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록산
안록산(중국어:安禄山ān lù shān)은 당나라의 무장으로 안사의 난을 일으켰다.
개요[편집]
안록산은 중국 당(唐)나라 때 반란을 일으킨 무장(武將). 변경의 방비에 번장이 중용되는 시류를 타고 현종의 신임을 얻어 당의 국경 방비군 전체의 3분의 1 정도의 병력을 장악했다. 황태자와 양국충이 현종과의 이간을 꾀하자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했다. 안록산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사명(史思明)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가 다시 반란군에 가담하였는데 이를 두고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안사(安史)의 난이라고 부른다. 사후에 《안녹산사적(安祿山事蹟)》이 편찬되기도 하였다. [1]
안록산은 6개 국어를 능통하였다. 30대에는 장수규를 섬겨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742년에는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변경 방비를 잘 맡아서 현종의 신임을 얻었다. 744년에는 범양절도사, 751년에는 하동절도사로 부임하면서 군사 병력 가운데 3분의 1을 장악했다.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으로 정하고 황제를 칭하였다. 안록산이 사망한 이후에도 안경서가 연나라의 황제를 자처하면서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가계[편집]
안록산의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가 돌궐족이다. 안(安)이라는 성은 소그디아나의 부카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를 가리키는 중국식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명(兒名)은 안녹사(安綠絲)이며 녹산(祿山)이라는 이름은 빛을 의미하는 이란어 로우샨(rowshan)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알렉산더라는 이름의 한자 표현이라는 설도 존재.) 그의 부족 지도자인 카파간 카간이 716년에 죽게 되자, 일족들은 혼란을 피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Samarkand)와 부하라(Bukhara) 주위에 있던 소그디안(Sogdian)왕국을 안식국으로 불렀는데, 그 안에는 강국(康國)과 안국(安國)이 나뉘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위구르족, 회족, 페르시아인, 소그드인, 돌궐족, 창족, 기타 서양인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들이 중국에 이주하여 지역명을 따라 안, 강으로 득성하였다. 이들은 혈연 관계는 모두 다르며 중국 안에서의 득성 시기도 차이가 있다. 중국 고대에도 안씨가 있는데 초나라 전욱에서 나온 계통이 있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을 안남으로 불러서 베트남 출신들이 안씨 성을 사용했다고 한다.
안록산의 성씨에 관한 자료들은 안(安)과 강(康)으로 서로 헷갈린다. 이유는 강, 또는 안, 어느 쪽이던 안록산이 소그디안이지만 안록산의 친부가 강(康)씨이고 양부는 안연언이기 때문에 생기는 다른 차이에서 기인했다. 중국 문헌의 공식 서술도 안연언은 안씨, 안록산은 친부는 강씨로 되어 있다. 본래 성이 강이므로 여러 가지 억측이 있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후에 한나라가 서역과 교역하면서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므로 중국 안에서 안, 강으로 득성하였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주나라 무렵에도 서역 주변에 사람들이 민족이나 지역명을 하는 경우가 있다. 후한 때 안국 출신 안세고는 안연언과 같은 지역 출신이지만 중국 한성 득성 시기가 다르다. 안연언도 안록산의 친부는 아니다. 서역인이 왕조를 세운 후당의 황제 이종후(李從厚), 군의 대권을 잡았던 인물로 안중회(安重誨), 주홍소(朱弘昭)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서역인 출신으로 후당이 건국하기 전에는 돌궐식 성을 사용하였다.
생애[편집]
안록산이 출생한 해는 703년이며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란계(系) 소그드인(人)의 무장이었던 안연언(安延偃:일설에는 양아버지라고도 함)이고, 어머니는 튀르키예족 돌궐(突厥)의 무녀(巫女) 아사덕씨(阿史德氏)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어머니가 돌궐족의 장수와 재혼하였다. 안(安)이라는 성씨는 계부의 성(姓)이며 자식이 없었던 계부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당시 안록산의 집안은 이민족으로 당나라 한족들로부터는 잡호(雜胡)로 간주되었다. 그는 6개국의 말을 구사할 줄 알아 젊었을 때 영주(營州: 北京의 북동쪽)에서 호시아랑(互市牙朗: 무역의 중개인) 역할을 하였다. 30대에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수규(張守珪)를 섬겨 무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영주에 본거를 두는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로 발탁되었다(742년).
안록산은 해(奚)·거란(契丹)·실위(室韋)·말갈(靺鞨) 등 동북지방의 여러 민족의 칩입을 방어하고 위무(慰撫)에 노력하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사자(使者)를 뇌물로 농락하는 일에 능하였기 때문에 변경의 방비에 번장(蕃將)이 중용되는 시류를 타고 급속히 현종(玄宗)의 신임을 얻었다. 안녹산은 거구의 몸집을 가진 체형이었는데 현종이 그의 불룩한 배를 가리켜 '무엇이 들어 있나?' 하고 농담으로 묻자, '오직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 차 있다'고 즉각 대답하였고 또한 양귀비의 환심을 사서 그의 양자가 되었다는 등의 전해지는 일화가 많다. 이렇게 하여 744년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 北京) 및 751년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를 겸임함으로써 당의 국경방비군 전체의 3분의 l 정도의 병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황태자와 당시의 총신인 양국충(楊國忠)은 안녹산에게 모반(謀反)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고 현종과 안녹산 사이에 이간을 획책하였다. 이에 안녹산은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기를 들고 755년 11월 1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범양에서 중원(中原: 황하 중류지대)으로 쳐들어갔다.
755년 12월 뤄양(洛陽)을 점령하고 이듬해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하고, 성무(聖武)라는 연호를 세웠고 756년 6월에는 수도 장안을 정복하였으며 화북(華北)지방의 주요부를 모두 점령하였다. 하지만 장안의 점령과 관리를 부하들에게 일임하여 방치하였고 얼마 후 시력이 약해지고, 악성 종기를 앓게 되자 위령(威令)이 서지 않았으며, 또한 애첩의 소생을 편애함으로써 둘째 아들인 안경서(安慶緖)와 반목하였다. 결국 경서와 공모한 환관 이저아(李猪兒)에게 취침 중에 살해되었다.
사사명[편집]
사사명(史思明)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반장(叛將)이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행동을 같이해 허베이 평정에 힘써 요양을 공략했다. 안녹산이 살해되자 당나라로 귀순했으나 다시 반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솔간(窣干)이라 하였으나, 현종이 사명(思明)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만주 조양(朝陽) 사람(돌궐인) 안녹산(安祿山)과 동향인(同鄕人)으로, 6가지 언어를 이해하였고,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수규(張守珪)를 섬겨 전공을 세웠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행동을 같이하여 허베이(河北) 평정에 힘써 요양(饒陽)을 공략하였다.
757년 안록산이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살해되자 일단 당나라로 귀순하였으나, 758년 숙종(肅宗)이 그를 살해하려고 꾀하자, 이듬해 다시 반기를 들었다. 안경서를 죽이고 스스로 반란군의 총수가 되어,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일컫고 순천(順天) 연호를 세웠다. 그러나 막내아들 사뢰청(史賴淸)을 익애(溺愛)하고 첩 소생인 사조의(史朝義)를 제거하려 하였으므로, 그 원한을 사서 살해되었다.
양국충[편집]
양국충(楊國忠)은 중국 당 왕조의 무관, 정치인으로 양귀비의 사촌 오빠이다. 본명은 양소(楊釗)이다. 환관 고력사 등과 결탁한 환관 정치로 40여 개의 관직을 독점하여, 외척 정치의 표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안사의 난 때 처형되었다.
양소는 원래 군인이었는데, 성격이 난폭하였다. 750년 천보 9년 사촌 누이동생 양옥환(楊玉環)이 귀비가 되자 현종은 양귀비의 오빠인 그에게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 시어사(侍御史)의 관직을 하사했다. 양국충은 초기에는 이림보(李林甫)와 손을 잡고, 구세력을 몰아내는 데 협조를 하였으며, 현종은 승상 이림보를 견제하기 위해 양국충을 신임하게 되었다.
755년 천보 14년 안사의 난이 발발했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은 '양국충 토벌'이었고, 6월에는 동관을 점령했다. 7월 13일 양국충은 당 현종에게 쓰촨성 지난으로 피난을 권유하여 승인을 얻었으며, 장안의 민중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도망을 가는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 7월 15일 현재의 산시성 싱핑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자 굶주린 성난 군인들이 양국충을 향해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군사들을 이끌던 진현례 장군 또한 양국충이 이 환란을 유발했다고 생각하여 모반의 계획을 이보국(李輔國)에게 알렸다. 결국 양국충은 이들에게 잡혀 사형당하는 최후를 맞이하였고 만고의 역적으로 회자되었다.
사조의[편집]
사조의(史朝義)는 당나라의 대규모 반란이었던 안사의 난으로 건국된 연나라 마지막 황제였다. 사사명의 맏아들로, 761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사사명을 교살하고 제위에 오른다. 하지만 사사명의 부하들에게서 충성을 얻지 못했고, 결국 당나라와 위구르 연합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한 후, 달아나다가 자결하였다.
사사명이 안록산을 따라 거병을 했을 때, 사조의는 기주, 상주에서 수비에 임했다. 759년 사사명이 안경서를 살해하고 황제를 칭함과 동시에 사조의는 회왕에 봉해진다. 761년, 사조의는 사사명을 살해하고 대연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현성(顕聖)이라고 하고 개원을 했다. 다음 해 당군이 위구르 세력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였으며, 사조의의 거점인 낙양을 함락, 북방의 막주(현재 하북성 런추시)으로 피한다. 민심을 잃었다고 판단한 대연 정권의 전승사(田承嗣), 이회선(李懷仙)이 배신하고, 763년 사조의는 자살함으로써 안사의 난은 수습된다.
안사의 난[편집]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록산과 사사명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녹산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녹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으로 하고 스스로 황제(稱帝)라고 선포하고서 9년간 지속했다. 이 기간 동안 당나라의 인구는 3600만 명이나 줄었다. 위구르족에 의해 진압되지만, 위구르에 의해 장안은 황폐해진다.
반란은 천보 14년(755년)에 시작되었다. 안사의 난은 중세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군사 활동과 이와 관련된 전투 사망으로 기근, 인구 이동, 대규모 기반 시설 파괴 등으로 인한 인구 손실이 크게 발생하여 당 왕조가 크게 약화되었고, 당나라 황제들의 천왕(天王)으로서의 위신이 무너졌으며 서역(西域)의 영구적인 상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반란이 황조, 의병, 외부의 지원 등 대규모 연합군에 의해 궁극적으로 진압되었지만, 왕조는 군부의 구조를 개편하지 않고 점령지의 통치방식은 이전의 것을 고수하였다. 이는 당 왕조 쇠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말기에 지역 군벌 분리주의가 만연한 원인이 되었다. 이로써 당의 멸망 이후 수십 년 동안 오대 십국 시대가 이어졌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 당나라의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뀌었다. 안사의 난 이후로 경제가 발달하여 재정이 복잡해 지자, 탁지낭중의 지위가 향상하여 탁지사(度支使)라 하게 되고, 재무관청인 탁지(度支)가 호부(戶部), 염철(鹽鐵)과 함께 재정을 취급하는 3개의 중요 기관이 되었다.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875년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안녹산(安祿山,703?~757)〉,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안녹산(安祿山,703?~757)〉, 《두산백과》
- 〈안사의 난(安史─亂)〉, 《두산백과》
- 〈안록산〉, 《위키백과》
- 〈안사의 난〉, 《위키백과》
- 〈안녹산〉, 《나무위키》
- 〈안녹산의 난〉, 《나무위키》
- 데스카 오사무, 〈(역사 히스토리) 당의 근간을 흔들어 버린... 안록산의 난〉, 《네이버블로그》, 2022-12-14
- 전문학원, 〈당나라의 정치적 위기와 그 여파 안록산의 난〉, 《네이버블로그》, 2024-08-27
- 무이산, 〈공을 이룩한 후 은퇴하는 것은 천지의 도다〉, 《네이버블로그》, 2024-07-16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