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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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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서태후(중국어:西太后xī tài hòu)는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고, 동치제의 생모인 자희황태후이며 동치제와 광서제의 섭정을 지냈다.

개요[편집]

서태후는 함풍제의 사후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공친왕(恭親王)과 공모하여 쿠데타로 반대파를 일소하고 모후(母后)로서 동태후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1875년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3세의 아들을 옹립,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켜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국정의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1898년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에 접근, 신정을 실시(戊戌變法)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켰다.

의화단(義和團)의 반(反)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西安: 陝西省)으로 피신하였다.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베이징(北京) 귀환 후에는 입헌 준비, 실업(實業), 교육의 진흥 등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배외정책에서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청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 하루 뒤에 죽었다.[1]

서태후의 생애[편집]

서태후(1835년 11월 29일 ~ 1908년 11월 15일)는 예허나라 하라 출신이고, 만주 양남기인(鑲藍旗人)으로 청나라 말기의 독재적 성향의 여자 권력자였다. 이름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진다. 서태후의 출신지에 관해서는 안후이성 우후설, 네이멍구 후허하오터설, 산시성 창즈설 등이 있다.

서태후는 예허나라 후이정이라는 말단 관리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관직 사회의 생리를 터득하며 자랐다. 어려서는 유복하게 생활했으나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홧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려나갔고, 수려한 외모로 17세에 함풍제의 후궁으로 뽑혀 원명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당시 태후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성질이 거세겠다며 난귀인(蘭貴人)으로 책봉했다. 몇 년 후 서태후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함풍제의 관심을 끌어 승은을 입었고 의비(懿妃)에 책봉되었다. 1856년 서태후가 아들 재순(載淳, 훗날의 동치제)을 낳자, 처음으로 얻은 아들의 탄생에 함풍제는 크게 기뻐하며 서태후를 의귀비(懿貴妃)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당시 궁 안에서의 지위가 아직 안정적이지 않았던 서태후는 함풍제의 총애를 유지하는데 전력을 쏟기 위해 재순의 양육을 포기했고, 이로 인해 이런 시절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동치제는 훗날 서태후를 두려워했으며 공공연히 그녀와 맞서게 되었다.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서태후는 함풍제, 황후 뇨후루씨와 함께 열하로 피난을 갔다. 영국과 프랑스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를 할양하게 된 함풍제는 북쪽 지방을 러시아에 점령당하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함풍제는 그녀의 야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조정을 어지럽히면 처형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동치제가 즉위하자 서태후는 황후 뇨후루씨와 함께 태후가 되었다. 1861년 서태후는 자신의 수렴청정을 반대한 수슌 등의 대신들을 숙청하였고 연호를 기상(祺祥)에서 동치(同治)로 고치고 동태후와 함께 섭정에 나섰다(신유정변). 두 태후의 섭정 외에도 동치제의 숙부인 공친왕마저 정치 일선에 나서서 당시 정국에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서태후가 권력을 잡았을 무렵 청나라는 외세의 압력과 봉건 질서의 붕괴로 근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 출신 관료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이 함양된 양무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꾀하려 하였고 서태후를 비롯한 만주족 지배층 또한 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의 패배 등으로 인해 양무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주도 세력들도 몰락했다. 한편 친정을 시작한 광서제는 1889년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에 관심을 보였고, 서태후에게 좌지우지되는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캉유웨이의 정책을 지지하게 되었다.

1898년 광서제는 '명정국시'(明定國是)라는 조서를 내려 캉유웨이의 개혁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무술변법). 서태후도 초반에는 변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광서제의 목적이 권력을 이양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고 변법을 지지하는 유신파를 제거하려 했다. 유신파의 핵심이었던 담사동은 위안 스카이(원세개)에게 서태후를 감금하라고 부탁했고, 상황이 유신파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위안 스카이는 이 사실을 서태후의 심복 영록에게 고했다. 서태후는 자금성으로 돌아와 무술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시켰고, 황제의 병을 이유로 다시 섭정이 되었으며, 진비는 매관매직을 했다는 이유로 북삼소에 가두었다. 또한 담사동과 양예를 비롯한 유신파의 핵심 인물들을 죽이고 변법 조치들도 취소했다.

서태후는 평소에 기름진 음식, 특히 고기요리를 매우 즐긴 탓에 복부팽창과 위 기능 저하로 이질에 시달렸다. 게다가 매일 연회를 하면서 과식을 한 탓에 더욱 심했다. 결국 그로 인해 죽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는 그녀 같은 여인이 정치에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언을 그녀의 신하들에게 남기고 이튿날인 11월 15일에 눈을 감았다. 서태후의 장례는 120만 냥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성대하게 치러졌고 수천 명의 사람이 장례에 동원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신해혁명에 의해 1912년 2월 12일 종말을 고했다.

신유정변[편집]

신유정변(辛酉政變)은 중국의 서태후(西太后)와 공친왕(恭親王) 등이 1861년에 일으킨 정치 쿠데타이다. 1850년대 중반 태평천국 반란의 와중에서 일어난 제2차 아편전쟁은 중국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아편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무력에 의존한 국제관계의 경향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전쟁은 중국의 개방을 더욱 확대하는 내용의 톈진조약(天津條約) 체결(1858)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합의 사항에 대한 청조의 미온적 준수, 전쟁재개, 황제의 러허(熱河) 도피,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이라는 대혼란 끝에 1860년 베이징조약(北京條約)의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서태후 40년 집권의 길을 연 신유정변은 숙순(肅順)을 대표로 한 러허파[熱河派]와 함풍제의 러허 피난에도 베이징에 남아 연합군과 조약을 체결하여 이들을 철수시킨 공친왕 등을 중심으로 한 베이징파(北京派)의 권력장악을 위한 암투로 시작되었다. 이는 곧 베이징파의 러허파 제거작전으로 전개되어 베이징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 정변의 배경에 대해서는 서태후와 공친왕의 개인적 야망, 숙순일파에 대한 원수 갚기, 대외 강경파와 화평파의 대결 등 여러 견해가 있다. 그런데 정변의 배경에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깔려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집권상층부의 권력투쟁이었다.

신유정변으로 주화의 입장에서 베이징에 남아 조약을 성립시켜 민심을 얻은 공친왕과 나이 어린 동치제(同治帝:재위 1861∼1874)의 생모 서태후의 연합정권이 성립되었다. 태평천국 진압에 나선 증국번·이홍장·좌종당 등 유력 한족 지방장관들 역시 서태후의 지지 아래 공친왕과 연합하여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중국의 군사력을 보강하는 일련의 개혁, 즉 양무운동을 시작하였다. 태평천국은 이들 대외협조파와 서양열강의 연합전선 앞에 굴복하여 15여 년 간의 반란의 역사를 마감하였다.

의화단의 난[편집]

서태후는 광서제 대신 단친왕(端親王) 재의의 아들 부준(溥儁)을 즉위시키려 했으나 서양 열강은 광서제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각국 공사들은 광서제를 진찰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광서제를 진찰한 프랑스 의사는 "황제의 맥박이 정상이며,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발표하여 서태후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열강의 공사들은 부준의 대아가(大阿哥; 황태자) 책봉에도 축하하러 오지 않았다.

서태후와 단친왕은 본래 반청 단체였던 의화단을 구슬려 열강 8국(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과 대항하도록 하였다. 의화단에 의해 각국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8개국 연합군은 북경을 함락시켰고, 원명원은 불에 탔으며, 그녀는 광서제와 함께 서안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평복 차림으로 피난을 갔고 먹을 것과 물을 찾지 못해 이틀이나 굶기도 했다. 피난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서태후는 북경에 남아있던 경친왕 혁광 등에게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열강의 어떠한 요구도 받아들이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1901년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이 체결되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그녀는 오만하고 보수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 연회를 열고 공사 부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한편 그때까지 했던 것 이상으로 사치를 일삼았다.

서태후에 대한 평가[편집]

서태후는 중국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부유했던 청나라 몰락의 원흉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권력에 집착해 청나라 황실의 뿌리를 근본부터 흔들리게 했고 심지어 국방비까지 뜯어서 본인 사치향락에 썼고 청나라는 막대한 국고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열강에게 뜯겨나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서태후는 중국 내에서 아직까지도 여후, 측천무후(또는 가남풍) 등과 함께 중국 역사상의 3대 악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 서태후가 저지른 악행들이 모두 드러나면서 서태후의 평가는 박해지고 특히 혁명을 추구하는 중공 입장에서 변법자강운동을 탄압한 서태후는 혁명으로 타도해야 할 수구꼴통 봉건주의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서태후가 의화단 운동에 불을 지폈으니 반 서방주의 때문에 미화한다는 낭설도 있으나, 중공의 정통 사관에서는 오히려 외세에 굴복하여 의화단의 통수를 치고 탄압했다고 여겼다. 즉, 현재 중국 정부도 의화단을 미화할지언정 서태후를 미화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외세의 침략을 끌어들이고 중국을 반식민지화 한 서태후를 악녀로 평가하고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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