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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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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당태종(중국어:唐太宗táng tài zōng)은 당(唐)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26∼649)이다.

개요[편집]

당태종은 당나라를 수립하고 군웅을 평정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공정한 정치로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다. 본명은 이세민(李世民)이다. 아버지는 이연(李淵:초대 황제)이고 어머니는 두(竇)씨이다. 중국 역사상 유수(有數)의 영주(英主)로 알려져 있으며, 북방민족의 피가 섞인 무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하고 사려가 깊으며, 무술·병법에 뛰어난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소년시절부터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당태종은 3성 6부의 중앙관를 두었고 백성에게 땅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조용조의 세제, 부병제의 병제를 실시하여 율령격식(律令格式)을 완성하였다. 또한 당태종은 학문과 문화의 애호자이기도 하여 전대의 각 왕조사와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편찬을 명하였고, 사서(史書)의 일부는 스스로 집필하였다. 만년의 고구려 친정 실패 등으로 그가 죽은 뒤에는 정권이 동요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1]

당태종의 생애[편집]

당태종 이세민은 당 고조 이연의 두 번째 아들이다. 이름인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1차 고당 전쟁 당시 고구려를 침공한 황제로도 알려져 있다. 598년,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과 그의 첫 부인 두씨(竇氏) 사이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선비족 출신이었지만, 아버지인 이연이 수나라 황실 친인척 관계상 수 문제 양견의 처이질(妻姨姪)었던데다가 수나라에서 크게 활약하였기 때문에 이후 집안이 한족으로 동화되었다.

614년, 장손씨와 혼인을 올렸다. 이후, 돈황군공(燉煌郡公)에 봉하였다. 617년, 수 양제 양광의 고구려 원정과 엄청난 대토목 공사로 이미 피폐해진 수나라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이연 역시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 무렵의 일화로, 운정흥 장군에게 깃발을 많이 세워 군의 수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라는 계책을 올려 칭찬을 들었다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세민은 진국공(秦國公)으로 진봉되었으며, 이후에 수나라 공제(恭帝)의 황위 계승에도 관여하였다.

618년 3월, 아버지를 모시고, 수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서 장안을 손에 넣고, 때마침 수 양제 양광(친인척 관계상 양광은 아버지 이연의 이종사촌 남동생이었음.)마저 강도에서 그의 시위장이자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과 우문지급 형제에게 암살되었다. 5월, 이연은 공제에게 선양을 받아 당의 황제 자리에 오르고,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619년, 그러나 뒤이어 반란을 일으킨 여러 호족과 귀족들이 당나라에 충성을 바치지 않자, 이세민은 그들을 격파하러 출병했다. 반역 호족은 왕세충, 두건덕, 설인고, 유무주 등이었는데, 이세민은 이들에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제거하였다.

621년, 반란 진압에 대한 공으로 아버지인 당 고조 이연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 즉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별호를 얻었다. 643년, 원래 그는 황태자 이승건이 있었으나 불량한 행동과 소인배와 어울린다는 이유로 폐하였다. 이후, 4남 복왕 이태를 봉하려 하였으나, 행실을 이유로 황태자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9남 진왕(晉王) 이치를 황태자에 세웠다. 태자 책봉 이후, 황태자 이치는 당의 제3대 황제 당 고종이 되며, 고구려 원정 전후로 하여 대리청정을 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내란의 양상이 짙어지자, 수나라 타도의 뜻을 품고 타이위안[太原] 방면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수립하였다. 그 뒤 군웅을 평정하고 국내 통일을 실현시킨 것은 20세 안팎인 그의 활동에 의한 것이며, 이를 질투한 형 황태자 건성(建成) 및 동생 원길(元吉)과 권력다툼을 벌였고 마침내 그들을 살해하였고, 626년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당시 당태종의 나이는 28세였다.

당태종은 제위에 오른 다음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고쳤으며 널리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였다. 이어서 돌궐(突厥)을 비롯한 사방의 이민족을 제압하고 여러 민족의 추장들한테서 천가한(天可汗)의 존호를 받았다. 이로써 당나라는 번한(蕃漢)의 양 사회를 포용하는 세계제국이 되었다. 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명신 위징(魏徵)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심을 누르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히 공정한 정치를 하기에 힘썼다. 그러므로 그의 치세는 '정관지치(貞觀之治)'라 칭송받았고,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다.

649년, 이세민은 고구려 원정 실패 후 몇 년간 이질을 앓았다. 5월 26일 (7월 10일), 당 태종 이세민은 장안 취미궁(翠微宮) 함풍전(含風殿)에서 향년 52세(5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호는 태종(太宗)이며, 능호는 소릉(昭陵)이다.

안시성 싸움[편집]

안시성싸움은 645년(고구려 보장왕 4) 안시성에서 고구려와 당나라 군대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안시성은 당시 인구 약 10만에 이르던 고구려의 영지로,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이다. 643년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라는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차후 신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불응하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류왕(榮留王) 살해 및 대신(大臣) 학살사건의 문책을 표방하고 644년 11월 당 태종 친솔(親率)의 10만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646년 4월부터 개모성(蓋牟城:瀋陽 동남쪽) ·비사성(卑沙城) ·랴오양[遼陽] ·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점령한 당군은 6월에는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을 대장으로 한 15만의 군사를 안시성에 보냈다. 많은 군사에 당 태종은 두려워하며 기만 전술을 펼쳤다. '당은 교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을 시해한 신하를 문죄하는 것이므로 고구려가 신하의 예를 다하면 잃은 땅도 회복될 것'이라고 두 사람을 기만하였다. 고연수가 이 말을 믿고 있다가 공격해 온 당나라 군에 대패하여 3만여 명이 전사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이세적(李世勣)을 시켜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휘하 장수 도종(道宗)은 먼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 올려 점점 성높이와 같게 하였으나 성 안에서도 이에 따라 성을 높여 막았다. 당군은 하루에 6∼7차례 충거(衝車 :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攻城器) ·포거(抛車:돌을 날리는 공성기) 등을 동원, 성을 파괴하면 성 안에서는 곧 목책을 세워 이를 보완하였다.

도종은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60일에 걸쳐 안시성보다 훨씬 높은 토산을 쌓는 데 성공하였다. 당군은 부복애(傅伏愛)를 대장으로 하는 부대에게 토산의 정상에 올라 수비하게 했으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며 성에서 고구려군이 쏟아져 나와 토산을 탈취하여 당군은 토산의 탈환전을 3일 동안 계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싸움은 날마다 6∼7회의 가열(苛烈)한 공방전이 계속되어 당군이 안시성을 포위한 지 3개월이 지났으나 요지부동, 고구려군의 용맹성에는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9월에 이르러 기후는 이미 한랭하기 시작하고 병마(兵馬)의 양식도 떨어져 당태종은 할 수 없이 철군하기로 결정하였다. 당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안시성의 성주가 성 위에 올라 당태종을 비록 바라보고 송별의 예(禮)를 표하자 당태종은 적(敵)일지라도 성주의 영웅적인 지휘력에 감동하여 비단[絲繪] 100필을 보내 고구려 국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

정관의 치[편집]

정관의 치(貞觀之治)는 중국 당(唐)나라 제2대 왕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치세(治世:626∼649)이다. 이때의 연호가 정관(貞觀)이다. 수(隋)나라 말기 전국적인 동란과 백성의 피폐 가운데 굳건히 일어서서, 당나라의 국초(國礎)를 확립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율령체제(律令體制)의 정비에 따라 학교·과거(科擧)도 발달하였다.

이세민은 황제에 오르고 나서 농민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나누어 주어 조용조 제도로 세금을 걷었다. 이 제도는 토지를 받은 사람은 국가에 곡물을 바치고, 1년 중 20일을 국가를 위해 일하며, 직물 등을 바치게 하는 제도로써, 국가는 풍족해지고 민생은 안정되었다. 이세민은 형 이건성의 편에 있던 위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위징은 명재상이 되어 중국을 안정시켰다.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군사 제도는 부병제인 징병제로 택하였다. 이렇게 많은 인재를 등용시킨 당나라는 나날이 번창해져 갔으며 백성들도 더더욱 이세민을 우러러보았다. 또한 이세민은 아무리 적의 밑에서 일했던 장수라 할지라도, 능력이 뛰어나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세민은 아무리 신하들이 자기에게 독설을 퍼부어도 역정을 내지 않고, 그 간언을 잘 받아들여 언제나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었다. 안으로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위징(魏徵) 등의 명신들이 문치(文治)를 도왔으며, 밖으로는 돌궐(突厥)을 제압하고, 토번(吐審)을 회유하여 국위를 널리 떨쳤다.

당태종전[편집]

당태종전(唐太宗傳)은 조선시대 작자·연대 미상의 고대소설이다. 활자본. 1책. 조선시대에 쓴 많은 고대소설 중에서 불교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중국 당(唐)나라의 태종이 하찮은 거짓말 때문에 저승에 들어가 지옥과 극락세계를 두루 목격하고 다시 이승에 태어나 염라대왕의 가르침대로 불교를 믿게 되었다는 줄거리이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윤회사상을 주제로 하여, 준엄하고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죄인들의 모습과 그 반대의 극락세계를 대조시킴으로써, 현세에 사는 인간들을 불교에 귀의하도록 권장하는 내용이다.

당태종전은 당태종이 저승을 왕래한 이후 불교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불교계 소설이다.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여 환상을 보여줌으로써, 불교적인 입장에서 인간을 불행으로부터 행복으로 인도하려고 한 의도를 가진 작품이다. 여기서 특히 인간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지옥을 표현한 부분인데, 죄가 되는 행위들을 들어 지옥에서 받는 벌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동일한 소재를 다룬 「당태종입동명기(唐太宗入洞冥記)」라는 중국소설이 있으나 구성이 크게 다르다. 이 작품은 불교계 설화와 소설의 관계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태종(太宗,599~649)〉,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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