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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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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

고려 현종(顯宗)은 고려의 제8대(재위: 1009.2.~1031.5.) 왕이다.

개요[편집]

  • 고려 현종은 제8대 왕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고려가 전성기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성명은 왕순(王詢)이고 자(字)는 안세(安世)이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태조(太祖)의 여덟째 아들이자 후일 안종(安宗)으로 추존되는 왕욱(王郁)이고, 어머니는 태조의 손녀이자 경종(景宗)의 네 번째 왕비이며 성종(成宗)의 여동생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경종이 죽은 뒤 헌정왕후는 사저(私邸)에 나가 살았는데, 그때 왕욱과 사통하여 현종을 가졌다. 이 일이 알려지자 성종은 왕욱을 사수현(泗水縣, 경상남도 사천시)으로 유배하였고, 헌정왕후는 왕순을 낳은 뒤 곧 사망하였다. 이때가 992년 7월이었다. 성종은 왕순을 왕궁에서 기르도록 하였는데, 2살 무렵 사수현으로 보내 왕욱과 함께 살도록 조치하였다. 왕순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시 2수를 지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어릴 적부터 왕위에 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각종 제도를 정비한 현종은 1031년 4월 병이 들었고, 5월에 위독해져 태자(太子) 왕흠(王欽, 덕종(德宗))을 후계자로 삼고는 곧 중광전(重光殿)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호(謚號)는 원문(元文), 묘호(廟號)는 현종(顯宗)이며 송악(松嶽) 서쪽 산기슭의 선릉(宣陵)에 장사지냈다. 1056년(문종 10)에 대효(大孝), 1140년(인종 18) 덕위(德威), 1253년(고종 40) 달사(達思)라는 시호가 더해졌다. 원정왕후(元貞王后) 김씨(金氏), 원화왕후(元和王后) 최씨(崔氏), 원성태후(元城太后) 김씨(金氏),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金氏) 등 총 13명의 후비(后妃)를 두어 5남 8녀를 얻었다.[1]
  • 고려 현종은 고려의 제8대 국왕이다.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 보위 즉위 이전의 작위는 대량원군(大良院君)이었고,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묘호는 선릉(宣陵), 불교 승려 시절 법명은 선재(禪齋)이다. 태조의 아들 안종과 헌정왕후 황보씨의 아들이다. 오랜 여요전쟁의 여파로 여럿 소실된 고려실록을 재편찬하고, 초조 대장경을 간행하였으며 교종 대사찰인 현화사 건립을 지시하였으나, 역시 유교의 진흥에도 힘써 설총과 최치원에게 작위를 추증하고 문묘(文廟)에 처음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조성도감을 설치하여 1029년 8월, 재위 20년에 23km에 달하는 거대한 나성을 쌓아올렸다. 1011년 8월 재위 2년 째에는, 개경의 황성을 증축하고 고려 태조의 뜻을 받들어 장락궁에 새로 황성을 쌓았다. 경제 정책으로는 농상(農桑)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감목양마법(監牧養馬法)을 제정했으며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을 실시했다. 세력 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자신의 외가와 가까운 구 신라계 인사들을 중용하여 요직에 발탁하였다. 현종은 거란과 변방 야인들의 침입에 대응하여 송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하는 한편, 취약한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왕족과 호족들을 경계하였다. 1031년에 4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宣陵)이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2]
  • 고려 현종의 이름은 왕순(王詢). 자는 안세(安世). 아버지는 태조(太祖)의 여덟 째 아들인 안종(安宗) 왕욱(王郁)이다. 어머니는 경종의 비 효숙왕후 황보씨(孝肅王后皇甫氏)이다. 처음에는 승려가 되어 숭교사(崇敎寺)와 신혈사(神穴寺)에 있다가 강조(康兆)의 정변에 의해 목종이 폐위되자, 1009년 2월에 왕위에 올랐다. 고려 왕조가 성립한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시기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였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십훈요(十訓要)」 등을 통해 제시했던 국가의 기본방향이 성종대에 일단계 정비되고, 현종대에 비로소 기틀을 다지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호족세력에 의해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국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강력한 북진정책의 실천으로 북방민족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현종대에 구체화되었고,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대내적으로 호족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책과 군현제의 완성이다. 1018년(현종 9) 5도양계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목(牧)-도호(都護)-군(郡)-현(縣)=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골격이 완성되었다. 군현제를 유지하기 위해 같은 해 각 군현의 호장(戶長) 등 향리의 정원규정, 향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비록 거란과의 충돌로 인한 외환이 있었으나 대내적으로는 덕종 · 정종조의 안정기를 오게 한 기틀이 마련되었다. 특히 불력(佛力)으로 외침을 방어하고자 하여 착수, 제작한 6천여 권의 대장경은 현종 때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능은 선릉(宣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능현(陵峴)에 있으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3]
  • 고려 현종은 고려의 8대 국왕으로, 이름은 왕순(王詢), 자는 안세(安世)이다. 간난신고 끝에 즉위하였으며, 지방 제도 정비 등 고려 왕조의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종은 특히 현재의 서울특별시 지역과 관련이 크며, 도봉구와도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현종은 고려 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인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경종(景宗)의 제4비인 효숙 왕후((孝肅王后) 황보씨(皇甫氏) 사이에서 992년(성종 11) 태어났다. 당시 효숙 왕후는 남편인 경종이 죽어 과부로서 궁밖에 나와 거처하고 있었고, 왕후의 집과 안종의 집이 가까워 인연을 맺게 되었다. 현종의 후비(后妃)로는 원정 왕후(元貞王后), 원화 왕후(元和王后), 원성 태후(元成太后), 원혜 태후(元惠太后), 원용 왕후(元容王后), 원목 왕후(元穆王后), 원평 왕후(元平王后), 원순 숙비(元順淑妃), 원질 귀비(元質貴妃) 및 궁인 한씨·이씨·박씨가 후비전(后妃傳)에 들어 있다. 후비로 이처럼 다수의 인물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고려 왕실이 일부다처제였고, 또 궁인 역시 후궁에 대한 칭호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현종의 자녀로는 덕종(德宗), 정종(靖宗), 문종(文宗),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 왕충(王忠), 효정 공주(孝靜公主), 천수 전주(天壽殿主), 인평 왕후(仁平王后), 경숙 공주(景肅公主), 효사 왕후(孝思王后), 효경 공주(孝敬公主), 경성 왕후(敬成王后), 아지(阿志)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종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후 대내외적으로 체제를 정비하여 거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지방 제도의 정비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4]

강조의 정변과 즉위[편집]

  • 강조의 정변(康兆─政變)은 고려 목종 12년(1009)에 서북면순검사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996년 왕욱이 사망하자 왕순은 개경으로 올라갔고 대량원군(大良院君)이라는 군호(君號)를 받았다. 그러나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목종(穆宗)의 후계자로 세우려 하던 천추태후(天秋太后, 헌애왕후)에 의하여 12세의 나이에 강제로 승려가 되어 숭교사(崇敎寺)로 보내졌다. 이후 1006년 삼각산(三角山)의 신혈사(神穴寺)로 보내졌다. 세상 사람들은 신혈사에 살게 된 대량원군을 신혈소군(神穴小君)이라 불렀다. 이후 천추태후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대량원군을 죽이려 하였지만, 신혈사의 승려들이 그를 도와 해를 입지 않았다. 이에 대량원군은 목종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였고, 1009년 목종은 선휘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보내 태조의 유일한 적손(嫡孫)이었던 대량원군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다. 강조의 정변(康兆─政變)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목종의 부름을 받은 강조가 잘못된 정보로 인해 군대를 이끌고 개경(開京)에 입성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강조는 분사(分司) 감찰어사(監察御史) 김응인(金應仁)을 보내 대량원군을 맞이하게 하였다. 김응인은 황보유의와 신혈사에서 만나 대량원군을 개경으로 인도하였다. 강조의 정변은 성공하여 목종은 폐위되었고, 대량원군이 즉위하였다. 현종은 적법한 절차를 밟아 목종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으나 강조가 주도한 정변의 결과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을 옹립하였다. 또한 김치양과 그 아들 등 7명은 처형하였고, 남은 일당과 천추태후의 친족 등 30여 명은 섬에 유배 보냈다. 또한 목종을 폐위시켜 양국공(讓國公)으로 삼아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忠州)로 가게 하였고,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부암(傅巖) 등에게 감시하도록 하였다. 목종은 최항에게 '변란이 일어난 것은 내가 부덕한 탓이며, 시골에서 노년을 보내길 바란다'는 말을 현종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목종이 적성현(積城縣)에 도착하자 강조가 보낸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가 독약을 올렸다. 목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김광보는 목종을 호위하던 중금군(中禁軍)의 안패(安霸) 등에게 목종을 죽이지 않으면 멸족당할 것이라는 강조의 말을 전하였다. 그날 밤 안패 등은 목종을 죽였고, 강조에게는 목종이 자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강조는 목종을 적성현에서 제사 지내고 한 달 뒤에 화장하였으며, 능의 이름을 공릉(恭陵), 시호를 선령(宣靈), 묘호를 민종(愍宗)으로 정하였다. 목종이 죽자 천추태후는 황주(黃州)로 옮겨져 21년을 더 살다가 현종 20년(1029) 66세의 나이로 숭덕궁(崇德宮)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거란은 난을 일으켜 목종을 죽인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1010년 11월 40만 명의 군대로 고려를 공격하였다. 강조의 정변이 전쟁의 구실이 된 것이다. 고려는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강조는 거란군에 맞서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강조는 거란의 황제 성종(聖宗)의 회유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다가 처형되었다.

고려 현종의 제도개편[편집]

  • 몽진 과정에서 갖은 고생을 겪은 현종은 제2차 거란의 침입이 끝난 후 1012년에 지방제도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성종 시기에 갖추어진 12주(州)의 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호(都護) 및 70도(道) 안무사(按撫使)를 설치한 것이다. 1018년에는 안무사를 폐지하고 4도호 8목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두었는데, 양계(兩界)를 제외하고 외관(外官)이 파견된 주현(主縣)이 그렇지 않은 속현(屬縣)을 관할하게 하였으며 상급의 주현을 계수관(界首官)으로 설정하여 지방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이와 함께 세습직의 성격을 지녔던 향리의 직첩(職牒)을 중앙에서 발급하도록 하였고, 향리의 정원(定員)을 설정하였으며, 공복(公服)을 제정하여 위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아버지와 형제가 호장(戶長)인 사람은 사심관(事審官)이 될 수 없게 하였고, 사심관의 선발에 그 지역 사람들의 여론이 반영되도록 하였다.
  • 고려 현종은 임금이 주재하는 복시(覆試) 7차례를 포함한 총 15차례의 과거(科擧)를 시행하여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최항(崔沆)을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삼아 전쟁으로 불탄 태조~목종 7대의 기록인 7대실록(七代實錄)의 편찬을 시작하여 왕실의 정통성을 세웠다. 아울러 고려인의 단결을 위하여 여러 차례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를 열었고,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염원을 담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조판하였으며, 각지에 불교 사찰을 세웠다. 이때 세워진 대표적인 사찰은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 충청남도 천안시), 현화사(玄化寺, 개성시)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등을 추봉(追封)하고 처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현종(顯宗,992~1031)〉, 《두산백과》
  2. 현종 (고려)〉, 《위키백과》
  3. 현종(顯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현종〉,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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