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인 빈공과(賓貢科)에 장원 급제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글을 잘 지어서 명성이 매우 높았다. 그는 신라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귀국하였으나, 골품제(骨品制)라는 폐쇄적인 신분제의 벽에 막혀 뜻을 펼치지 못하고, 말년에는 속세를 떠나 은거 생활을 하였다. 그는 신라 말~고려 초라는 변혁의 시대를 살아간 대문장가이자 학자였지만, 자신의 재능과 뜻을 펼치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조(列傳 崔致遠條)에 따르면, 최치원은 신라 왕경(王京, 지금의 경북 경주시)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857년에 태어났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신라시조 혁거세조(新羅始祖 赫居世條)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때 신라 6부는 왕경의 행정구역명이었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신라 왕경 출신이었음은 분명하다. 자(字)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몇 명의 가족 및 친척 이름만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9)의 원찰(願刹)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여한 인물이다. 또 형으로 화엄종(華嚴宗) 승려인 현준(賢俊)이 있었고, 종제(從弟)인 서원(栖遠)의 이름도 확인된다. 이것이 그의 가계에 대해 알려진 전부이다. 한편 신라에서 최씨는 6두품(頭品)을 대표하는 성씨여서, 최치원 집안 역시 6두품으로 여겨진다.

최치원의 사상과 저술[편집]

  • 최치원의 유·불·선 통합 사상은 고려 시대의 유학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교 정치이념을 강조한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학자조차도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治國)의 근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고려 시대에는 유교·불교·도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민간 신앙과 풍습에서는 그것들이 서로 긴밀히 융합하는 모습을 띠었다. 그리고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은 '이름을 들어보면 유교와 불교가 서로 멀어 다른 것 같지만 그 실상을 알면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認其名則佛儒逈異 知其實則儒佛無殊)'며 '유불일치설(儒佛一致說)'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민족의 고유의 경천(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의 사상을 융합하여 형성된 동학(東學)에서도 최치원 사상과의 연관성이 나타난다.
  • 최치원은 문학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후대에 숭앙되었다.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잡시부(雜詩賦)>, <사륙집(四六集)> 등의 시문집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지만, <계원필경(桂苑筆耕)>과 <동문선(東文選)>에는 그가 쓴 시문(詩文)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또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등 이른바 '사산비문(四山碑文)'과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4·6 변려문(騈儷文)을 즐겨 썼으며, 문장이 평이하면서도 고아(高雅)한 품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석이정전(釋利貞傳)> 등의 저술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글씨도 잘 썼으며, '사산비문(四山碑文)' 가운데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는 최치원이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오늘날까지 그의 필적을 전해준다. 이 탑비(塔碑)는 대한민국 국보 4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최치원이 해서체(楷書體)로 쓴 비문은 모두 38행 2,414자로 되어 있다.

최치원 영당[편집]

  • 최치원 영당(崔致遠影堂)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성동(檜城洞)에 있는 신라시대 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의 영당(影堂)이다. 신라시대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1902년에 경주 최씨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마산시 회성동 두곡마을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며 주위로 직사각형의 담장을 둘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고, 솟을대문에는 태극 모양을 그려 놓았다. 최치원은 신라시대 학자이자 문장가로 경주최씨의 시조이며,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 되었다.

함양 최치원 신도비[편집]

  • 함양 최치원 신도비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에 있는 석비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9세기 말 신라 진성여왕(재위 887∼987) 때 고운(孤雲) 최치원이 천령군(天嶺郡) 태수로 있을 때 홍수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숲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래도록 남아 전해왔다. 1923년 최씨 문중에서 선생의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최치원은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로 문장에 뛰어났고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써서 진성여왕에게 상소하는 등 어지러운 나라를 잡는데 힘을 기울였다.

하동 운암영당 최치원 초상[편집]

  • 하동 운암영당 최치원 초상(河東 雲岩影堂 崔致遠 肖像)은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영당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의 초상화. 1979년 12월 29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찰에서 조성한 문신상(文臣像)인데, 고운(孤雲) 최치원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당채(唐彩)로 되어 있으며 배경으로 책상문방과 구름에 둘러싸인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크기는 가로 77.5㎝, 세로 108㎝이며 보존상태가 좋다. 처음에는 쌍계사 연래각(蓮萊閣)에 보관되었다가 1825년(순조 25) 화개의 금천사(琴川祠)로 옮겨졌다. 1868년의 서원철폐령으로 사우가 훼철되자 하동향교에 보관되었다가 1924년 후손들이 세운 사당인 운암영당에 옮겨 보존되어 왔다.

문창공 영정[편집]

  • 문창공 영정(文昌公 影幀)은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있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영정이다. 1990년 12월 15일 대구광역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최치원의 후손인 최흥원이 1865년 대구광역시 동구 지저동에 있는 계림사에 봉안하였다가 1912년 도동 문창공영당으로 옮긴 것이다. 재료는 극채색 견본이며 사용된 색채는 9종으로 홍, 황, 회, 녹, 감, 등(橙), 백, 흑, 담녹이다. 전신좌상으로 신선경을 배경으로 바위 위에 앉아 있고 좌우에 책을 둔 신선도 화풍의 민화이다. 최치원의 영정은 지리산 쌍계사본과 가야산 해인사본이 있다. 1783년(정조 7)에 쌍계사본은 전라북도 태인면의 무성서원으로 옮겨 고종 때 개모(改模)하였고, 해인사본은 경상북도 청도군 및 대구지방으로 옮겨서 봉안하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개모하였다. 상북도 유형문화유산인 청도 계동사의 최치원 영정은 중국풍의 문인상 형식을 취한 민화로 1882년 개모된 것이지만 이 영정은 신선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청도의 영정보다 20년 정도 먼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최치원(崔致遠)〉, 《두산백과》
  2. 최치원〉, 《위키백과》
  3. 최치원〉, 《나무위키》
  4. 최치원〉, 《부산역사문화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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