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다.
개요[편집]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 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1]
생애[편집]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 정치, 윤리학, 도덕 과학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BC 384년 스타게이로스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고, 모친인 파이스티스는 칼키스의 이민 출신이다. 왕자 필리포스 2세의 소꿉동무로 궁정에서 자랐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어 연고자인 프록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17세 때(기원전 367년)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입문하였다. 이후 플라톤의 사망시까지 약 20년 동안 그곳에서 연구에 정진, 학생 지도도 담당하였다. 이오니아 문화를 배경으로 의가(醫家)의 실증정신(實證精神) 아래 성장한 그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충실한 플라토니스트로서 출발한 그는 맹렬한 이데아 비판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 아카데미아기(期)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期)로 나눌 수 있다. 아카데미아기 저작은 기원전 360년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플라톤의 대화편을 본떠서 ⟪그릴러스⟫, ⟪유디머스⟫, ⟪프로트렙티커스⟫(철학에의 권유) ⟪향연(饗宴)⟫, ⟪소피스트⟫, ⟪정치가⟫, ⟪메닉시너스⟫ 등 많은 대화편과 기타 글이 씌어져 간행되었다. 동시에 자연학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연구도 시작되어 ⟪자연학⟫의 일부(제1, 2, 7권) ⟪천체론(天體論)⟫ 제1권과 ⟪정치학⟫ 제2권의 일부, ⟪데 아니마⟫ 제3권과 ⟪논리학⟫의 일부(⟪토피카⟫ 등)와 ⟪형이상학⟫(제12권) 등이 쓰였다.
플라톤이 죽기(전 347) 직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 헤르미아스의 초청으로 아타르뉴스로 갔다. 아카데미아 학두에 취임한 스페우시포스의 수학주의(數學主義), 피타고라스주의에 만족하지 못한 데다 올린토스의 함락으로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참주의 보호 아래 왕의 질녀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그곳 가까운 아리스에 살면서 3년간을 강의와 연구로 보냈다. 학우인 에라스토스와 코리스코스도 같이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철학에 대하여⟫를 썼고 이데아나 이데아 수(數)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한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레스보스 태생인 테오프라스토스의 알선으로 미치레네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발전되어 있었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의뢰와 헤르미아스의 추천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가정교사로서 미에자로 갔다. 왕자를 위하여 호메로스를 가르쳐 주었고 ⟪호메로스 문제⟫를 썼다. 또 ⟪군주정치론⟫ ⟪식민정책론⟫도 저술하였다. 기타 그리스인에 관한 국가제도의 수집이나 기록을 하였다. 그 일부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의 태반이 1891년에 재발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의 통일, 즉 그리스의 폴리스군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통일에 열심인 애국자였고 이것이 필리포스 2세의 야심에 합치한 듯하나, 후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 융합 정책에는 동의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동정(東征) 중 생물학상의 표본을 위시하여 다른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340년 알렉산드로스는 섭정(攝政)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로 물러가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 패배,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왕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두기(學頭期)에 마케도니아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원조로 아테네 동쪽 교외인 아폴론 리케이오스 성역 중 일반에게 공개하는 김나시온을 빌려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리케이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에서 12년간 강의와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오전에는 상급반 연구자를 위하여 논리학과 제1차 철학을 강의하였고, 오후에는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공개 강의를 하였다.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학두기의 강의 초고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전하여지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再燃)되었다.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키스로 떠났다가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평가[편집]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움으로 리케이온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도 만들었다.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그의 견해는 뉴턴 물리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동물학 연구에서 그의 관찰은 19세기까지 정설로 인정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논리에 대한 형식연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형식 논리학으로 구체화되었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00년 ~ 1400년까지의 중세시대 유대와 이슬람 전통에서 나타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초대교회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서방교회 전통의 스콜라 철학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윤리학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출현과 더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측면은 오늘날에서 계속해서 활동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이 관념론적 이상주의임에 대하여 경험론적 현실주의자로 지적되고 있으며, 예술에 관해서도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점은 플라톤과 같으나, 플라톤이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 놓는 것으로 인정한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카타르시스(정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철학[편집]
그리스철학(Greek philosophy)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철학이다. BC 585년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활동을 시작한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아카데미학원이 폐쇄된 529년까지 1000년 이상 지속된 고대의 철학을 말한다. 그리스철학의 절정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속했던 시기, 즉 아테네가 '헬라스의 학원'이었던 고전기이다.
그리스철학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필로소피아(愛知學)의 형성기이다. 이때의 관심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데 있었는데, 이오니아 식민지의 그리스 사상가들이 동방에서 습득한 기술에서 '원리와 원인에 관한 지식'으로 전환하여 철학의 정초를 이루었다. 제2기는 아테네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원래 아티카에는 독창적인 철학자들이 없었는데, 페르시아전쟁(1차 BC 490, 2차 BC 480) 이후 아테네가 그리스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명성이 있는 사상가들이 대거 아테네에 몰려들어 여기에 그리스 철학이 꽃피우게 되었다. 이때 대우주(자연)에 쏠렸던 관심이 소우주인 인간에게 돌려졌다. 제3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기를 말한다. 알렉산드로스대왕(재위:BC 336∼BC 323)에 의한 헬라스 통일과 동방원정이 있은 후 그리스 철학은 순수한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의 특색을 상실함과 동시에 세계의 그리스화를 꾀하는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 20년간 철학을 배웠는데, 나중에 독자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아 경험의 세계를 중요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데아론(論)에 대하여 그는 같은 종류의 여러 사물 속에는 하나의 공통개념(이데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공통개념을 사물에서 독립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떠난 본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데아(形相)와 감각적 재질(質料)의 결합을 강조하여 '질료 ·형상설'을 내세웠다. 플라톤의 경우, 인간은 모름지기 이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갈망하여 감각의 세계를 떠나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충동, 즉 에로스(eros:사랑)를 목표로 하는 데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을 이성에 의한 영혼의 활동으로 규정짓고,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사랑이 아닌 시민의 상호협조로서의 필리아(philia:우정)를 강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편집]
논리학 면에서 학문적인 인식은 사물이 지닌 필연적인 관련을 그 원인에 따라 인식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서 삼단논법의 형식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삼단논법이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제1전제를 말한 공이론(公理論)도 뛰어났다. 그의 논리학서는 《오르가논 Organon》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하여졌다.
자연학 면에서 운동·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연구가 자연학이라고 불린다. 그는 여기서 4종류의 원인(四因論)을 들었다. ① 질료인(質料因:사물이 "그것"에서 되어 있는 소재), ② 형상인(形相因:사물이 "그것"으로 형상되는 것으로,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③ 동력인(動力因:"그것"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이 되는 힘), ④ 목적인(目的因:그 사물 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이 그것이다. 질료는 거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디나미스(可能態)로, 최종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최종목적(텔로스)인 엔텔레케이아(完成態), 에네르게이아(現實態)야말로 자연 존재의 우월하는 원인이라고 한다.
형이상학 면에서 존재자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으뜸 되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을 소피아(지혜) 또는 제1철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고귀한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이기도 하다. 신(神)은 으뜸 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다. 신은 질료에서 떠나, 영원불변한 관조(觀照) 안에 머무는 자기사유자(自己思惟者)로서 최고의 현실태이고, 그것 자신은 부동이면서 "사랑을 받는 것"으로서 일체의 것을 움직이는 "부동의 제1동자(動者)"이다. 그것은 자연계를 초월하는 자연계의 근거로서의 종극 목적이다. 이 학문은 뒤에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은 이 학문이 뒤의 전집 편집에서 주어진 위치에서 유래된 것이다.
윤리학 면에서 행위의 최종 목표는, 신의 자기 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놓여 있으나, 이것은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중용(中庸)으로서의 덕이 행위의 목적이다.
정치학 면에서 인간은 국가적 동물이다. 공공의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선(善)은 실현된다. 그런 까닭에,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가 교대로 다스리는 자가 되는 곳에서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나라 제도가 있다고 한 정체론(政體論)은 온건한 민주주의의 뛰어난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시학 면에서 창작의 본질은 모방(模倣)에 있다. 비극은 숭고한 행위의 모방이며, 숭고한 인물이 불행에 빠져가는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민과 공포의 정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정서를 정화(淨化)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학파[편집]
아리스토텔레스학파(Aristotelian School)는 협의로는 페리파토스학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 교외에 개설한 학원은 가까이에 아폴론 리케이온(Lykeion) 신전(神殿)이 있었기 때문에 리케이온이라고 불리었다. 이 학원은 또한 페리파토스(Peripatos)라고도 불리는데, 페리파토스는 원래 회랑(廻廊)이란 뜻이며, 일반적으로 학교의 건물과 학원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학교 고유의 이름이 되었다. 한편 이 말은 이미 고대로부터 동산을 산책(peripatein)하면서 강의를 해온 습관에서 유래한다는 해석이 널리 유포되어, 소요학파(逍遙學派)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학원에서 배운 사람을 좁은 의미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학파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뒤로는 형이상학적 관심이 희박해지고 대신 개별과학의 연구가 성해졌다. 식물학의 테오프라스토스, 지리학의 디카이아르코스, 음악론의 아리스토크세노스, 자연학의 스트라톤은 그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BC 1세기에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집을 편집 ·간행하고 나서부터는 그 주석(註釋)이 이 학파의 주된 작업이었다. 529년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고대철학의 교수(敎授)를 금지한 후로는 연구의 중심이 동방으로 옮겨져 이슬람 세계에 다수의 뛰어난 주석자를 낳았다. 이것이 서유럽에 전해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가톨릭교회 공인의 철학이 됨으로써 크게 성하였다. 근세철학이 대두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쇠퇴하였으나 19세기의 고전문헌학이 번창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은 다시 성해지고, 신(新)스콜라 철학의 등장과 함께 오늘날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표방하는 학자가 많다.
아리스토텔레스류비평[편집]
아리스토텔레스류비평(Aristotelian criticism)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행한 체계적·형식적·재단적 비평 또는 《시학(詩學)》에서 사용한 분석방법을 따르는 비평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한 체계적·형식적·재단적 비평 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사용한 분석방법을 따르는 비평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대비평에서 이 용어는 특히 미국의 신비평가들에 의해 플라톤적 비평과 대조되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류 비평은 작품의 역사적·도덕적·종교적 맥락보다 텍스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그 가치를 작품 자체에서 찾거나 그 가치가 작품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형식주의적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Platon)의 관념론 대신에 세계를 과정과 변화로 보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택했다. 이러한 세계관은 그의 문학관, 특히 시에 대한 견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아리스토텔레스류 비평은 시를 인간행동의 모방으로 정의하고, 작품을 분석할 때 문학의 6가지 요소인 플롯· 인물·사상·어법·음곡·광경의 복합적인 상관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문학작품에 질서와 통일을 부여해주는 플롯은 다른 요소보다 높이 평가된다. 이것은 희극, 서사시, 서정시, 비극 같은 장르와 관계가 있다. 작품은 그 작품이 속한 장르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평가의 근거는 분석된 작품의 성질 자체에서 비롯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류 비평의 문학작품 평가의 주요기준은 내재적 방법에서 연유한다. 여기서 내재적이란 뜻은 본질적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 384~BC 322)〉,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 384~BC 322)〉, 《두산백과》
- 〈아리스토텔레스〉, 《위키백과》
- 〈아리스토텔레스〉, 《나무위키》
- 디오니파토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 《네이버블로그》, 2024-01-18
- 호로로빵,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 삼단논증〉, 《네이버블로그》, 2024-04-24
- 별빛가로등, 〈10. 아리스토텔레스 정리〉, 《네이버블로그》, 2024-08-31
- 바다출판사,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은 틀렸다” 갈릴레오의 반박〉, 《네이버블로그》, 2024-09-11
- 한우불괵, 〈참주정치의 몰락(아리스토텔레스) GPT〉, 《네이버블로그》, 2024-12-19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