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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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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26대 왕인 고종의 아버지이다.

개요[편집]

  •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으로서 조선 말기의 국정을 주도하였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며,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다. 1820년(순조 20) 12월 21일(음력)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1788~1822)와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 1788~1831)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인 1831년(순조 31)에 공조판서 민치구(閔致久, 1795~1874)의 딸 민씨(閔氏, 1818~1898)와 혼인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조선의 왕족은 원칙상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금지되어 집권 전 흥선대원군이 거친 관력은 비교적 간략하다. 1834년(순조 34) 종3품 자신대부(資信大夫)에 임명되었고, 1841년(헌종 7) 정3품 창의대부(彰義大夫)가 되어 흥선정(興宣正)으로 봉해졌다. 1843년(헌종 9) 효현왕후(孝顯王后)가 승하하자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된 후 종2품 소의대부(昭義大夫), 흥선군(興宣君)이 되었다. 1847년(헌종 13)에는 종친부(宗親府) 유사당상(有司堂上)에 임명되었는데, 이후 거의 그 직책에 머물렀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은 당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던 신정왕후(神貞王后)와 연결하여 12세였던 차남 익성군(翼成君) 이재황(李載晃, 1852~1919)을 왕위에 올렸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1대 황제인 고종(高宗)이다.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은 왕의 생부(生父)에게 내려지는 대원군에 봉작되었다. 고종의 즉위 초기에는 신정왕후가 수렴청정하다가 1866년 그만두어 명목상으로는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정국을 주도하였다.[1]
  • 흥선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양증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손자이며, 고종의 친아버지이다. 조선시대에 4명 있었던 대원군 중 마지막 대원군이며, 유일하게 생전에 대원군이었다. 섭정으로 오랜 기간 실권을 가졌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의 친아버지로서 조선 말기의 핵심 인물이다. 그런 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가져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만을 고유명사처럼 지칭해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7년(융희 원년)에 손자 순종이 그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숭하고 시호 '헌의(獻懿)'를 내렸다. 그래서 이를 합친 최종 정식 작호는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다.[11]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부인이며 고종의 생모인 여흥부대부인도 '여흥순목대원왕비(驪興純穆大院王妃)'로 추숭받았다. 19세기 조선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당대는 물론 현대까지도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며, 실제로도 한 쪽으로 단언하여 평가하기 매우 어렵다. 그의 인생 역정은 대단히 파란만장했으며, 세도정치 시기부터 대한제국의 성립까지 조선 말기의 역사적 주요 사건에 많이 엮였으니 조선 말엽의 거시적인 역사 그 자체로 봐도 무방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시작이 되는 인물로서 한국 근·현대사 교육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이 가장 먼저 언급된다.[2]
  •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추존왕이다. 본명은 이하응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부친이다. 영향력이 있었던 풍양 조씨 세도 집안과 양주 조씨 고급 관료 집안, 신 안동 김씨 세도 집안에게 각기 서예(붓글씨)를 써서 바치고 서화(그림) 등을 그려다가 바쳐 보신책을 강구한 그는 1864년 1월 21일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완흥군, 이재선 등을 조선 군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을 주도한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무리한 경복궁 중건,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성 출신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 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3]

흥선대원군의 호칭[편집]

  • 흥선대원군을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 "대원위 대감(大院位大監)", "대원위 합하(閤下)" 등. 말년에는 "국태공 저하(國太公邸下)"라고 불리기도 했고 갑오개혁으로 조선 왕실의 호칭이 격상돼서인지 독립신문의 기록을 보면 그를 가리켜 '대원군 전하', '국태공 전하'라고 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살아있는 대원군'은 그가 처음이어서 호칭을 정립하기 어려웠기에 이렇게 많았을 수도 있다. 또한 조선 시대 백성들은 유명한 재상급 인사들을 부를 때 그가 사는 곳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은 생전 운현궁에 주로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를 '운현 대감(雲峴大監)'이라고도 불렀다.
  • 대원군(大院君)은 조선 시대 적통인 임금의 자손이나 전임 임금의 대가 끊겨 방계(傍系)인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는 칭호 및 관직으로서, 군호 가운데 하나이다. 대원군의 작위를 받는 대상은 방계 종친이나 왕의 서자로 그 종친의 아들이 왕이 되면 왕의 아버지인 종친은 대원군이 된다. 왕자로서 대원군에 추존된 사례는 덕흥대원군이 있다. 주로 추존을 하여 묘호를 올려서 하는 것이 본래 흔한 것이었으나 선조 때부터 선조의 생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추봉하면서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 이하응으로 알려져 있다. 역대 대원군 중 생전에 대원군이 된 것은 흥선대원군 단 한 사람뿐이며, 조선의 마지막 대원군도 역시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의 집권[편집]

  • 흥선대원군은 집권하면서 가장 먼저 종친부를 확대 및 개편하였다. 종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2품 이상의 선파인(璿派人)을 포섭하여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밖에 국정에서 소외되었던 남인과 북인을 능력에 따라 적극 등용하였고, 각 군영의 개편 및 삼군부(三軍府) 설치를 주도하여 무신도 포섭하였다. 아울러 김병학(金炳學, 1821~1879), 박규수(朴珪壽, 1807~1877) 등 유력 가문 출신의 인사도 기용하는 등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세력을 모았다. 또한 유력 가문이 장악하여 국정 전반을 논의하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여 의정부(議政府)의 산하 기관으로 개편하였고, 비변사의 군사적 기능은 삼군부로 이관하였다. 이로써 안동 김씨 등 유력 가문이 장악하던 권력이 흥선대원군에게로 옮겨가게 되었다.
  •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반에 진행된 여러 개혁을 원활하게 시행하기 위한 자금 조달의 방법 중 하나로 중앙 및 지방 관료의 기강 확립과 부세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먼저 백성을 수탈하던 관료와 유력자를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또한 당시 큰 문제로 부각되었던 환곡(還穀)을 폐지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창(社倉)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1870년 호포제(戶布制)를 시행하였는데, 개인(軍丁)이 아닌 호(戶)를 기준으로 군포(軍布)를 납부하게 한 것이다. 이로써 양반도 군포를 납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의 재산 정도에 따라 군포를 부과하여 가난한 자의 부담을 줄였다. 이밖에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하였다.
  • 1865년에는 무너져 있던 경복궁(景福宮)의 재건을 도모하여 관료와 백성에게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였다. 표면상으로는 경복궁 중건에 보탬이 되고자 자발적으로 납부하는 돈이었으나, 개인의 재산에 따라 강제로 할당량을 부과하여 원성이 높았다. 이후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의 명목가치 100배에 달하는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여 국고를 충당하였으나, 당백전의 실질 가치는 상평통보의 5~6배에 불과하였다. 그 결과 1~2년 사이에 쌀값이 약 6배 올랐고, 기타 물가도 폭등하게 되어 백성의 고통을 초래하였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를 제외하고 모두 철폐하였다. 본래 서원은 유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교육기관이었는데, 점차 지방 유림의 세력 기반이자 특권의 중심이 되며 폐단이 나타났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고종 2)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시작으로 1871년(고종 8)에 서원의 철폐를 완료하였다. 이러한 서원철폐는 전국 유생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주도로 제1차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되면서 흥선대원군이 섭정에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 있어 별다른 행동을 하지는 못하였다. 1898년(고종 35) 1월 아내 민씨가 세상을 떠났고, 1달 뒤인 2월에 흥선대원군도 78세의 나이로 운현궁 노안당(老安堂)에서 눈을 감았다.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장례는 국장으로 진행되었다. 묘소는 흥원(興園)이라 부르며, 본래는 아소정 근처였는데, 1906년 파주로 이장하였다가 1966년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피랍[편집]

  • 1882년(고종 19) 대원군이 청군(淸軍)에 의해 납치되어 청의 바오딩부[保定府]에 유폐된 사건이다. 1882년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왕명(王命)에 따라서 이를 기민하게 수습한 대원군은 병권(兵權)과 재정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명성황후의 국상을 치를 것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죽지 않고 충주에 도피해 있던 명성황후는 그 잔당과 합세하여 청국의 텐진(天律)에 가 있는 김윤식(金允植)으로 하여금 청국의 세력을 끌어들이게 함으로써, 정치 세력을 만회하려 하였다. 한편, 임오군란에서 피해를 본 일본은 군란의 책임을 조선 정부에 따지고 들었으며, 또한 청국은 왕비의 원조 요청에 응한다는 명분 하에 우창칭(吳長慶)·딩루창(丁汝昌)·마젠중(馬建忠) 등으로 하여금 4,5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에 입성하자 조선은 국제외교상 매우 복잡미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청국은 임오군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일본 사이에서 거중조정(居中調停)을 하겠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며 일본 공사관의 경호를 청국이 맡겠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청국의 주장이 대원군에 의해 모두 거부당하자 청국은 대원군을 제거할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1882년 7월 13일에 우창칭·딩루창 둥의 청국 장군과 그의 막료(幕僚)인 우자오유(吳兆有)·황스린(黃土林)·위안 스카이(袁世凱) 등은 대원군이 있는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방문하고 외교적인 의례를 다하여 청진(淸陣)을 찾아주기를 간청하였다.
  • 대원군은 1882년 7월 14일 이용숙(李容肅)·이조연(李祖淵) 등을 대동하고 청군의 진영으로 찾아갔다. 청군 측에서는 전날의 약속대로 처음에는 조선의 군사·외교문제를 논의하였으나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어 마젠중이 대원군에게 태공(太公:대원군)은 외교가 서투르니 청국에 가서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드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며, 부하들로 하여금 대원군을 미리 준비한 보교(步轎)에 강제로 타게 한 후 칼을 빼어든 청병의 호위하에 경기도 남양만(南陽灣)으로 향해 달리게 하였다. 1882년 7월 15일 남양만에 도착한 대원군은 다시 배에 실려 바다를 건너 중국에 상륙하였으며, 1882년 7월 29일에는 청국의 권력자인 이홍장(李鴻章) 앞에 안내되었다. 이홍장은 마치 법정에서 죄인을 심문하듯이 대원군에게 임오군란의 책임소재를 따졌다. 그런 수모를 겪은 뒤 대원군은 1882년 8월 16일 바오딩부라는 곳에 호송되어 유폐되고 말았다. 대원군이 조선 정계에서 사라지자 청국은 조선을 자기네의 속방(屬邦)이라고 공언하면서 조선의 정치를 직접 감시·간섭하였다.

흥원[편집]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이다. 1978년 10월 10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78년 10월 10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흥원(興園)이라고 한다. 1898년(광무 2)에 죽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로 처음에는 고양군 공덕리에 있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되었고 1966년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창현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산 중턱에 2단으로 나뉘어 있으며 봉분을 따라 기와를 얹은 나즈막한 돌담이 둘러져 있다. 상단에는 낮은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는 비교적 아담한 규모의 원형 봉분이 있고 그 앞에 상석이 놓였다. 봉분 옆에는 좌우 1쌍인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이 2기씩 각각 서 있다. 하단에는 중앙의 명등석(明燈石)을 중심으로 좌우 1쌍인 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마석(馬石)이 2기씩 각각 세워져 있다. 그런데 묘역 안에서 신도비(神道碑)나 봉분 앞뒤로 세우는 묘비, 묘갈(墓碣) 등의 비석을 찾을 수 없는 것이 특이하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 《두산백과》
  2. 흥선대원군〉, 《나무위키》
  3. 흥선대원군〉,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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