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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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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

왕망(중국어:王莽wáng mǎng)은 전한(前漢) 말기의 권신이자 신(新)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개요[편집]

왕망은 중국 전한(前漢) 말의 정치가이며 '신(新)' 왕조(8∼24)의 건국자이다.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하여 전한의 황제 권력을 찬탈하였다. 하지만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개혁정책을 펼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왕망은 유교를 중시하였고 주나라 시대의 정책을 폈다. 주(周)나라 시대의 정전법(井田法)을 모방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은 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민의 빈민화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또 가난한 농민에게 싼 이자의 자금을 융자하여 주는 사대제도(賖貸制度)를 두기도 하였고 노비 매매를 금지시켰다. 이것도 사상적으로는 유교 교전인 《주례(周禮)》에서 볼수 있는 고전적인 것이나, 화폐제도 개혁과 평준(平準) ·균수(均輸) 등 여러 상공업통제책과 함께 당시의 현실이 요청하는 정책이었다. 왕망의 이러한 정책은 후세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하였다.[1]

가계[편집]

왕망은 중국 전한 말의 외척, 권신이자 신의 유일한 황제로, 자는 거군(巨君)이며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람이다.이다. 본관은 원성 왕씨(元城王氏)로서, 그 출신은 제북왕 전안(田安)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왕만(王曼)이며, 어머니는 거씨(渠氏)며, 형은 왕영(王永)이다.

황제 즉위 전의 작위는 안한공(安漢公)이며, 즉위 전의 전체 칭호는 안한공·재형·섭황제(安漢公·宰衡·攝皇帝)다. 원제의 황후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 성제(成帝)의 어머니 쪽 사촌형제에 해당한다.

왕망은 왕만(王曼)의 차남으로 왕우(王宇)·왕획(王獲)·왕안(王安)·왕림(王臨)·왕흥(王興)·왕광(王匡) 등의 아들을 두었다. 손자는 왕천(王千, 공륭공(功隆公).)·왕수(王壽, 공명공(功明公).)·왕길(王吉)·왕종(王宗, 공숭공(功崇公).)·왕세(王世)·왕리(王利) 등이 있으며, 딸은 평제(平帝)의 황후가 된 왕씨와 함께 왕엽(王曄), 목수임(睦脩任). 왕첩(王捷) 등이 있었다. 본부인은 한의 승상을 지낸 왕흔(王訢)의 손자인 의춘후(宜春侯) 왕함(王咸)의 딸인 효목황후(孝睦皇后) 왕씨이다.

생애[편집]

왕망(기원전 45년 ~ 기원후 23년)의 자는 거군(巨君)이며 산둥(山東)에서 출생.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사실(史實)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하여 전한의 황제 권력을 빼앗았다. 왕왕후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가 되어 정치를 한 손에 쥐었다.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섬겼으므로 왕봉의 인정을 받았다. BC 33년 황문랑(黃門郞)이 되고, BC 16년에는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되었다. 그 뒤 왕씨 일족의 두령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BC 8년 38세로 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다음의 애제(哀帝)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애제가 1년 만에 아들 없이 죽자 태황태후 왕씨와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사마에 복귀하였다.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하여 자기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며, 자기에게는 안한공(安漢公)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를 붙여 평제의 보정자(輔政者)로서의 외관을 갖추었다. 그는 평제의 어머니를 비롯한 외척세력을 모두 숙청하였고 자신의 아들 왕우(王宇)도 독살하였다.

AD 5년에는 평제를 독살한 뒤 2세의 유영(劉嬰:宣帝의 현손)을 세워,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며 인심을 모았다.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쓰인 흰 돌이 나타나게 하고, '왕망이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 되는 새 우물을 출현시키는 연극을 벌였다. 이 신비적인 형태를 수반하여 인간에게 표시되는 천명(天命)을 부명(符命)이라 하는데, 왕망은 이 부명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AD 8년 유영을 몰아내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新)'이라 하여 황제가 됨으로써 선양혁명에 성공하였다.

왕망의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한말의 여러 모순과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하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 지배를 꾀한 그의 정책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각지에 있는 호족들과의 이해(利害)가 상반된 점에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그는 대외정책에도 실패하여 사회 혼란을 증대시켰다. 흉노(匈奴)와 서역 여러 나라가 그를 이반(離反)하였고, 동쪽에서는 고구려와 충돌하였다. 이와 같이 내외정세가 악화된 속에서 18년 '적미(赤眉)의 난'이 일어났고, 각지의 농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22년에는 한나라 황족의 한 사람인 난양(南陽)의 호족 유수(劉秀:後漢의 光武帝)가 군대를 일으켜, 23년 곤양(昆陽:河南省 葉縣)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왕망은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에서 부하에게 찔려 죽음으로써 건국한지 15년에 멸망하고, 한왕조의 혈통을 이은 유수(광무제)에 의해 후한이 건국되었다. 그의 수급은 경시제가 있던 성으로 보내졌으며, 몸은 공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마구 찢어지고 흩어졌다고 한다. 왕망의 죽음으로 신은 멸망하였다.

신 왕조의 폭정과 최후[편집]

신(新)은 중국의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세운 왕조(8∼23)이다. 왕망(王莽)은 전한 황실의 외척 왕씨의 일족이었다. BC 8년 대사마가 되었고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한 후 안한공(安漢公)이 되었다. 그러나 평왕을 죽인 다음 2세(歲)의 영(嬰)을 세워 스스로 섭정이 되어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으며, 8년에는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왕망의 개혁정책은 실정에 맞지 않아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흉노(匈奴)를 비롯한 대외정책도 실패했기 때문에 안팎으로 불안과 동요가 고조되었다.

평제가 자신의 외가인 위씨가 박살 났음을 알고 불만을 품자,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당시 겨우 2세였던 선제(제10대)의 현손 유영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유자영이라고 부르고 자기가 섭정하면서 섭황제를 칭했다. 이때부터 전한은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다. 왕망은 결국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여 초시 원년(기원후 8) 11월에 한나라를 멸하고 신(新)나라를 건국한다. 그리고 수도 장안(長安)의 이름을 상안(常安)으로 고쳤다. 그는 이렇게 가짜 선양의 시조가 되었다. 이러한 선양 방식은 무려 1천 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북송 시대에 이민족 왕조들 시절에 사라졌다.

제위를 찬탈한 뒤부터 왕망은 마각을 드러내어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왕망은 전국의 토지를 왕전으로 고쳐 조정 소유로 귀속시키고 사사로운 매매를 금지했으며, 관직 제도는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5등작을 실시했다. 화폐제도를 개혁하여 상안(장안), 낙양, 한단, 임치, 완, 성도 등 전국 6대 도시에 오균사시(五均司市) 관직과 전부관(錢府官)을 설치하여 오균육관(五均六莞) 제도를 실시했다. 오균육관에서는 외상을 주는 것과 돈을 빌려주는 것을 시행하고 물가를 관리하게 했으며 술, 소금, 쇠붙이 등에 세금을 매기게 했다. 그러나 제도가 복잡하여 기존 제도보다 훨씬 못했고, 물가가 폭등해 오히려 사회혼란을 야기했다.

왕망의 폭정에 참다못한 각지의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 눈썹에 붉은 물감을 들인 도적들의 집단인 적미군을 비롯하여 전한의 황족 유현의 지휘하에 유수(광무제) 형제, 그 외에 공손술, 연잠, 왕랑 등 군벌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왕망은 겉으로 태연한 척하면서 머리와 수염에 물감을 들였는데, 너무 걱정을 하느라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셌기 때문이었다. 또 근심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 병서를 읽다가 술, 그리고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치품인 말린 전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고, 피곤해지면 베개도 없이 책상에 엎드려서 자기도 했다.

경시 원년(23년), 9월 1일에 유현의 군대가 장안의 선평문을 부수고 진입하자 왕읍, 왕림, 왕순, 대운 등의 신하들이 병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저항하였으나, 날이 저물자 대부분의 신하와 병사들이 왕망을 배신하고 도망쳤다. 왕망은 자신이 평소에 그토록 신뢰하던 주술도구인 위두를 곁에 두고 유현의 군대에게 저항했지만 당연히 효과를 보지 못했다. 9월 2일, 결국 왕망한테 분노한 장안의 주민들이 노략질을 당할까 두려워서 모두 왕망을 죽이려 봉기를 일으켜 궁전으로 몰려갔다. 왕망 일가를 멸족시킨 유현은 마침내 경시제로 즉위했으며 조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시제의 능력은 백성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백성들은 오히려 왕망의 시대를 그리워했다. 경시제는 적미군들이 장안으로 들어올 때 잡혀서 즉위한 지 2년 만에 유폐된 뒤 그들에게 시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왕망전[편집]

왕망전(王莽錢)은 한(漢)나라를 일시 빼앗은 왕망이 발행한 화폐의 총칭이다. 7년에 대천오십(大泉五十) ·설도(契刀) ·착도(錯刀) ·국보금궤직만포(國寶金匱直萬布)를 만들고, 재래의 오수전(五銖錢)과 함께 유통시켰으나 9년에 대천오십만을 남기고 따로 소천직일(小泉直一)을 발행하였다. 이어 금화 1품(品), 은화 2품, 귀보(龜寶) 4품, 패화(貝貨) 5품, 천화(泉貨) 6품, 포화(布貨) 10품을 만들었다. 그 뒤 대천오십과 소천직일을 제외한 귀(龜) ·패(貝) ·포(布)류를 전폐하는 동시에 백성의 주전(鑄錢)을 엄금하였다. 14년에 이르러 금 ·은 ·귀 ·패의 화폐를 부활하고 그 가치를 개정하였으며 대천오십과 소천직일을 없애고 새로 화포(貨布)와 화천(貨泉)을 발행하였다. 왕망의 화폐정책은 주(周)나라 제도로 복귀하려는 이상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지만 이익에 눈이 어두워 명목화폐(名目貨幣), 즉 실질이 명목을 따르지 못하는 화폐를 채용했기 때문에 부질없는 번잡에 흘러 실패로 끝났다.

화천[편집]

화천(貨泉)은 중국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때 주조된 경화이다. 주조연대는 《한서(漢書)》의 <식화지(食貨志)>에는 천봉(天鳳) 1년(14), <왕망전>에는 지황(地皇) 1년(20)으로 되어 있으며, 후한(後漢)의 건무(建武) 16년(40)에 오수전(五銖錢)이 부활될 때까지 통용된 청동화이다.

둥근 몸통에 4각형의 구멍이 뚫렸고, 겉쪽에 '貨 ·泉'의 두 자가 새겨져 있다. 여러 가지 크기가 있으나, 당초의 규격은 지름이 1치(3.3cm), 무게가 5수(약 8g)였다. 안쪽이 두껍고 바깥쪽으로 갈수록 얇게 되어 있는 데서 병전(餠錢)이라 속칭되기도 한다.

왕전제[편집]

왕전제(王田制)는 중국 왕망(王莽) 때의 토지제도이다. 전한(前漢)에 이어 신(新)을 세운 왕망이 개국 후 직면했던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호족의 토지 겸병에 의한 대토지소유와 몰락한 농민의 예속화로 인한 노동력의 편재, 그리고 이로 인한 정치·사회상의 불안과 동요 등이었다. 따라서 이같은 문제를 직시한 왕망은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왕전제를 실시하였다.

왕망은 전국의 토지를 국유로 삼아 왕전이라 명명하고, 자유 매매를 금지하였다. 남정(男丁)이 8명 이하인 집에서 1정(井), 즉 900무(畝) 이하의 토지만 소유하게 하고, 그 이상의 토지는 일족 내지 향당(鄕黨)에게 돌려주어 토지가 없는 사람이 소유하게 하였다. 그리고 토지가 없는 호는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하고, 국가에서 지급하는 토지도 1정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법을 위반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은 변경에 유배 보냈다.

이러한 왕전제의 목적은 국가권력에 의하여 호족의 대토지소유를 억제하고, 토지가 없는 일반농민에게 최소한의 토지를 소유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실시과정에서 제도상의 미미·시행착오, 지나친 현실성의 무시에서 오는 여러 요인으로 전국적인 반대에 부딪쳐 제정된 지 3년 만에 폐지되었다. 왕망이 무리하게 왕전제를 실시한 것은 대토지소유와 토지소유의 편재가 토지사유제·토지자유매매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대(漢代)에 있어서 이러한 현상은 무제 때부터 심화되었으며, 이에 동중서(董仲舒)는 한전제(限田制)를 상주하여 대토지소유를 제한할 것을 주장하였다. 애제(哀帝) 때에는 잠시 이 제도가 실시되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따라서 왕망의 왕전제 구상과 실시는 그 자신이 유가 출신으로서 '정전제(井田制)'에 기반한 토지제도와 역대 경제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평가[편집]

왕망은 통치 기간에 유의미한 업적도 없이 폭정을 저질렀으며 허무하게 멸망하고 그 결과는 과거 초한전쟁 시절처럼 지방관들이 할거해서 광무제가 이를 수습할 때까지 전란이 이어졌기에 후한은 전한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전란의 후유증에 제대로 시달렸다.

왕망은 한나라의 황제를 선양으로 폐위시킨 역적인 동시에 외척의 폐해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왕망이 세운 정책의 결과는 나쁜 방향으로 치달았고, 여기에 제위를 선양이란 이름으로 찬탈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불안정해서 지방관들은 왕망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불복했으며 오히려 반기를 들었다. 이와 동시에 지방관들이 지역 패권을 다투기 위해 대란이 발생했고, 후한의 성립으로 한나라의 복고가 이루어졌다. 왕망 시기부터 광무제까지 이어지는 전란기에는 그야말로 다시 초한전쟁 시절로 되돌아갔고, 안전한 곳이 단 하나도 없이 폐허가 된 성과 마을, 시체로 가득한 곳이 되었으며 감정적인 대립으로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학살하는 지옥도가 도래했다. 이러한 악영향으로 전근대에는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평가가 매우 나빴다.

왕망은 신나라를 세운 뒤 서주 초기를 숭상했던 초기 유교사상을 현실에서 재현하려 애썼다. 나름대로 시도는 가상했으나 왕망은 지나치게 설정 놀음을 좋아하여 관직 이름과 지방 이름을 바꾸고 화폐 정책도 조변석개했다. 또한 유교 이론을 숭상했다고 하나 그 주장자가 자기 비위를 거스르거나 그 이론이 역시 자기 이론과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았으니 설령 공 • 맹을 숭상하는 유학자들이 봤다고 해도 유가적 입장에서 왕망은 엄청난 사이비였다. 왕망은 비현실적으로 극단적인 복고주의자, 이상주의자, 형식주의자, 국수주의자였다. 권모술수를 비롯한 정치력은 뛰어났으나 행정에는 무지했다. 개혁 방향은 분명 틀리진 않았지만, 실무능력과 인적 자원 활용능력이 떨어지면 실패함을 잘 보이는 예시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왕망(王莽,BC 45~AD 23)〉,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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