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징
위징(중국어:魏徵wèi zhēng)은 중국 당나라 초기의 공신ㆍ학자(580~643). 자는 현성(玄成). 현무문의 변(變) 이후, 태종을 모시고 간의대부가 되었다.
개요[편집]
위징은 당(唐)나라 초기의 관료로 간의대부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재상을 지냈다. 주(周) ·수 ·오대(五代) 등의 정사편찬과 《유례(類禮)》 등의 편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자 현성(玄成). 시호 문정공(文貞公). 곡성(曲城: 山東省) 출생. 수(隋)나라 말 혼란기에 이밀(李密)의 군대에 참가하였으나 곧 당고조(唐高祖)에게 귀순하여 고조의 장자 이건성(李建成)의 유력한 측근이 되었다. 황태자 건성이 아우 세민(世民)과의 경쟁에서 패하였으나 위징의 인격에 끌린 태종의 부름을 받아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의 요직을 역임한 후 재상(宰相)으로 중용되었다. 특히 굽힐 줄 모르는 직간(直諫)이 유명하며, 주(周) ·수 ·오대(五代) 등의 정사편찬(正史編纂) 사업과 《유례(類禮)》 《군서치요(群書治要)》 등의 편찬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1]
생애[편집]
위징(580년 - 643년)은 당나라의 정치가이다. 당 태종을 섬겨 간의대부(諫議大夫) ・ 좌광록대부(左光綠大夫)에 임명되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직간(直諫)으로 이름이 높았고 당 태종과의 문답은 대부분 《정관정요》에 실려 있으며,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疏)는 그중 가장 유명한 글이다.
위징은 거록(巨鹿) 곡양(曲陽) 사람으로, 대중(大中) 6년(852년) 11월에 세워진 『위공선묘비』(魏公先墓碑)에는 위징의 할아버지는 교(釗), 아버지는 완(琬)으로, 부인은 하동 배씨(河東裴氏) 집안의 여자였다고 전한다. 위징은 어려서 집이 가난하였고, 수 말기에 이밀이 지휘하던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갔다가 이밀이 패한 뒤 당에 귀순하였다가 다시 두건덕의 포로가 되었는데, 두건덕은 그의 재능을 아껴서 자신의 휘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건덕이 패한 뒤에 당으로 돌아가서, 태자 이건성(李建成)의 측근으로서 태자선마(太子洗馬)라는 지위에 올랐다.
당시 이세민의 인기와 권력을 불안히 여긴 태자 이건성에게 위징은 이세민을 독살하여 제거할 것을 진언했지만 이건성은 이를 듣지 않았고, 결국 현무문의 변으로 이세민에게 살해당했다. 위징은 이를 당연한 결과라 받아들이고, 이세민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각오하였고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위징을 문책하던 중, 이세민의 형인 이건성이 위징 자신의 충언을 듣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 것과 자신의 주군을 보필하기 위하여 충언을 한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님을 말하였고, 자신이 이세민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음을 당당히 인정하였기에, 이세민은 그의 솔직함을 높이 사서 그를 간의대부로 삼았다.
위징은 비서감(秘書監), 시중(侍中) 등의 직책을 두루 거쳤으며, 태종에게 2백 회가 넘는 간언을 올렸다. 《자치통감》 권196에 보면, 위징이 죽었을 때 태종은 몹시 슬퍼하였다고 한다. 당 태종은 위징이 죽기 직전, 그의 장남 숙옥(叔玉)에게 딸 형산공주를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생전에 위징이 태종에게 올렸던 간언서의 부본을 사관(史官) 저수량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위징이 명성을 얻기 위해 그런 것이라 의심하면서 위징과 했던 약속을 깨고 형산공주를 장손의에게 시집보냈을 뿐 아니라, 위징의 무덤에 세웠던 묘비까지 부숴버렸다(묘비의 글은 당 태종 자신이 친히 쓴 것이었다). 또한 생전에 위징은 중서시랑(中書侍郎) 두정륜(杜正倫)과 이부상서(吏部尙書) 후군집을 재상이 될 재목(宰相之才)이라며 천거했는데, 위징이 죽은 뒤 두 사람은 위징과 사사로이 파당을 맺었다는 당 태종의 의심을 사서, 두정륜은 죄를 지어 쫓겨나고 후군집도 모반죄로 처형되었다.
정관 18년(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지만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탄식하며 "위징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나한테 이런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魏征若在, 不使我有是行也)"이라며 한탄하고, 부숴버렸던 위징의 묘비를 다시 세우게 했다. 위징은 태종의 명으로 편찬하게 한 《수서》의 서론(序論)과 《양서》, 《진서》, 《제서》(齊書)의 총론(總論) 등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그의 발언은 《정관정요》에 대부분 수록되었다.
현무문의 변[편집]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은 626년 7월 2일에 당 고조 이연의 후계자를 두고 발생한 태자 이건성(李建成), 제왕 이원길(李元吉) 세력과 진왕 이세민(李世民) 세력의 정치적, 군사적 충돌이다. 이에 승리한 이세민이 정국을 장악했고, 고조의 양위를 받아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세민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한 이건성은, 이세민으로부터 예우를 받던 모신(謀臣) 방현령과 두여회, 울지공 등을 중상모략으로 배제했다. 그 후 이건성의 신하 위징과, 이연의 사남인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이 이세민 암살을 건의하였으며 계속 이세민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건성과 이원길의 가족들은 모두 이세민이 보낸 군사들에게 몰살당하였다. 아들 이세민에게 강제적으로 황위를 내준 태상황 이연은 635년에 죽을 때까지 거의 유폐된 채로 지냈으며 이연에게 이세민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윤덕비도 처형당하였다.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죽이라 했던 위징은 오히려 이세민에게 중용되어 명재상이 되며, 신료들 중 가장 높은 직위인 승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정관정요[편집]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중국 당 때에 오긍이 편찬했다고 전하는 당 태종의 언행록이다. 제목의 「정관」은 태종의 연호, 「정요」란 '정치의 요체'라는 뜻이다. 당 태종이 신료들과 정치에 대해서 주고받은 대화를 엮은 책으로서 예로부터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여겨져 왔다. 당 중종 때에 상정된 것과 당 현종 말기에 그것을 개편한 것이 있는데, 양자를 비교하면 제4권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원나라의 과직(戈直)이 송나라의 구양수나 사마광의 평을 교부해서 정리한 것을 명나라 때에 발간하여 증보된 「과직본」과, 당나라 때에 일본에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구본(舊本)의 두 가지가 있다.
《정관정요》의 편찬은 현종 때의 학자 오긍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태종 사후 40~50년이 지난 뒤로, 측천무후가 퇴위하고 중종(中宗)이 복위하여, 당 왕조가 재흥한 무렵이었다. 이전부터 역사 편찬에 종사하여 태종 시대의 치적을 잘 알고 있었던 오긍은 중종의 복위를 몹시 기뻐하고, 정관지치라 불린 당 태종 시대의 모습을 올바른 정치의 표본으로 삼고 싶다는 소원을 담아, 《정관정요》를 지어 중종에게 바쳤다. 그 뒤 재상 한휴(韓休)에 의해 이 책은 높은 평가를 얻어, 후세의 표본이 되도록 오긍에게 명하여 다시 개편해 올리도록 했다. 이로써 《정관정요》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정관정요》의 주된 내용은, 태종과 그를 보좌한 중신(위징 · 방현령 · 두여회 · 왕규 등) 45명과의 정치 문답을 통해, 정관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가져온 치세의 요체를 다루고 있다. 태종이 걸출했던 것은 자신이 신하를 훈계하고 지도하는 영명한 군주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신하의 직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항상 최선의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매일 자각하며 노력했던 점에 있다는 것이 《정관정요》의 주된 내용이다. 본서는 오랫동안 교양인의 필독서로서 중국에서는 당나라 당대의 헌종(憲宗), 문종(文宗), 선종(宣宗) 뿐 아니라 당 이후 송의 인종(仁宗), 요(遼)의 흥종(興宗), 금(金)의 세종(世宗), 원(元)의 쿠빌라이 칸, 명의 만력제(萬曆帝), 청(淸) 건륭제(乾隆帝) 등의 군주들이 애독하였다. 또 일본에도 헤이안 시대에 오래된 사본이 전해져 호조 씨 · 아시카가씨 · 도쿠가와씨 집안 등 정치 중역에 있던 사람들에게 애독되었다.[2]
충신 위징[편집]
위징은 여섯 명의 주군을 바꿔가며 모셨으나 결국 역사의 충신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목에 칼이 들어오는 위험한 직책을 맡았다. 하지만 위징은 이 직책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최고 권력자와의 위험한 관계를 잘 유지했고 죽어서도 충신으로 기록되었다.
현명한 군주였던 당 태종은 자신의 권력에, 자신의 욕망과 절대 권력의 폭력성에 제동을 가할 인물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적역으로 위징을 선택했다. 위징은 목숨을 걸고 이 직책을 수행했다. 위징은 감히 간언했고 능히 간언했고 훌륭하게 간언했다. 6번이나 주군을 옮겨 태종을 만난 위징. 태종의 가신은 아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태종의 충신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당 태종의 잘못과 게으름과 나태를 꾸짖었다.
위징은 뛰어난 정치적 지혜와 외교적 능력으로 평가받으며, 후대 정치가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로 남아 있다. 그의 조언은 신중하고 철저했으며, 이는 당나라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다. 또한 이건성과의 관계를 통해 위징은 황태자의 신뢰받는 조언자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징의 생애는 정치적 리더십과 조언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며,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교훈을 제공한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위징(魏徵,580~643)〉, 《두산백과》
- ↑ 〈정관정요〉,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위징(魏徵,580~643)〉, 《두산백과》
- 〈위징〉, 《위키백과》
- 〈정관정요〉, 《위키백과》
- 〈위징〉, 《나무위키》
- 흑곰, 〈당태종 과 위징, 이적, 소정방...〉, 《네이버블로그》, 2023-05-12
- 전문교사, 〈당나라 황태자 이건성의 참모였던 위징〉, 《네이버블로그》, 2024-08-26
- 언제나 봄, 〈인생의 후반전을 위한 필독서 공자 위징 사마천 인생사 요약 남자의 후반생〉, 《네이버블로그》, 2023-09-10
- 박동진, 〈당 태종의 거울 '위징'.〉, 《네이버블로그》, 2024-06-18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