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
홍경래(洪景來)는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이끈 최고 지도자이다.
개요[편집]
- 홍경래는 조선 순조 시대 평안도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평안도 용강군 다미면(多美面)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 출신이라고 전해지지만 거의 평민 수준으로 곤궁하게 살았다. 그는 유교, 병법, 풍수지리 등을 익히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1797년 평양 향시에 합격했으나 1798년 사마시(司馬試)에 실패하고 집을 나가 방랑하면서 거사를 꿈꾸었다. 1811년 홍경래는 조선 정부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정주를 비롯하여 서북 지방 상당수를 지배했다. 이를 홍경래의 난이라고 한다. 세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청천강 이북을 거의 지배했다. 18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 관군에게 정주성이 함락될 때 관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또한 그의 심복들인 우군칙(禹君則, 1776년 ∼ 1812년)과 홍총각(洪總角, 1785년? ~ 1812년)도 관군에 체포되어 주살되고 말았다.[1]
- 홍경래는 조선 후기 우군칙과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용강(龍岡) 출신. 외숙 유학권(柳學權)에게 학문을 배웠고,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낙방했으나 과거를 치를 만큼 경서에 대한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지녔다. 그와 함께 병서(兵書)나 제반 술서(術書), 특히 『정감록(鄭鑑錄)』 등에 통달하였다. 과거에 낙방한 뒤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다. 당시 과거제도의 부패상,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조선 후기 사회가 가진 모순을 깊이 인식한 뒤, 사회변혁을 위해 치밀한 준비 끝에 거병해 반란 초기에 평안도 일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층 농민들의 반봉건적인 저항력과 절실한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 인식의 한계, 그리고 당시의 사회적 제약으로 끝내 실패하였다.[2]
- 홍경래는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의 주도자이다.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이다. 아버지 홍씨와 어머니 유씨 사이 4형제 중 셋째다. 외숙부 유학권에게 학문을 배워 평양 향시를 통과한 이후 1798년 사마시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가 덜했던 김조순 대에 일어난 것까지 감안하여 세도 정치보다는 당시 서북 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을 등에 업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는 유교적 교양은 물론 병서, 제반 술서, 특히 정감록 등에 통달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결국 홍경래는 과거에 실패한 뒤 출세를 포기하고 집을 나와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당시 과거 제도의 부패상,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한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홍경래는 당시 세도가들의 폭정과 민중탄압을 비판하고 민중의 희망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감록의 '정진인'을 봉기의 이념으로 제시하고, 정진인의 수하를 자처했다. 신라 말기에 미륵이 나타난다며 봉기했던 궁예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3]
-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군(龍岡郡) 출신이다. 아버지를 포함한 가계를 알 수 없으며, 아들만 네 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처 최소사(崔召史)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신분은 대개 몰락한 양반이라고 설명하여 왔으나,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유교는 물론 풍수(風水)에 상당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평양 향시를 통과했고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大科)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고 전한다. 홍경래는 당시의 세도가들의 폭정과 민중탄압을 비판하고 민중의 소망을 반영하여 초인(超人)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鄭眞人說)과 지금의 어려움은 조선에서 천명(天命)이 떠난 것이라는 유교 논리를 봉기의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고 전한다. 이 밖에 성장과정과 과거응시 등에 대해서 19세기 후반 작자미상의 한문단편 《홍경래전》를 근거하고 있지만, 그 내용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1801년(순조 1)에 우군칙(禹君則)과 무장 반란을 논의한 뒤로 10년 동안 각지를 다니며 향촌의 유력자, 무술을 갖춘 장사(壯士), 그리고 부호를 끌어들여 봉기를 준비하였다.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의 직책을 띠고 1811년 12월 18일(양력 1812년 1월 31일) 가산 다복동의 봉기로부터 만 4개월 동안 계속된 반란(홍경래의 난)을 총지휘하였다. 1812년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정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擧兵逆魁)'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민중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체제가 아니라 피지배층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4]
홍경래의 생애[편집]
- 홍경래는 1811년(순조 11) 평안도 일대에서 정권 타도와 지역차별 철폐를 내세우며 저항의 기치를 올렸다. 비록 관군 등의 진압군에 의해 제압되었으나, 그는 죽어서도 변혁을 바라는 대중 속에 스며들어 혁명가로 다시 부활했다. 1811년 12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평안도 가산에서 일군의 무리들에 의해 저항의 기치가 올려졌다. 그 중심에 평서대원수라 불리던 홍경래가 있었다. 홍경래의 출신 성분에 대해 아직 정설은 없다. 일부에서는 몰락한 양반 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부는 평민 출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가 글에 대해서 조예가 있었고, 아이들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로 봐서는 최소한 평민 이상의 신분 소유자였음은 분명하다.
- 가산에서 풍수로 부호의 집을 드나들던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뜻이 통하자 반란을 모의하였다. 그는 시국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을 이용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당시 향촌에서 부를 축적해 하층지배자로 진출한 계층과 황해도 · 평안도 일대의 사상인(私商人)에게 접근하였다. 또한 관로가 막혀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 지식층에게도 접근해 진사 김창시(金昌始) 등을 반란군에 끌어들였다. 한편으로는 우군칙과 친하게 지내던 이희저(李禧著)를 이용해, 대상(大商)들의 후원을 받도록 하였다. 즉, 정주성의 거부(巨富) 이침(李琛) · 김석하(金石河), 안주상인(安州商人) 나대곤(羅大坤), 송상(松商) 박광유(朴光有) · 홍용서(洪龍瑞)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 역사(力士)의 발굴에도 주력해 제상(蹄商) 홍총각(洪總角), 평민 이제초(李濟初) 등의 장수, 그리고 지략과 무용을 겸비한 우군칙의 제자 김사용(金士用) 등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가산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10여 년 간 준비한 뒤, 1811년(순조 11) 극심한 흉년으로 인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 난을 일으켰다. 난 초기에는 각지의 내통 세력의 도움으로 민폐를 끼치지 않고 엄한 군율에 따라 쉽사리 가산 · 곽산 등 7개읍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안주 · 연변의 진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어나는가 하면, 홍경래마저 부상을 당하자 사태가 불리해졌다. 더욱이 봉기의 주축 세력 가운데에는 그를 암살해 관군에 공을 세우려는 배반자도 생겨났다. 이런 가운데 박천 · 송림전투에서 관군에게 패배하면서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반란군은 고립된 정주성에서 4개월간을 버티었으나, 결국 성은 함락되고 그도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 홍경래는 정주성에서 죽었으나, 당시 핍박받던 농민들은 '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 홍경래이다. 진짜 홍경래는 살아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곳곳에서 저항하였다. 1826년 청주 괘서사건의 죄인으로 국문을 받던 김치규는 홍경래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죽지 않았다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농민이나 변혁을 바라는 대중들에게 홍경래의 실제 생사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변혁 의지를 키워갔다. 한편 홍경래는 이후 혁명가로 또는 풍운아로 다시 탄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돈화는 백두산인이라는 필명으로 천도교 기관지인 '개벽'에 기고한 글에서 홍경래를 장군이라 호칭하며, 시세(時勢)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다시 시세를 만드는 것이 이치인데 홍경래와 같은 인물은 한 몸으로써 시세를 만든 자라 일컬었다. 또 이윤재는 1931년 '동광'에 기고한 글에서 홍경래와 봉기군을 혁명군이라 명명하면서 그들의 최후를 기술한 뒤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나게 한다고 하며 실패를 아쉬워하였다.
홍경래의 난[편집]
- 1811년(순조 11) 홍경래 · 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이다. 1811년 12월부터 1812년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일어난 반란이다. 조선 후기 봉건사회는 17, 18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移秧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다. 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지주와는 다른 서민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선된 농업 생산기술과 시장의 확대라는 유리한 여건 속에서 차경지(借耕地)의 확대를 통해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부농이 성장하였다.
- 다수의 소농민들은 몰락해 영세빈농·전호(佃戶)가 되었다.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이 시기 농민층 분해는 다수의 소농민들을 중세사회의 특징인 토지에 대한 긴박을 해체시켜 임노동자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부농·서민지주로 양극 분해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상공업은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자의 전업화(專業化)가 이루어지고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私商人)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개성상인이나 의주상인들은 대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등 상권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봉건적인 신분 질서의 구조에도 부(富)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로 양반의 증가와 평민·천민의 감소, 몰락양반의 다수 존재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절대적인 권위도 동요되었다.
-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민간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난에서 부농과는 달리 소극적인 구실만을 담당했던 광범한 소농·빈민층은 이후 임술민란(壬戌民亂)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또, 이 난에서는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체제가 구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평안도 지방이 주요 무대였지만 동시에 도성(都城)에서 소론 박종일(朴鍾一)을 중심으로 중인·서얼층이 연계해 정권 탈취를 계획한 것이라든지, 기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층의 산발적인 소요는 같은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홍경래의 난에 대한 평가는 6·25 이전에는 오다(小田省吾) 등에 의해 당쟁사적 관점에서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이라든가, 이를 이용한 홍경래 개인의 정권 탈취 기도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체성 비판의 일환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자본주의 맹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달라졌다. 즉 그 주도층의 성격을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 경영형부농, 서민지주, 사상인 및 일부 몰락한 양반지식인 등이 광산노동자·유민·빈농을 동원해 일으킨 반봉건농민전쟁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충의집전[편집]
- 충의집전(忠義集傳)은 조선 순조 때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인물들의 충의 사적을 적은 책이다. 목판본. 1책. 1837년(헌종 3) 김성로(金聖櫓) 등이 엮어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관군편에서 진압을 도운 여러 충의의 인물들은 난을 평정한 뒤 의회당(義會堂)을 짓고 1년에 한 차례씩 모였는데, 그 회합을 계기로 이 책이 편찬되었다. 내용은 상편에 옛날 명현들이 서북지방에서 나라를 위하여 활동한 사적을 싣고, 중편에 홍경래의 난 평정 사실을 실었으며, 하편에 의회당의 사적 등을 수록하였다. 책머리에 순조의 어필(御筆) 전교(傳敎)가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홍경래〉, 《나무위키》
- 〈홍경래〉, 《위키백과》
- 〈홍경래의 난〉, 《나무위키》
- 〈홍경래(洪景來,1771~1812)〉, 《두산백과》
- 〈홍경래 (洪景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홍경래의 난 (洪景來의 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봉권 기자, 〈민초들의 눈으로…조선 500년史 신랄한 비판〉, 《국제신문》, 2024-10-24
- 새벽꽃, 〈세도정치의 시작과 홍경래의 난(조선 후기 권력의 변천과 백성의 고난)〉, 《네이버블로그》, 2024-09-27
- 현동민 기자, 〈(오늘의 역사) 성난 민초를 이끌다 ‘홍경래의 난’〉, 《인천투데이》, 2024-01-31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