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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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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

최충(崔沖)은 고려 문하시중 직책을 지낸 고려 전기의 문신(文臣)이자 유학자이다.

개요[편집]

최충(984년~1068년)은 1013년 황주량 등과 함께 칠대실록의 편수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문종 즉위 후 법령을 개정하여 고려 멸망시까지 고려의 국법의 기틀을 완성시켰다. 총 9개의 서재로 이뤄진 구재학당을 세움으로써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자가 되었다. 은퇴 후에는 학당인 구재학당에서 유학자들을 양성했는데 이후 개경의 사학십이도의 모범이 되었다. 별칭은 해동공자(海東孔子)이다.

1050년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1053년에는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 1055년에는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에 특별 서훈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1]

최충의 생애[편집]

최충은 해주 최씨의 시조인 최온(崔溫)의 아들이다. 1005년(목종 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우습유(右拾遺)에 올랐고,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해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우보궐(右輔闕) · 기거사인(起居舍人) · 중추직학사(中樞直學事)를 역임하고, 1025년에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翰林學士內史舍人知制誥)를 거쳐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郎諫議大夫)에 올랐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說苑)』 육정(六正) · 육사(六邪)의 글과 한(漢)나라에서 자사(刺史)에게 준 6조(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로 전임되었다. 정종 초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영원(寧遠) · 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修國史上柱國)이 더해졌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로 옮겼다.

최충은 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했고, 곧 수태보(守太保)가 더해졌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또한,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자 서북 주(州) · 진(鎭)의 공역(工役) 금지를 청해 시행하게 했으며,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1053년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와 함께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이라는 벼슬과 상주국(上柱國)이라는 훈작을 받았다. 1055년 내사령(內史令)이 되었는데, 이후 관제 개정으로 인하여 내사문하성을 중서문하성으로 개칭하였으므로 중서령으로 임명하였다.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

최충은 관인으로 현달했을 뿐만 아니라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 교육과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개경에는 사학십이도라는 이름난 사숙(私塾)이 있었는데,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그 가운데서도 성황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는 생도가 많았다. 『고려사』 열전에,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최충에서 비롯해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문종 초는 거란 침입의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아직 국학(國學)은 유명무실이고, 향학(鄕學)도 갖추어지지 못한 때였으므로 문교(文敎)의 새바람이 점차 요구되었다. 특히, 문반(文班) 현직자를 우대하면서 그들 중심의 국가질서가 정착되고 있었으며, 또 왕실 · 외척이 세력을 부리게 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방의 이름을 낙성재(樂聖齋) · 대중재(大中齋) · 성명재(誠明齋) · 경업재(敬業齋) · 조도재(造道齋) · 솔성재(率性齋) · 진덕재(進德齋) · 대화재(大和齋) · 대빙재(待聘齋) 등으로 지어 구재학당을 마련, 본격적인 사립학교를 시작하였다.

최충은 질서와 법도를 갖춘 교육사업을 전개해, 당시 이곳의 학생은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 또는 최충도(崔冲徒), 뒤에는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라 불렸다. 구재(九齋)에서는 구경(九經: 周易 · 尙書 · 毛詩 · 儀禮 · 周禮 · 禮記 · 春秋左氏傳 · 春秋公羊傳 · 春秋穀梁傳) · 삼사(三史: 史記 · 漢書 · 後漢書)를 중심으로 시부(詩賦)와 사장(詞章), 즉 문학이나 유교 교육의 일방적인 요청에 따라 문장공부도 많이 시켰다. 그러나 과거를 위한 교육에 그치지 않고, 조직적이며 함축성 있는 인격도야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충의 교육방침은 하과(夏課)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즉, 여름에는 피서를 겸해 개경 탄현(炭峴) 밖에 있는 귀법사(歸法寺) 등의 산사(山寺) · 승방을 빌려 공부하였다. 특히 과거에 합격한 제자 중 아직 관리가 되지 못한 자를 선정해 함께 생도들을 가르쳤다.

최충의 교육사업은 큰 반향을 일으켜 과거를 볼 사람은 최충의 도중(徒中)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또 이것을 모방해 개경에 11개소, 합하여 12도의 사학이 다투어 세워지게 되었다. 이들 도의 설립자는 모두가 학식과 명망이 있고 벼슬과 지체가 높았으며, 대체로 과거시험관을 지내고 유학에 힘쓴 선비들이었다. 따라서 사학은 관학을 압도해 널리 오래도록 번창해나갔다. 최충의 사업은 자손에게 계승되어 자손들이 문행(文行)으로 출세했을 뿐 아니라, 후진교육에 힘써 문헌공도는 연면히 학계의 중심체가 되었다.

최충의 문장은 시구 몇 절과 약간의 금석문자가 전해질 뿐인데, 이것은 무인의 난으로 문신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불태워질 때 함께 없어진 탓이라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헌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문종은 1058년에 국가 중요정책이나 군국대사를 자문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예물을 하사하기도 하였고, 1065년에는 그에게 양평부원군 등의 작호를 내렸다. 1068년에 그가 서거하였을 때에 백성들 및 문종은 그를 기리는 조문을 썼고, 유학 교육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배출한 공 덕분에 사후에도 사학의 시조이자 해동공자로 불렸다.

최충의 업적[편집]

최충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동쪽 나라의 공자라는 뜻'의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일컬음을 받았으며 고려의 유학을 진흥시켰다. 인간을 형벌로만 다스리는 것은 차짓 원한을 사게 할 수 있으니 차라리 풀어주어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편이 적을 만들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 역시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사회체제에 대한 그의 시각은 매우 보수적이고 원리원칙에 충실하였다.

최충이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듣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니라 9재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몸소 육예(六藝)에 능통한 자가 70여 명이었다고 한다. 최충은 9재를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에 공자와 견주어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최충의 사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최충을 단지 과거시험 교육에 전념한 학자로 이해하였고, 또 불교 문자를 썼다는 이유로 그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동방 학교의 흥함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를 단지 교육에 공이 있는 인물로만 평가하였던 것이다.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 등이 현재 전한다. 그 뒤 정종의 사당에 함께 모셨다가 그 후에 선종의 사당에 함께 배향(配享)했다.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구재[편집]

구재(九齋)는 고려시대의 사학(私學)이다. 문종 때 최충이 후진교육을 위하여 설치한 사숙(私塾)이다. 고려시대 사학은 태조 때 정악(廷鶚)이 서경(西京)에 세운 숙(塾)이 시초이나, 1055년(문종 9) 최충이 벼슬을 그만둔 뒤 세운 구재는 시설면이나 교육면에서 국자감(國子監)을 훨씬 능가하여 특히 과거응시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로 인하여 학반(學班)을 구재로 나누어 악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이라 하였으며, 학과는 5경(五經:易·詩·書·禮·春秋)과 3사(三史:史記·漢書·後漢書)를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더하였다.

구재학당은 과거응시를 위한 예비학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이는 최충이 과거의 고시관인 지공거(知貢擧)를 수차 역임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구재학당에서는 매년 여름이면 하기강습회의 하나로 하과(夏課)를 개설하였는데, 특히 귀법사(歸法寺)의 승방(僧房)을 빌려 도중(徒中)의 과거급제자로 학식이 높고 아직 임관하지 못한 자를 강사(講師)로 삼아 생도들을 교수하게 하였다. 구재는 학문뿐만이 아니라 선진(先進)과의 우정관계와 더불어 사제간의 애경(愛敬)과 도의연마(道義鍊磨) 등 실천윤리에도 힘썼다. 그리고 구재의 교육방침을 보면 기송사장(記誦詞章)의 학에 기우는 감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문을 위주로 하는 시대풍조와 과거 준비에 따른 불가피성 때문이었다.

구재는 최충이 죽은 후에도 문헌공도라 하여 오랫동안 과거응시자의 준비기관으로 존속되었다. 구재가 번성하자 11명의 학자들이 그 학풍(學風)을 모방하여 사립학교를 개설하였는데, 구재를 포함하여 이를 12도(十二徒)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학(官學)은 더욱 위축되고 사학만이 발달하는 기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문헌서원[편집]

문헌서원(文憲書院)은 경기도 오산시 내삼미동에 있는 서원이다. 고려 시대 문신, 유학자 최충(崔沖, 984~1068년)과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 최유길(崔惟吉)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본래 1550년(명종 5) 황해도 해주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45년까지 보존되어 왔다. 이후 남북이 분단되어 해주 최씨 종중에서 오산에 다시 건립하였다. 서원 규모는 부지 12,213㎡, 영정각 89.1㎡, 서원 330㎡이다. 경내에는 영정각과 강당을 겸한 2층 건물이 있는데, 영정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로서 청기와를 얹은 팔각지붕의 건물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최충〉,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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